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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02 00:11
[한국사] 거란 심주(沈州)의 위치와 이치 문제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857  

지난 2017년부터 고려 전기 서북계와 거란 동경도의 실상을 고찰하면서 여러 사서를 교차분석하였습니다. 통전, 자치통감주, 책부원귀, 태평환우기, 무경총요, 요사, 금사, 원사, 대원일통지, 대명일통지, 명사, 청사, 만주원류고, 독사방여기요, 성경강역고 등.


이 과정에서 거란 동경도 주, 현의 대부분이 거란 성종(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반)의 동정활동, 즉 고려와 여진족에 대한 정벌 활동 이후에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거란 동경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주, 현이 현 요하 서쪽에서 그 동쪽으로 교치되었다는 가설을 세웠고 그것을 입증하고자 노력과 시간을 집중하여 왔습니다.


무경총요는 1040년에 착수해 1044년에 완성한 송나라의 군사정보백과입니다. 거란의 지리정보는 전집 북번지리에 수록돼 있는데 그 정보가 무경총요보다 2세기 가량 후에 작성된 요사 지리지의 내용과 상이한 것이 다수 있습니다. 이 상이한 이유는 송나라가 거란의 지리정보를 입수해 수록하면서 서로 각기 다른 시기적 오차를 지닌 정보가 취합된 결과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입니다.


거란 동경은 993년~1020년 사이에 현 북진시 방면에서 현 요양시 방면으로 이치되었는데 무경총요는 이치 전의 지리정보와 이치 후의 지리정보가 혼합돼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지난 2018년 봄, 무경총요를 고려 전기 서북계 및 거란 동경도 실상 연구에 최초로 도입한 이래 이 사서를 토대로 여러 고찰을 진행하였는데 앞의 고찰에서 거란 동경이 현 북진시 동쪽에 있는 흑산현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을 무경총요와 요사 지리지, 독사방여기요 등의 교차 분석으로써 확립한 바 있으며 그밖에 요수의 위치와 관련하여 무경총요의 기록에서 이상한 기술이 있어서 주목하여왔는데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沈州,德光所建,仍曰昭德軍,契丹舊地也。東至大遼水,水東即女真界,西南至東京百三十里,北至雙州八十里。


심주는 야율덕광(거란 태종)이 건립한 것으로 소덕군을 두었으며 거란의 옛땅이다. 동쪽으로 대요수에 이르고, 대요수의 동쪽은 즉 여진계(구역)이며, (심주에서) 서남쪽으로 동경까지 130 리에 이르고, (심주에서) 북쪽으로 쌍주까지 80 리에 이른다.


무경총요가 기술하는 심주가 현 심양이 맞다면, 그리고 요수가 현 요하가 맞다면 무경총요가 기술한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요하는 심양의 서쪽에 있기때문이죠.


무경총요의 심주 기술조에서 언급한 ‘요수’가 학계에서 혼하에 비정하는 ‘소요수’라 한다면 이것 또한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무경총요에서는 소요수를 현 세하~대릉하로 명확히 기술하고 있고 둘째, 혼하는 현 심양의 동쪽이 아니라 바로 남쪽에 붙어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의 고찰에서 무경총요가 언급하고 기술한 요수 관련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하여 무경총요 기록 자체만을 근거할 때에 대요하는 현 요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 심양시에 위치한 심주의 동쪽으로 이 요하가 흘렀다?


현 요하가 현재의 물줄기보다 동쪽에 있었던 것은 옳습니다. 이 역시 이미 따져봤습니다. 명·청 시대에 현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이 자주 범람하면서 본래의 물줄기 위치에서 다소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로 인하여 요하의 동쪽, 즉 요하와 심양 사이에도 늪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었죠.



<현 요하의 물줄기가 지금보다 동쪽에 있었던 것을 표현한 중국역사지도집 거란 동경도 지도>

yohaseojin.jpg



그러나 지형적으로 현 심양의 동쪽으로 요하가 흐를 수는 없습니다. 구글어스나 구글지도를 켜서 이 지역의 지형을 확인하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주의 서쪽에 요수가 있다는 무경총요의 기록은 단순히 오기일까요? 아니면 무시하고 버려도 되는 기록이겠습니까?  


