1두 = 1 말 = 18리터(일본식) ~ 20리터(미터법)
조선시대 1말(1두)이 5.8리터라는 근기가 뭔가요?
내가 조선시대 때부터 살아올 만큼 나이가 많지 않아서^^ .... 왜 미터법으로 20리터인 한 말이 조선시대 때는 5.8리터였었는지 궁금....그리고 '말'이나 '가마니'는 왜정시대를 거치면서 쓰이게 된 척관법으로 아는데...조선시대 때도 '말' 내지 '두'를 썼었나요???
아래 어떤 분이 임란 당시의 조선의 쌀 또는 곡물생산량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신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언급하고자 합니다........!!!
[[1,200만 석은 조선의 총 생산량이 아니고, 왜구놈들이 수탈해간 농작물 량이란다.
실제로 조선 생산량은 그것을 월등히 넘는거지.]].............??????
.
.
.
1,200만석이란 임란 당시에 일본군이 조선8도 전역을 점령한 이후를 상정한
조세 할당량을 언급하신 것 같은데......
이는 일본군이 실제 수탈한 조세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추상적인 계획에 그친 조세량입니다.
더구나 내용적으로도 실제 해당 도의 생산량과는 전혀 동떨어진 예를 들자면....
인구와 생산력이 가장 희박한 축에 속했던 함경도에 할당된 조세량이 200만석을 넘어
경상도, 전라도 다음의 조세량이었다는 부분에서도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평안도 또한 거의 180만석에 달하는데.... 임란 당시 일본군은 평안도에서는
남쪽 일부지역이라 할 수 있는 평양과 주변 몇몇 고을만을 점령했을 따름인데
어떻게 180만석을 수취할 수 있었는지......???
더구나 임란 당시에 전라도의 경우 일본군은 거의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는데.....
(금산을 통해 무주~전주 인근까지 일시적으로 진출하고,
2차진주성 전투 이후 전라도 서쪽 일부인 구례,광양까지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가
철수한 적은 있지만....)
또한 일본의 석고 개념은 쌀을 포함한 곡물생산량 뿐만 아니라 모든 농업-상업 생산량을
쌀로 환산해서 계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에서의 조세 할당량 1,200만석... 그리고 1,200만석을 통해 유추하여
4:6 또는 5:5를 적용하여 추산한 조선의 생산량 2,400만석~3,000만석 또한 죄다
곡물생산량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
.
.
또한 결정적으로 임란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조선8도에 대한 조세할당량 자체가
부정확한 지식을 근거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도가 확연히 떨어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해당 도의 기후, 인구, 농경지의 규모나 비옥도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해당 도의 면적만을 고려하여 작성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