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9-04-25 20:52
[한국사] 요수(遼水) 연구 초(礎) 二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086  

요하의 물줄기는 과거에는 현재와 달랐다. 지금은 서요하와 동요하가 합수하여 남류하는 요하의 물줄기가 판진시 방향으로 빠진다. 이 방향의 물줄기를 쌍대자하(双台子河, 쌍태자하)라고 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요하의 물줄기가 심양시 육간방(六間房) 부근에서 둘로 나뉘어 하나는 판진시 방향으로 빠지고 다른 하나는 혼하와 태자하가 합류한 물줄기로 흘렀다. 이 혼하와 태자하의 합수처로 흐르는 물줄기를 외요하(外遼河)라고 하였다. 이 외요하가 잉커우만으로 빠지는 물줄기가 요하의 본류였다.


그런데 혼하와 태자하, 여기에 더해서 요하의 물길까지 받으니 잉커우 일대는 수해가 잦았고, 이 지역을 개발하고자 할 때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1958년 육간방 부근의 외요하를 인공적으로 막아서 그 물길을 끊고 요하의 물줄기를 판진시 방향으로 틀어버렸다. 이 때부터 요하는 판진시 방향으로만 빠지며 쌍대자하를 형성하였고, 잉커우 쪽으로는 혼하와 태자하의 물줄기만을 받게 되었다.


■남도뉴스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335681


■중국행정구획총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2088&cid=43792&categoryId=51740


■중문위키백과 요하

https://zh.wikipedia.org/wiki/%E8%BE%BD%E6%B2%B3



1958년 이전의 현대 지도와 전근대 지도를 살펴보더라도 요하는 외줄기로 잉커우만으로 빠지고 있는 게 분명히 나타난다. 반면에 판진시 방향은 표시돼 있지 않거나 수량이 적게 표시돼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요하 주변의 늪지대는 요하를 기준으로 할 때에 그 서쪽의 것을 가리킨다. 대릉하구로부터 판진을 거쳐 흑산과 태안의 사이를 거쳐 멀리는 신민시까지 올라간다. 특히 현 북진시에 있었던 건주에 대해서 무경총요는 옛 요택의 땅이라고 적고 있다(乾州,在醫巫閭山之南,古遼澤之地《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구글지도, 또는 구글어스 상에서 위성지도를 선택하여 지형을 살펴보면 확연히 파악할 수 있는데 지형적으로 저지대이면서 서쪽으로부터는 수많은 하천이 흘러내려오고 동쪽으로는 요하가 있어서 비가 내리면 늪의 상태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ssangdaejaha.jpg



당 태종의 고구려 1차 침략에서 진군과 퇴각 시기에 거쳐간 요택의 소처지로서 분명한 지역은 무경총요에 제시돼 있는데 이미 살펴본 바 대로 현 조양시 북표현 일대, 그리고 현 북진시 동남쪽 지역(북진 - 흑산 - 태안 - 반산의 사이)이다. 당 태종은 요택을 건넌 후에 요수를 건넜다. 따라서 요택의 위치는 요수의 위치와 밀접하며, 마찬가지로 요수의 위치는 요택의 위치를 가리킨다.


앞의 글 ‘요수 연구 1’에서 각 시대 사서별로 가리키는 요수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분명한 것은 현 한중학계, 아니 세계사학계에서 통설이자 거의 정설로서 말하는 ‘요수’는 현 요하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선 저들의 주장대로 ‘요수(遼水)’를 현 요하의 자리에 고정해 두고서 다음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통전에 나오는 기록이다. 통전에는 648년으로 돼 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647년 기사에 등장한다. 1차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 당나라는 고구려 자체를 멸망시키기보다는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대규모 군단을 파병하기보다 전투에 능한 정예부대를 선별하여 고구려의 국경지대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국경지대의 성들을 공격해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한다. 그 때에 이세적이 요수를 건넌 대목이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데 정황을 알기 위해서 우선 삼국사기 기록을 보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하>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穀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埸 使彼疲於奔命 釋耒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淥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 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朗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보장왕 6년(서기 647), 당나라의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고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무너뜨릴 수 없다. 이전에 황제가 직접 원정을 나갔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대부분의 백성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만약 적은 수의 군대를 자주 보내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이 방어하는데 지치게 만들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이 말을 따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보좌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병사를 내어 누선(樓舡)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해로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한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朗) 등을 보좌관으로 삼아, 3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의 병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세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남소(南蘇) 등의 몇 개의 성을 지나갔는데, 그 성이 모두 성곽을 등지고 싸웠다. 이세적이 이들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외곽 성들을 불사르고 돌아갔다.


