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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22 15:17
[기타] 조선 유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을까?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474  

[출처] 이투데이: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한반도설’은 조선총독부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약용 선생도 식민사학자란 말이냐?”라는 엉뚱한 논리까지 등장했다. 다산이 살아 계셨다면 그분의 애국심으로 조선총독부 사관 옹호에 나섰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모든 현상에는 뿌리가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기자(箕子) 숭배사상 때문이었다.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갔다는 기사를 가지고 평양으로 왔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의 모국이 동이족 국가였던 은(殷)나라라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기자가 온 곳은 평양이 아니다. <사기> ‘송미자 세가’ 주석인 ‘사기집해’에는 “두예(杜預:222~285)는 기자의 무덤이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있다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양국 몽현은 지금 허난성 상추(商丘)시다.


서기전 12세기 때 사람인 기자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기 시작한 때는 서기 12세기경이다. 고려사 예지에는 숙종 7년(1102) 예부(禮部)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도, 사전(祀典:제사 규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를 따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24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의 허난성에 묻혔다는 기자의 무덤을 평양에서 찾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고려사 예지는 충숙왕 12년(1325) 10월 “평양부에 명을 내려 기자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14세기 들어서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기자가 평양에 왔다는 것은 유학자들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만들어진 역사이지 실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유학이 개국이념이었던 조선에서 이런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어 ‘기자→위만→한사군’이 모두 평양에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1차 사료를 직접 검토하는 실학적 학풍이 유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서 찾은 정약용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지금 사람들은 낙랑군 소속의 여러 현이 요동에 있었다고 많이 생각한다”고 부기했을 정도로 다산 생존 시의 많은 학자들은 낙랑군의 소재지를 고대의 요동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인 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성호 이익이었는데, 그는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베이징 부근인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곳이 낙랑이라면 낙랑은 평양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삼국지> ‘위서(魏書)’ 가평(嘉平) 4년(252)조에 보면 관구검은 진남(鎭南)장군이 되어 중국 남방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평양으로 퇴각한 관구검이 수군을 동원하지 않는 한 중국 남방 지역에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사군의 위치를 찾을 때 중요한 것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인데, 현재 식민사학계는 그 위치를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운운하고 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생각한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만주)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은 같은 글에서 한사군은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다고 한 김윤(金崙)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때 이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는 학자군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약천집(藥泉集)> 패수(浿水)조에서 “패수가 요동에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라고 말하고, 답 이찰방 세구(答李祭訪 世龜)에서는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 땅에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1581~1643)도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현도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요동설을 주장했다. 

이처럼 조선에도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본 학자들은 적지 않았다. 박지원은 앞의 도강록에서 당서(唐書) 배구전(裴矩傳)을 인용해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했고, 한(漢)나라 때 사군(四郡:당서 원문에는 3군으로 나옴)으로 나누었다”면서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다”고 말했다. 한사군이 청나라 때 영평부 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영평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노룡현인데, 청나라 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영평부 조에서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라고 낙랑군이 현재의 허베이성 노룡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송(北宋)의 낙사(樂史:930~1007)가 편찬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물론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낙랑군은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던 식민사학이 이제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품으로 도피한 셈인데, 정작 조선 유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꾸짖을 것이 틀림없다.



[출처] 이투데이: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379010#csidx59b6ee69ab8e5139f9b202a7f8684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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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일일일 19-05-23 09:25
   
고조선의 연구가 많지 않다보니 중국의 역사서를 참조할 수 밖에 없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에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한가지 확실한건 고조선이 실증된 역사이고, 이를 기반으로 증거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생각으로는... 순전히 제생각입니다.
한사군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만들어진 영역이라고 한다면, 위만조선의 절반은 흡수하고, 절반에 대해서는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평양지역에 낙랑이 존재했었고, 아니라고 하는 학자는 극소수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대부분의 역사서에 따르면...)
그렇다면 요동성 등 고조선의 여러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유민들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오면서, 고조선은 멸망하고, 요동의 고조선 땅은 한무제가 흡수해버리고, 한반도는 한사군을 설치해서 자치제를 실시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백운 19-05-23 21:45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냐 요동이냐를 놓고 여전히 갑론을박중이군요.

