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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30 20:01
[한국사]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일까? 사택왕후일까?
 글쓴이 : 밝은노랑
조회 : 1,630  

「서동요」의 주인공은 무왕이었나?


드라마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왕이 백제 무왕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는 그 이름이나 업적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왕의 전사 이후 백제는 다시 침체에 빠져 혜왕, 법왕은 재위기간이 1년 남짓일 정도로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왕은 왕권을 회복하고 미륵사를 창건하며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려고 했습니다. 또한 무왕은 「서동요」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합니다. 「서동요」는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에 나오는 노래인데, 말 그대로 ‘서동이의 노래’입니다. 먼저 「서동요」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서동(薯童)’은 ‘마(薯)를 캐어 먹고 사는 아이(童)’라는 뜻입니다.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당시 백제의 서울이었던 사비(부여) 근처의 남지란 연못가에 살았습니다. 연못에 살고 있는 용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서동이었죠. 서동이 자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하자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해 신라 금성(경주)으로 갑니다. 서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환심을 사고, 이른바 「서동요」를 가르쳐서 부르게 했죠. 결국 「서동요」가 신라에서 대유행을 하자 신하들은 이를 문제 삼아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요즘에도 한번 루머가 퍼지면 모두 사실인 것처럼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나오곤 하지요. 진평왕도 어쩔 수 없이 선화공주를 귀양 보내게 되었고, 진평왕의 왕비는 불쌍한 선화공주에게 순금 한 말을 주어 떠나보냈습니다. 귀양을 가던 선화공주 앞에 갑자기 서동이 나타나서 귀양 가는 길을 지켜주겠다고 하자, 공주도 서동에게 반하여 사랑하게 되었죠. 서동의 나라인 백제에 도착하자 선화공주는 순금을 보여 주면서 이것만 있으면 부자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순금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 서동은 자신이 마를 캐는 곳에 순금이 많다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선화공주가 깜짝 놀라서 순금을 신라의 궁궐로 보내자고 하자 서동은 이에 동의하여 순금을 산더미처럼 캐내어 신라의 궁궐로 보내었고, 결국 서동도 인심을 얻게되어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에 비추어 보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왕이 전사한 이후 백제와 신라는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특히 무왕 때는 13번의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는데, 주로 백제가 공격했습니다. 진평왕과 무왕이 실제로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면 이렇듯 자주 전쟁이 일어났을 리가 없죠. 또한 국가적 혼인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데, 『삼국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 아님을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사실은 동성왕이나 무령왕이라는 설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봅시다.


동성왕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소지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동성왕이 서동이고, 이찬 비지의 딸이 선화공주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이므로 시기가 100년의 차이가 있으며, 이찬의 딸을 공주로 표현한 것도 맞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봅시다.


무왕을 옛 책에서 무강왕(武康王)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왕이 없다.


강(康)과 녕(寧)은 뜻이 같습니다. 사극에 “강녕(康寧)하십시오”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처럼 강녕은 건강이라는 뜻의 옛말이죠. 결국 무강왕이 무령왕을 뜻하고, 서동은 사실 무령왕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무령왕은 신라 공주, 아니 신라 여인과의 결혼 기록도 없습니다. 신라 진평왕 시기와도 맞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공주가 아니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무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어쨌든 설화 속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무왕은 왕이 될 수 없는 미천한 처지였던 왕족(용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서동의 아버지가 용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연못가에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


이에 따르면 서동의 아버지는 용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무왕의 아버지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의 아버지는 법왕입니다. 그리고 법왕의 아버지는 혜왕입니다. 그런데 혜왕이 즉위한 해가 598년이고, 법왕이 죽은 해가 600년입니다. 할아버지 혜왕과 손자 무왕의 시간 차이는 2년일 뿐이죠. 그리고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면 어렸을 때 마를 캐어 먹고 살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고 위덕왕의 동생이었습니다. 왕위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왕족이었고, 실제로 위덕왕 사후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혜왕의 아들이 법왕이고 법왕의 아들이 무왕이었다면, 왜 무왕은 가난하였을까요? 『북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 위덕왕의 아들 무왕이 사신을 보냈다.


무왕의 아버지가 위덕왕이라는 것이죠. 유일하게 무왕의 아버지를 위덕왕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무왕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설명이 안 됩니다. 위덕왕의 아들이었다면 바로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였다는 얘긴데, 무왕은 왜 마를 팔고 다녀야 했을까요?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더 빈약합니다.


선화공주는 사택적덕의 따님?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이든 위덕왕이든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왕의 어머니가 정식 왕후는 물론 후궁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왕의 출생 자체가 정통성 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무왕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선화공주입니다. 이를 나타내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봅시다.