<출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68&cid=49615&categoryId=49615>


이 때에 이세적이 남소성을 비롯한 몇 개의 성을 타격하고 회군하면서 요수를 건넌다. 이세적은 1차 침략에서도 요수의 상류를 건너서 현도성을 비롯한 서북 라인의 고구려성을 공략한 바 있다. 요택이 포진한 요수의 아래쪽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연지물에 의한 방호가 취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通典 卷一百八十六》


二十一年李勣復大破髙麗於南蘇班師至頗利城渡白狼黃嵓二水皆由膝以下勣怪二水狹淺問契丹遼源所在云此二水更行數里合而南流即稱遼水更無遼源可得也旋師之後更議再行


정관 21년(648 년), 이세적이 거듭 남소성에서 고구려를 대파하고 군대를 돌려 파리성에 이르러 백랑수와 황암수 두 강을 건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 무릎 아래로 물 깊이가 얕았다.


이세적이 이 두 강의 물길이 좁아지고 얕아진 것을 괴이하게 여겨 거란인에게 요수의 근원(遼源)이 있는 곳을 물으니 (거란인이) 대답하기를 이 두 물줄기가 그 흐르는 방향이 바뀌어서 몇 리를 흐르다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곧 (이 합쳐진 물줄기를 두고) 요수(遼水)라 칭하는데 (여기서) 더 알 수 있는 ‘요수의 근원’이 없다(여기가 요수의 근원이다)고 답하였다.


(이세적은 이 말을 듣고는) 군대를 되돌린 후에 다시 살피며 갔다(백랑수와 황암수를 건너다가 되돌아간 뒤에 강줄기를 살피면서 다시 건넜다는 뜻으로 판단됨)


통전의 이 기록은 수세기 후의 자료인,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인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그대로 나온다.


《宣和奉使高麗圖經 卷三 城邑 封境》


鴨緑之水源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髙麗之中此水最大波瀾清徹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為天塹水濶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西四百八十里自遼已東即舊屬契丹今契丹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為往來之道而已鴨緑之西又有白浪黄嵓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為遼水唐貞觀間李勣來破髙麗於南蘇既渡怪其水淺狹問之云是遼源以此知前古未嘗恃此水以為固此髙麗所以退保鴨緑之東歟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이미 멸망되었고, 대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고구려를 말함)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서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찍이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고전전문번역원 김주희 역>



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요하, 학계 통설에서 고대의 요수로 고정하여 놓고 보는 그 요하가 정말로 요수가 맞다면 저 상황이 납득이 가는가? 요수의 근원이 된다 하는 두 강 가운데에 백랑수가 있다. 강폭이 너무나 좁고 무릎 아래에까지밖에 오지 않을 정도로 얕은 저 강을 수경주의 곽도원이 최초 비정하고 현행 학계에서 통설로 삼고 있는대로 지금의 대릉하라 볼 수 있는가? 더구나 이세적은 요수를 건너고 있고 백랑과 황암수, 두 강이 요수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저 백랑, 황암 가운데에 백랑이 현 대릉하라면 결국 현 대릉하가 요수라는 말이고 그렇게 볼 수 없다면 학계 통설에서 말하는 현 요하의 상류에서 두 강을 찾아야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요하는 서요하와 동요하, 이 두 강이 만나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는 강이다.


그렇다면 동요하의 상류에 있는 지류 가운데에 백랑과 황암수 두 강을 찾아야 할까? 그렇게 되면 “백랑과 황암 두 강이 모여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이 요수이다”하는 기술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동요하는 발원하여 북쪽 - 서북쪽으로 흐르다 완만하게 서쪽으로 꺾이며 돌아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요하를 만나기 때문이다.