우선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심주 기술을 찾아봤습니다.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沈州,昭德軍,中,節度。本挹婁國地。渤海建沈州,故縣九,皆廢。太宗置興遼軍,後更名。初隸永興宮,後屬敦睦宮,兵事隸東京都部署司。統州一、縣二:


심주(沈州), 소덕군(昭德軍)이 설치되었고 중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읍루국(挹婁國) 지역이었다. 발해가 심주(沈州)를 설치하였고 옛 현이 아홉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태종이 흥료군(興遼軍)을 설치하였다가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영흥궁(永興宮)에 예속시켰다가 나중에 돈목궁(敦睦宮)에 속하였다. 군사와 관련된 일은 동경도부서사에 속하게 하였다. 1주 2현을 관할하였다.


樂郊縣。太祖俘薊州三河民,建三河縣,後更名。


낙교현(樂郊縣), 태조가 계주(薊州)의 삼하민(三河民)을 사로잡아 삼하현(三河縣)을 세운 뒤 이름을 바꾸었다.


靈源縣。太祖俘薊州吏民,建漁陽縣,後更名。


영원현(靈源縣), 태조가 계주의 관리와 백성을 사로잡아 어양현(漁陽縣)을 세운 뒤 이름을 바꾸었다.


巖州,白巖軍,下,刺史。本渤海白巖城,太宗撥屬沈州。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이 설치되었고 하급으로 자사를 두었다. 본래 발해의 백암성(白巖城)이다. 태종이 심주에 속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장녕궁에 예속시켰다가 나중에 돈목궁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初隸長寧宮,後屬敦睦宮。統縣一:白巖縣。渤海置。


백암현(白巖縣), 발해가 설치하였다.


지리지에는 특별히 심주의 위치나 이치를 유추할만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沈州와 瀋州가 혼용돼 쓰인다는 것을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沈과 瀋은 통용자로서 물, 잠기다, 즙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여서 沈州가 아니라 瀋州를 찾아 기록을 수색하였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遼史 卷二本紀第二 太祖下》


神冊六年 十一月癸卯,下古北口。丁未,分兵略檀、順、安遠、三河、良鄉、望都、潞、滿城、遂城等十餘城,俘其民徙內地。十二月癸丑,王鬱率其眾來朝,上呼鬱為子,賞賚甚厚,而徙其眾於潢水之南。庚申,皇太子率王鬱略地定州,康默記攻長蘆。唐義武軍節度使王笮直養子都囚其父,自稱留後。癸亥,圍涿州,有白免緣壘而上,是日破其郛。癸酉,刺史李嗣弼以城降。乙亥,存勖至定州,王都迎謁馬前。存勖引兵趨望都,遇我軍禿餒五千騎,圍之,存勖力戰數四,不解。李嗣昭領三百騎來救,我軍少卻,存勖乃得出,大戰,我軍不利,引歸。存勖至幽州,遣二百騎躡我軍後,我軍反擊,悉擒之。己卯,還次檀州,幽人來襲,擊走之,擒其裨將。詔徙檀、順民於東平、瀋州。


요 태조 야율아보기 신책 6년, 12월(음), (야율아보기가) 조서를 내려 단주(檀州)와 순주(順州)의 백성들을 동평(東平郡)과 심주(瀋州)로 옮겼다.


신책 6년은 서기 921년으로, 발해 홀한성이 거란에 함락되기 5년 전입니다. 그런데 단주와 순주의 민호를 발해 영토 가운데 일찍이 거란의 차지가 된 동평군(발해 동평부, 즉 거란 요주)과 심주로 옮겨서 채웠다?