(선화공주가) 왕후가 준 금을 내놓으며 살아갈 계획을 논의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공주가 말하였다. “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서동이 말하였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두었소.”(중략) 이로부터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서동에게 황금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 사람입니다. 게다가 엄청난 황금을 이용하여 결국엔 서동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죠. 무왕은 선화공주와 결혼을 통해 순금으로 상징되는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선화공주가 백제의 왕위 결정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세력, 즉 강력한 세력을 가진 귀족 가문의 딸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를 입증하는 유물이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서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석탑 1층의 중심 기둥 윗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센티미터, 세로 10.5센티미터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새기고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죠. 다음은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를 창건하는 데 재산을 내놓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무왕의 왕후로 좌평(당시 총리 역할을 한 관직) 사택적덕의 딸입니다. 사택씨는 당시 백제 8성 대족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가문으로, 사택지적비문의“금으로 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쌓았다”는 기록으로도 그 경제력의 규모를 알 수 있죠. 무왕 즉위 전의 혜왕, 법왕은 재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왕권이 불안정했습니다. 무왕 역시 아버지가 용으로 표현되었지만, 성장 과정에서 마를 캐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왕위계승 서열이 뒤지는 왕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 세도정치 시기에‘강화 도령’철종이 즉위하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조, 헌종 때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왕권은 약화되었고, 철종 역시 강화도에서 글자도 배우지 못할 정도로 미천한 생활을 하며 살았던 왕족이었죠. 당시 세도 가문들에게는 허수아비 왕으로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왕이 즉위하기 전 왕권은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고, 무왕이 즉위하게 된 이유도 철종 당시와 같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에게는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던 사택 가문에서는 미천한 왕족이었던 서동을 사위로 삼았고, 사택 가문의 권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죠.


선화공주는 두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무왕은 왜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을까요? 미륵사는 무왕 35년(634)에 완공된 왕흥사입니다. 무왕의 재위 기간 42년 중 거의 말기에 미륵사가 완공되었죠. 무왕이 즉위하여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에서 미륵사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동 설화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삼국유사』속 미륵사 창건 연기 설화의 내용을 잠깐 살펴봅시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도착하자 미륵 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십시오. 진실로 저의 소원입니다.”왕이 이를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일을 의논했다. 이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고 연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곳에 미륵 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國史에는 왕흥사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도록 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라 『삼국유사』는 매우 정확한 기록으로 입증이 되어 있습니다. 미륵사 터에 대한 조사 결과 연못을 흙으로 메워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갖춘 3원(3탑 3금당) 양식으로 건설되었음이 알려졌습니다. 미륵 신앙은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륵이라는 부처님이 오실 것을 기원하는 불교 신앙입니다. 그리고 미륵이 나타나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전륜성왕입니다. 무왕은 미륵사를 세워서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강조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무왕은 미륵사를 왜 익산에 건설했던 것일까요? 익산은 무왕이 서동 시절 자라던 곳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다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익산에는 지금도 ‘말통대왕릉’으로 알려진 왕릉급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말통대왕릉’은 ‘맛둥대왕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맛둥’은 서동의 순 우리말 이름입니다. ‘익산 천도’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무왕이 익산에 잠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무왕은 자신의 성장 지역으로 천도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미륵사를 세우는 대역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신라 공주도 아니고 무왕의 왕비도 아니었을까요? 선화공주는 어쩌면 두 인물을 조합하여 표현한 설화적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와 진평왕의 공주인 부인(왕후 바로 아래 단계. 『삼국유사』에는 왕후가 아닌‘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 섞여서 표현된 인물이라는 것이죠.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를 분석해 보면 서동이 계획적으로 퍼뜨린 헛소문에 따라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 귀양을 갑니다. 그리고 서동은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후광으로 왕위에까지 오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무왕은 적통이 아닌 왕족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사택 가문의 딸인 왕후의 덕으로 허수아비 왕이 되었을 뿐이죠.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좋은 계책이 바로 신라 진평왕과의 혼인 동맹이었습니다.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면서 진평왕의 딸을 후궁으로 달라는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인질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서동의 헛소문 퍼뜨리기와 선화공주가 귀양을 떠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요? 결국 무왕은 신라의 공주를 후궁으로 맞이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보완하고, 사택 가문으로 대표되는 백제 귀족 세력도 견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던 것이죠. 무왕의 연인 선화공주는 사택 가문의 딸인 왕후와 신라 선화공주를 중의적으로 표현한 인물이라는 결론입니다.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였다


무왕의 후궁 선화공주는 정말 진평왕의 딸이었을까요? 서동 설화에서 『삼국유사』 이외에는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공주였고, 무왕에게 시집갔다면 충분히 중요한 일이었는데,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이 문제의 열쇠는 의자왕에 있습니다. 다음은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무왕) 33년 봄 정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의자왕은 무왕 33년(632)에야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힌트입니다. 의자왕은 맏아들이었는데도 무왕 33년에야 태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적자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한마디로 후궁의 아들이었다는 뜻이죠. 의자왕이 후궁의 아들이었다면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아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봅시다.