요수는 실상 작은 강인 것이다.


하류의 서쪽에 요택이 있으면서 요하가 아닌 강,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찾아야 한다. 그 강은 폭이 좁은 강이며 또 얕은 강이며 현 대릉하와 현 요하 사이에 있어야 한다.


본인은 최초 당나라의 고구려 1차 침략과 2차 침략 시 이세적이 건넌 요수를 대릉하의 지류로서 통요시 나이만기 하삼가자(下三家子, Xia Sanjiazi)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북표현 동쪽에서 대릉하에 합류하는 망우하(牤牛河, Mangniu River)에 비정하였다. 즉 ‘망우하~대릉하’를 요수로 본 것이다.


yosu1an.jpg



그 이유는 무경총요에서 기술하는 안시성의 위치(거란 동경 이치 전 위치로서 현 북진시 흑산현 근방, 이를 요사 지리지 동경도와 교차하면 이 흑산현에서 서남쪽 60 리에 비정할 수 있다), 요택의 위치(현 북표현 일대, 현 북진시 동남쪽 일대), 당 태종이 발목잡힌 요택의 규모(200 리인데 이 거리는 조양시와 의주, 즉 현 의현 180 리 거리에 상당하다)에 부합하면서 이세적이 거란인에게 요수의 근원을 묻는 대목에서 거란인의 주 거주지인 황수(현 시라무렌강)과 가깝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무경총요에서 소요수로 제시되는 ‘세하~대릉하’의 물줄기 역시 당 태종과 이세적이 건넌 요수로 볼 수 있다고 봤다. ‘망우아~대릉하’ 요수론과 비슷한 근거에 따른 것인데 당 태종이 무경총요에서 요택으로 기술한 북표현 일대를 조양시에서 의현을 거쳐 동쪽으로 대릉하를 건넘으로써 도하하고 부신시를 거쳐 요동성에 당도했다고 추정한 것이다.


yosu3an.jpg

yosu2an.png



이렇게 현 요하의 서쪽, 의무려산의 서쪽에서 요수를 고찰한 이유는 현 요하는 본인의 여러 각도의 고찰을 통하여 고대의 압록강으로 논증한 데 따른 것이다. 그 중의 일부를 취합해 시각화한 글이 다음의 글이다.


고구려-발해-고려 전기 압록강은 어디인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3882&sca=&sfl=mb_id%2C1&stx=cellmate&page=5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기사를 분석하여 간략화 하면 요수와 압록강 사이에 북쪽으로는 현도성, 요동성, 개모성, 신성, 백암성이 있고, 남쪽으로는 안시성, 건안성, 오골성, 비사성, 박작성 등이 있었다.


비사성은 해안가의 성으로서 건안성과 안시성 라인에 있고, 박작성은 압록강 입구의 성으로서 안시성과 오골성 라인에 있었다.


독사방여기요에 따르면 현 심양시에 있던 심양중위 서북쪽 180 리에 있는 요빈성이 고구려 요동성이다. 이 위치는 현 신민시 북쪽 인근에 해당한다. 가탐 도리기에 따르면 요동성 서쪽 300 리에 건안성이 있었다. 구당서에 따르면 요동성 서남쪽 300 리에 있었다. 건안성은 안시성 남쪽에 있었으므로, 안시성은 건안성과 요동성 사이에 위치하는데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거란 동경 서남쪽 60 리에 있다고 했으니 거란 동경이 이치되기 전 위치가 현 북진시 흑산현 일대이므로 안시성은 현 북진시 일대에 비정할 수가 있다.


만약에 요수를 의무려산과 현 요하 사이의 어떤 하천이다 할 시에는 모든 게 엉망진창 꼬여버린다. 역사연구에서 손을 놓아야 할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이 돼버린다.