이 기록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심주가 동평부와 함께 거란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경총요와 요사, 그리고 후대의 여러 사서에서 발해 멸망 전에 이미 먼저 거란의 땅이 된 발해 땅은 동평부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현 요하 동쪽의 땅들은 모두 발해 멸망 후에 거란 땅이 되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발해 멸망 전인 921년에 이 동평부(거란의 동평군이 됨)와 함께 심주(는 본래 발해의 심주였다고 요사 지리지는 적고 있습니다)가 거론되고 있고 이 심주에 단주, 순주 등지에서 붙잡아 온 포로들로 민호를 채웠다는 요사 태조본기의 기록으로 볼 때에 심주는 동평부와 함께 이미 거란의 영토가 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심주라는 주 명칭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沈과 瀋은 통용자(혼용돼 쓰이는 말)로서 물, 잠기다, 즙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 주 명칭은 주변의 자연환경에서 따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를 근거할 때에 심주라는 주명칭 자체 역시 심주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명칭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 잠기다 등의 뜻을 지녔다는 것은 그 지역이 늪지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거란(요)과 금 시대의 현 요하 주변의 늪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또 1125년 허황종의 기록에서 본 바와 같이 요하 서쪽, 현 북진시(당시 현주)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현 신민시 남쪽, 흑산현 동쪽, 태안현 서쪽의 낮은 지대가 전통적인 늪지 지역입니다. 즉 이 지역 어느 곳이 본래의 심주가 있던 곳인 것이죠.


무경총요에서 기술하는 심주의 동쪽에 있는 요수를 현 혼하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 심양을 심주로 고정하여 본다면 어떠할까요?


현 심양에 본래부터 심주가 있었다 한다면 현 요양시는 본래부터 거란 동경이 위치했던 것이 됩니다.


그런데 거란 동경은 본래 요주 동평군 지역에 동단국이 옮겨오면서 남경으로 승격된 곳이고, 그 중심지는 요양이었는데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기술을 보면 거란 동경 직속현 가운데 요양현은 본래 요양현이 아니었고, 뿐만 아니라 본래 거란 동경이 있었어야 할 요주는 현 북진시 동북쪽에서 현 신민시 방면으로 교치돼 가는 양상을 보이며 이는 앞의 여러 고찰에서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에 현 요양시에 거란 동경이, 현 심양에 거란 심주가 있었다 한다면 거란이 발해 부여성과 홀한성을 함락한 후에 마지막까지 거란에 항전한 장령부, 남해부, 철주 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장령부는 가탐 도리기에 따르면 요동성에서 동북쪽으로 개모성, 신성을 지나 발해 홀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고,


남해부는 무경총요, 요사, 금사, 대원일통지, 대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거란국지, 신오대사 등에서 현 안산시 일대에 중심지를 두고 있었으며,


철주(鐵州)는 숙여진 지역의 하나로서, 11세기 이후의 지리정보를 담고 있는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기술에 따르면 동경(현 요양시, 이치 후의 위치) 서남쪽 60 리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현 요양시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興州,中興軍,節度。本漢海冥縣地。渤海置州,故縣三:盛吉、蒜山、鐵山,皆廢。戶二百。在京西南三百里。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철주 기술 내용 자체로도 동경의 이치를 알려주는 방증인 것이죠.


이미 오래 전에 거란의 영토가 되었으되 천연의 장벽이 될 만한 것이 있어서 수십 년 자체 보호가 가능하지 바로 동경과 심주 주변을 발해가 직접 맞대고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남해부와 철주 등이 가장 늦게까지 거란에 항전하였다는 사실은 거란 동경(동평군)과 심주가 현 요하를 방벽 삼아 그 서쪽에 있었다는 방증이 되는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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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5-02 08:12
   
상기 중국역사지도집 거란 동경도 지도에서는
철주의 위치를 독사방여기요의 기술에 근거하여 표시하였다

독사방여기요는 산동8에서
ㅡ 개주위(치소 개모성)는 요동도사성(현 요양) 서남쪽 240 리
ㅡ 안시성은 개주위 동북쪽 70 리(요양 서남쪽 170리)
라고 기술하였다