(황극천황 1년, 642년) 백제 조문사 등이 말하기를 지난해(641)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고, (중략) 올해(642) 정월 백제 국왕의 모친이 죽었고, 국왕의 동생인 왕자 교기와 국왕의 여동생 4명과 내좌평 기미,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것은 641년과 642년, 즉 의자왕 1년과 2년의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한 641년 당시 총리 역할을 하였던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지적(智積)은 사택지적비의 주인공 사택지적(砂宅智積)입니다. 그런데 사택지적비에 따르면 654년에도 사택지적은 살아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택지적이 죽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할 정도로 대숙청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륵사지 석탑(서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사리봉안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일본서기』의 기록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왕의 정식 왕후가 사택 가문의 사람이었음이 확인되면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대좌평 사택지적을 비롯한 사택 가문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의자왕의 모후(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무왕의 정식 왕후. 의자왕에게는 공식적인 어머니. 물론 생물학적인 어머니는 선화공주였죠)가 죽자 남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을 일본으로 추방했습니다. 아마도 추방이 아니라 망명이었을 것입니다. 의자왕을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인 무왕비, 즉 사택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왕후가 죽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남동생, 여동생들을 비롯한 40여 명이 일본으로 망명한 것이죠.


의자왕은 신라의 왕위계승서열 1위였다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아들이라면 즉위 초부터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인 신라를 왜 그렇게 공격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 역시 신라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 신라의 국왕은 선덕여왕입니다. 선화공주의 자매이므로 의자왕에게는 이모입니다. 선덕여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성골 남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성골은 선덕여왕과 천명공주, 그리고 다음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뿐이었죠. 하지만 성골 한 명이 더 있었죠. 바로 선화공주입니다.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은 백제의 왕입니다. 골품으로 따진다면 무왕 역시 백제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의 성골 선화공주와 백제의 성골 무왕 사이에 태어난 의자왕 역시 성골 남자가 되는 것이죠. 성골 남자는 성골 여자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앞섭니다. 이것은 의자왕이 신라의 왕위계승권을 갖는다는 논리가 됩니다. 선덕여왕은 632년 즉위했는데, 백제에서는 의자왕이 632년 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닙니다. 무왕이 재위 33년 만에야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 이유는 신라의 왕위계승권을 자신의 맏아들에게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의자왕이 선덕여왕의 신라를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대대적인 공세를 했던 것은, 자신이 신라의 진정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죠.


백제는 신라 무열왕에 의해 멸망당하였습니다. 무열왕 김춘추는 진골이었습니다. 반면에 의자왕은 성골이었죠.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의자왕이라는 것은 김춘추에게는 큰 콤플렉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화공주가 무왕과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서 의자왕이 태어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숨긴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서동 설화는 일연에 의해 『삼국유사』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미륵사지 석탑(서탑) 속에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면서 의자왕이 632년 태자가 된 이유와 의자왕이 신라에 행했던 대공세의 이유도 설명된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 <한국고대사의 비밀>(살림터) 중에서 발췌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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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9-05-31 16:08
   
이것을 "신라=진한" 에 대입하면,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됩니다.

고구려, 백제 왕족 묘비에 진한, 진조(조선) 출신이라고 적었습니다.
고구려, 백제는 부여에서 나왔죠.
이 부여가 있던 만주지역을 부여, 고조선시대에는 진한, 진조선 이라고 불렀다는걸 알수있습니다.
진한 얘기가 왜나오냐 하면,
선화공주가 신라출신이라고 한게 아니라 진한 출신이라는것으로 다시풀어서 백제 초기부터의 명문가 출생 이라는 겁니다.
이걸 여기에 맞춰 다시풀면,
선화공주의 가문이 백제초기때부터의 핵심귀족 진한출신 가문이라는 거죠.

서역에 알려진 신라는 삼국시대 신라가 아니라 고조선 부여 진한이란 겁니다.
상식적으로 지리로 볼때 고구려, 백제보다 신라가 더 유명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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