648년 이세적이 요수를 건너기 전 타격한 남소성의 위치에 대해서 7세기 당나라의 한원(翰苑)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翰苑》


南蘇城在國西北十六國春秋前燕錄曰慕容晃十二年遣度遼將軍慕容恪攻高麗南蘇克之置戍而還即此城也高麗記云城在新城北七十里山上也


남소성은 나라(고구려)의 서북쪽에 있다, 육십국춘추전의 전연록에 따르면 모용황이 요수를 건너 장군 모용각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병영(戍)을 설치하고 돌아갔는데 즉 이 성이다. 고려기(高麗記)에 따르면 남소성은 신성 북쪽 70 리에 있는 산 위에 있다.


남소성은 남소수와 관계 있을 것이다, 오골성이 오골강과 관계 있다 보여지듯.


《漢書 地理志》


현도군(玄菟郡)


髙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고구려현(髙句驪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새(塞) 밖을 지난다.


한서 지리지의 소요수를 현 세하(시허강)으로 본다면(본인은 이렇다 추정하고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의 위치는 현 부신시 근방으로 잡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소수는 부신시 서북쪽에서 발원하는 하천 가운데에 유하로 볼 여지가 있다.


요수가 큰 강이 아니었다는 기록은 더 있다. 앞에서 남소성의 위치 관련하여 제시한 한원(翰苑)이 그것이다. 한원은 서기 660년 경에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하고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단 책으로 고구려 말기, 당나라가 고구려를 수 차례에 걸쳐 침략한 근황에 저술된 것이므로 당시 당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공유된 고구려 관련 최신의 정보가 담겨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요수에 대한 한원의 기술을 보자.


《翰苑》


漢書地理志曰遼東郡望平縣大遼水出塞外其水西南流合契丹國黃水又西南經遼東城西八十里又南入海闊百餘步


高驪記云其水闊百餘步平流清深又多灣潭枝派兩岸生長柳蒙密可藏兵馬兩畔彌平總名遼澤多生細草雈蒲毛群羽族朝夕相霧須臾卷斂狀若樓雉即漢書所謂蜃氣也


1)

한서 지리지에서는 “요동군 망평현에 대요수가 있는데 새 밖을 나간다(새 밖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 물(대요수)은 서남쪽으로 흘러 거란국의 황수(현 시라무렌강)와 합치며 다시 서남쪽으로 요동성 서쪽 80 리를 경유하여 (흐르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그 폭이 100여 보이다.


2)

고려기에서는 “그 물(요수)은 폭이 100여 보로 평평하게(잔잔하게) 흐르며 맑고 깊다. 또 물굽이와 웅덩이(늪), 지류(지파 枝派, 요수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많다. (강의) 양쪽 언덕에는 버드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나 군사(兵馬)를 숨기기에 좋다. (강의) 양쪽 물가 땅을 모두 일컬어 요택(遼澤)이라 한다. (요택에는) 가는 풀(잔풀 細草)과 물억새(雈), 냇버들(蒲), 들짐승(毛群)과 날짐승(羽族)이 많다. 아침과 저녁으로 안개가 잠시(臾) 엉겼다가(卷) 거치는데(斂) 형상이 마치 루치(樓雉)같으니 즉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신기(蜃氣 신기루)이다.”라고 했다.


첫번째 문단에서는 익히 알려진 한서 지리지의 기술 내용을 서술하고 거기에 부연을 하였다. “그 물(대요수)은 서남쪽으로 흘러 거란국의 황수(현 시라무렌강)와 합치며 다시 서남쪽으로 요동성 서쪽 80 리를 경유하여 (흐르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그 폭이 100여 보이다.” 이것이 한원의 의견인 것인데 이 문장이 전하는 정보를 두 개로 쪼개면 다음과 같다.


① 그 물(대요수)은 서남쪽으로 흘러 거란국의 황수(현 시라무렌강)와 합치며 다시 서남쪽으로 요동성 서쪽 80 리를 경유하여 (흐르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② 그 폭이 100여 보이다.


우선 ①의 정보는 곽도원의 수경주에서 대요수를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동요하를 요수로 보는) 따르면서 백랑수(白狼水)와 시라무렌(요락수, 약락수, 효라개몰리, 요나개몰리 등)의 음가가 상동함을 암시하는 듯 하다. ②의 정보는 앞에서 살펴본 이세적의 648년 행적과 교차가 되면서 현 요하가 요수가 아님을 증거한다 하겠는데 한 문장에서 서로 상반된 정보를 담고 있다.