이 독사방여기요의 기술은
ㅡ 첫째, 개모성은 요동성, 신성 등과 함께 고구려 서북계 북쪽 방어라인에 위치했으며
ㅡ 둘째, 개모성은 가탐도리기 기술에 따르면 신성 등과 함께 요동성 동북쪽에 위치했으며
ㅡ 셋째, 삼국사기,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 근거시 안시성은 요동, 개모, 신성, 백암성보다 남쪽에 위치했으며
ㅡ 넷째, 독사방여기요는 요동성이 심양중위(현 심양) 서북쪽 180리에 있는 요빈성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ㅡ 다섯째, 요사 지리지는 안시성이 동경 서남쪽 60 리에 있다고 했으며
ㅡ 여섯째, 무경총요는 안시성이 동경성이라고 했으며

따라서 독사방여기요의 개모성과 안시성 위치 기술은 전대 사서들과 교차가 안 되는 엉터리이다
감방친구 19-05-02 08:15
   
무경총요에서 안시성과 철주는 서로 다른 곳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ㅡ 거란 동경이 안시성이라고 했으며
ㅡ 철주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숙여진 지역에 해주, 빈주 등과 함께 속해 있다고 적었다

무경총요가 기술한 숙여진 18주는 다음과 같다

요주(耀州), □빈주(□賓州), 해주(海州), 동주(銅州)., 교주(教州), 숭주(崇州), 흥주(興州), 형주(荊州), 하주(荷州), 조주(朝州), 로주(盧州), 빈주(賓州), 우주(郵州), 철주(鐵州), 정리주(定理州), 회북주(懷北州), 록주(麓州), 광주(廣州)

그런데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는 철주가 안시성과 함께 기술되고 있다
ㅡ 철주 건무군은 옛 안시성
ㅡ 동경 서남쪽 60 리

본인은 요사 지리지의 이 기술이 동경과 그 주변 주, 현이 현재의 요ㆍ심 지역으로 이치되면서 기존의 지리정보와 이후의 지리정보가 혼합된 결과로 판단하였다

즉 안시성은 거란의 본래의 동경지역인 현 북진시~흑산현 방면에 있었고

철주는 현 요하 동쪽, 요양시 서쪽/서남쪽에 있었는데 동경이 이치되면서 안시성과 철주 지리정보가 합쳐진 것이다
감방친구 19-05-02 08:28
   
947년 석진 출황제 석중귀 무리는 금주에서 해북주(현 대릉하서쪽, 의현 남쪽), 해북주에서 현주를 지나 현주에서 요수를 건너 철주에 도착해 남해부를 거쳐 최종목적지인 황룡부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신오대사, 거란국지, 만주원류고, 독사방여기요 등)에 따르면
1) 철주는 요수(대요수, 현 요하) 동쪽에 있으며
2) 석중귀가 철주에서 남해부를 거쳐 현 사평시 방면에 있던 황룡부로 이동하며 거란 동경이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다
감방친구 19-05-02 08:41
   
석중귀의 이동경로가 의문인 것이
그 2백여 년 후인 1125년 송나라 허황종은 현주에서 늪지를 거쳐 요하를 건너 심주에 이르는 이동로를 택한 반면

석중귀는 목적지가 황룡부임에도 동남쪽인 철주와 남해부를 거쳐 북상하는 코스를 이용한 점이다

이는 현주ㅡ심주 사이의 늪지를 경유하지 않으려는 데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사방여기요와 중국역사지도집이 비정한 대로
철주가 현 잉커우 방면에 있었다면

현주에서 철주로 이동한 석중귀의 경로에 비추어 철주가 지나치게 남쪽에 있어서 석중귀가 잉커우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북상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즉 이를 토대로 할 때에
다음의 추정이 가능하다
1) 석중귀가 947년에 현주(현 북진시)와 철주 사이에서 건넌 요수는 현 요하가 아니라 현 요양하일 가능성이 있다
2) 철주는 당시의 해안선을 고려, 현 태안현과 안산시 사이, 당시 압록강이던 현 요하를 동서한 지점에 있었으며 이곳에서 남해부를 거치며 수로(배)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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