한족들이 허구로 써놓은 엉터리 기록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고생을 사서 하는 것 같습니다.

한사군이 어디냐를 따지기에 앞서 실제로 한사군이라는 실체가 있었는 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사군은 한무제 유철이 설치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동 시대의 인물이었던 사마천이 당연히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천은 사기에서 한사군에 대한 상세한 언급도 없이 그냥 사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유철이 한사군을 설치한 동기가 전쟁에 이겨서 그 땅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데, 전쟁에서 이긴 양반이 자기 수하 장수의 목을 쳤다고 하니 개연성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또한 천이 몰랐던 사군의 이름을 후한의 반고가 한서지리지에 빼곡하게 싣고 있지요.

선조들이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던 사실을 그는 꿈속에서 전해들었나 봅니다.

그리고 유철이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다고 하는 데, 낙랑(樂浪)은 우리말 나라를 그렇게 옮긴 것이니 이는 유철을 한민족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설프게 꾸며낸 한사군을 왜 인정하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기원전 2333년부터 중원 대륙은 한알(天)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한알은 아스알에서 태어났기에 큰 알에서 나왔다고 하여 그리 불리게 된 것이지요.

아스알은 배 위에 알이 놓여 있는 형상인 데, 대홍수 시절 한민족을 태우고 온 방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스알의 형상을 글자로 그려 조(朝)라고 하였으며, 아스알의 형상으로 갓을 만들어 머리에 쓰니 이분을 한알(天)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아스알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던 코룸(崑崙)의 위에 있었으니 이는 대홍수의 피해속에서도 마른 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요.

코룸은 오악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는 데, 다른 무리의 지도자들은 한알을 밑에서 받쳐준다는 뜻으로 아스알을 받치고 있는 코룸의 형상으로 만든 갓을 썼으니 이 흔적이 스키타이 금관을 거쳐 유럽에서 크라운(Crown)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 솟대(蘇台)단군 제위시에 코룸의 화산폭발로 아스알이 지상에서 사라져 버리자 한알은 더 이상 그런 갓을 쓸수가 없게 되었지요.

이때문에 한알이 자리에서 물러나 버리니 남겨진 무리들이 삼한(三韓)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삼한은 한알이 다스리던 중원 대륙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어느 누구도 한알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주장할수가 없었으니 단군의 능이 있는 서안지역을 비워둘 수밖에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코룸에서 날아온 화산재와 먼지구름에 뒤덮였을 것이고 이로 인해 하가점하층문화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지역은 하가점상층문화가 등장할 때까지 약 200년 이상 인간이 살수 없는 불모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삼한이 어느 곳에 있었는 지 대충 짐작이 될 것입니다.

한편 삼한이 건국되는 어수선한 시기에 서안이 비어있는 틈을 타 상(商)의 무리들이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고 서진을 하게 되니 삼한의 임금들이 고죽국 출신의 태공망 강여상에게 군사를 내어주고 이를 물리치도록 하였지요.

이로 인해 상의 무리들이 궤멸되니 삼한의 임금들은 그들에게 주(周)라는 국호를 내려주게 됩니다.

그들 무리에게 주(周)라는 국호를 내려준 이유를 살펴보면 단군의 릉이 있는 땅(土)을 삼면에서 둘러싸고 오직 아래쪽에만 입구(口)를 두어 삼한의 후손만이 드나들게 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문장 역할을 한 진한(辰韓)이 삼한의 좌장을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주나라의 건국 목적이 이와 같으니 지금의 서안을 단군의 릉을 지키는 곳이라 하여 호경(護京)으로 불렀을 것이 당연한데 나중에 한족들이 이를 호경(鎬京)으로 변조하게 되지요.

또한 그곳의 관리책임자를 태공망으로 할 경우 그가 다시 상의 무리와 같은 욕심을 품을 것이 우려되어 대신 그의 사위를 그 자리에 앉혔을 것이니 이가 역사의 기록에 무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삼한의 영토는 서안을 중심으로 사방 천여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모두 포함이 되는 것이지요.