서요하와 동요하가 만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현 요하를 위 첫번째 문단이 기술하는 요수로 보기에는 우선  강폭은 100 보가 아니며, 두 강의 수심과 폭이 이세적의 648년 기록에 부합하지 않는다.


두 번째 문단에서 인용한 ‘고려기’의 기술 내용은 다음의 글에서 다룰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에서 요수를 묘사한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다음 글로 넘겨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이세적이 648년에 건넌 요수는 인근의 두 하천인 백랑수와 황암수가 합류해 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강이다.

둘, 요수의 폭은 100 보이다. 이것이 상류를 말하는 것인지 하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셋, 망우하와 대릉하 본류, 세하 등을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의 요양하를 연상케 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아마르칸 19-05-01 18:50
   
 
 
Total 19,933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1981
19393 [한국사] 벼 재배 기원은 한반도였다(1만 5천년 전 소로리 볍씨… (42) 수구리 12-11 1292
19392 [한국사] 야요이에 대한 질문과 답 (5) 밑져야본전 12-10 998
19391 [한국사] 한(漢)나라는 황하 주변의 크지 않은 나라였다(하북… 수구리 12-10 1035
19390 [기타] 야요이인의 기원 (4) 밑져야본전 12-09 1483
19389 [한국사]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문제점을 잘 말해 줍니다. 스리랑 12-06 1297
19388 [한국사] 가덕도 유골은 서양인이 아닙니다. 조몬인입니다. (13) 보리스진 12-06 3083
19387 [기타] 동아시아 민심을 완전히 상실한 왜구 (4) 도다리 12-06 1549
19386 [기타] 코리안이브 1편, 가덕도 7천 년의 수수께끼 (5) 관심병자 12-05 1130
19385 [한국사] BC 147년 경 만들어진 단군신화 벽화(산동성 무씨 사당… 수구리 12-02 2419
19384 [한국사]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안병우 교수) (16) 고구려거련 11-30 2464
19383 [한국사] “신민 삼은 주체, 왜 아닌 백제”… 광개토대왕비 … 수구리 11-29 1513
19382 [일본] 소위 와패니즘 이란 서양에서의 일본 문화 유행이… (12) 가마굽기 11-27 1937
19381 [한국사] 짝퉁 고조선인 위만조선의 영토가 수천리인가? (1) 수구리 11-27 1450
19380 [한국사]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내막을 폭로 (5) 스리랑 11-26 1611
19379 [중국] 임나는 가야가 아니다 기믹한야기 11-26 1199
19378 [세계사] 열도 호빗의 배 마루(丸)와 기도하는 손...합장 (3) 나기 11-25 1252
19377 [한국사] 와 한서 왕망전에 등장하는 인물 구려후 추는 과연 … (49) 뉴딩턴 11-25 1471
19376 [한국사] 고구려 요동성이 한의 양평성으로 하북성 형수시 안… 수구리 11-23 1352
19375 [한국사] 사마천은 우리 고대사를 가져다가 중국의 역사로 만… (1) 스리랑 11-22 1759
19374 [한국사] 임진왜란 총 정리. 1~18편 (1) 밑져야본전 11-22 1211
19373 [한국사] 우리가 알고 있는 위화도는 가짜다 (3) 스리랑 11-20 2200
19372 [한국사] 한국 고대사 위치 바로잡기 요동 스리랑 11-20 1188
19371 [한국사] 부국강병의 한쿡은 곧 역사가 바로 선다. 도다리 11-20 923
19370 [한국사] 고려장에 대한 사고 (19) 솔루나 11-17 1924
19369 [한국사] "세상에 버릴 사람은 없다" 세종의 유산 (1) BTSv 11-15 1435
19368 [한국사] 신라의 천년수도 서라벌 복원도.jpg (3) BTSv 11-15 2194
19367 [한국사] 단군조선 최초문헌 기록 : 홍사 동이열전(BC 268년, 공… (6) 수구리 11-14 2162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