삼한은 창조주 마라(麻羅)의 권능을 이었다는 뜻으로 그들 무리의 이름을 마라가 존재하는 별의 이름인 마벨을 받아 짓게 되니 이로써 마한(麻韓)과 벨한(番韓)과 진한(辰韓)이 순서대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한의 탄생경위가 이와 같으니 그들의 강역 또한 서로 국경선을 이루며 붙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국경선은 고대로부터 강을 경계로 하여 획정하였으니 삼한중에 가운데 있던 벨한(番韓)의 주위를 흐르는 강이 국경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벨의 주위를 흐르는 강의 이름은 보지 않아도 벨물이라 불렀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앞말의 받침이 탈락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나니 벨물의 발음은 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베물이 나중에 한족들의 기록에 패수(沛水)와 패수(浿水)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수(浿水)를 설명함에 있어 사기집해에는 "한서(漢書) 음의(音義)에 이르기를 패(浿)음은 방패반(傍沛反)이다" 하였으니 패(浿)의 소리는 배가 되는 것이지요.

또 사기정의에는 패(浿)의 음을 보대반(普大反)이라 하였으니 패(浿)의 소리가 역시 배가 되는 것이지요.

후한 때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 수부(水部)애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가 나란히 등장하는 데, 패(沛)의 소리를 보개절(普蓋切)이라 하고 패(浿)의 소리를 보배절(普拜切)이라 하였으니 공히 배로 소리가 남을 알수 있습니다.

이 외에 당운, 집운, 운회에서도 패(浿)의 발음은 보개절(普蓋切)로 나타나고, 패(沛)의 발음은 보개절(普蓋切) 또는 박개절(博蓋切)로 나타나니 공히 그 소리가 배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패수(沛水)나 패수(浿水)는 공히 우리말 베물의 소리를 그렇게 옮긴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한편 사기집해에서는 번(番)의 발음 또한 보개반(普蓋反)이라 하였으니 번(番)의 소리 역시 배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 번한(番韓)은 베한의 소리를 그렇게 옮긴 것이고 본래의 소리는 벨한이었음을 알아낼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번(番)을 달리 보한반(普寒反)이라 하였으니 반으로도 소리가 나는 데, 이는 베한을 빠르게 읽는 소리를 옮긴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번한(番韓)은 벨한의 소리를 그렇게 옮긴 것이고,  또한 벨한의 주위를 흐르는 강을 벨물로 불렀다는 것을 알아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벨한(番韓)의 서쪽에는 패수(沛水)를 경계로 하여 마한( 麻韓)이 자리를 잡고, 그 남쪽에는 패수(浿水)를 경계로 하여 진한(辰韓)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패수(沛水)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분하(汾河)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수 있지만 패수(浿水)는 기록에 따라 여러 곳을 옮겨 다니고 있는 데, 당시의 정황상 황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 삼한의 위치를 피치못하게  한족들의 기록을 빌리면 마한(麻韓)은 분하 서쪽에 있던 흉노를 가리키고, 벨한(番韓)은 분하의 오른쪽과 황하의 위에 있던 조선(朝鮮)을 가리키며, 진한(辰韓)은 황하 아래쪽에 있던 서(徐)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한이 자리잡고 있는 터전 위에서 어찌 감히 한족들이 활개를 칠수 있었겠습니까?

한족들은 주나라 이래로 당나라까지 결코 서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울 그들 스스로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http://m.greatcorea.kr/a.html?uid=250

이런 마당인데 한사군이라니..
선조들께서 저 세상에서 보시면 참으로 땅을 치고 한탄할 노릇일 것입니다.
여수오리 19-05-25 00:49
   
문화는 스스로 만들돼 효률성 때문에 발전하지 안을까여. 외세든 어쩠든 그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활룔하고 사용해야지만 문화조 그게 홱일화보다  다양성이고  창조하는 능력이고 밣혀내놔야할 과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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