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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24 12:21
[기타] 단석괴, 단 선비와 고구려, 부여와의 관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867  

https://blog.naver.com/lukybaby1004_694/221413359695

단석괴라는 이름에서 어원과 샤머니즘, 신화와의 비교를 분석해보면 사실 단족이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것이 절실히 드러난다. 단석괴의 단(檀)은 단군조선의 천자(天子)인 단군(檀君)을 호칭하며 단석괴가 즉위하고 나서 본연의 성씨를 단(檀)씨로 하였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괴(槐)자가 중요한 부분인데 ‘홰나무 괴(槐)’ 자로 홰나무는 신인(神人)의 우주목을 일컫는다. 그리고 신단수로 통칭하는 ‘느티나무’가 홰나무와 관련이 있다.1) 이것으로 보면 단석괴가 가상인물일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에 다른 해석으로는 단석괴가 선비의 대족장을 통칭하는 군주(君主) 호칭일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한 가지 더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의 생존 연대가 분명치 않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단석괴가 군주 호칭일 가능성이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로 보인다.

1) 홰나무는 여름에 아카시아 비슷한 꽃이 피는 콩과의 낙엽고목이다. 이 때 꽃피는 시기는 7~8월로 열매맺는 시기는 9~10월이다. 소나무, 측백나무, 두충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등과 함께 영목에 속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 사료에서 단석괴는 실존인물이 분명하며 필자가 연구하기로는 선비가 강성하여 화북지역을 지배했을 때 단석괴는 영웅의 상징을 표현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두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위서(魏書)』,『진서(晉書)』,『북제서(北齊書)』에도 단석괴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실존인물이고 선비 민족 전체에서 영웅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단석괴 이후 단(檀)이라는 성씨는 그후 선비족이 5부족으로 분할될 때 단(段)으로 바뀌어 명맥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단 선비의 기원은 단석괴의 출생에서부터 시작했고 단족은 단석괴 이후 5호 16국 시기 때 중원에 진출하였다. 이후 모용선비에 흡수되었다.

단 선비는 대흥안령산맥을 중심으로 시작하였고 세력이 남하하면서 중국과 국경이 맞닿았고 동쪽으로는 부여, 고구려와 경계하였다. 부여는 평소 흉노와의 관계가 좋았으나 흉노가 물러난 이후 선비와 지속적인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부여와 선비의 관계는 외교적인 부분에서 아직 연구가 미진하기 때문에 2세기 이후의 관계부터 설명하려 한다. 2세기 초, 단 선비가 송화강 동쪽으로 이동하자 부여는 선비를 받아들여 유목 생활을 영위하게 하였다.

단석괴 시기에는 선비의 세력이 매우 강해져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고 송화강 서부 유역에 있는 북부여의 경우, 선비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부여는 말갈의 용병을 기용하게 되는데 단석괴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이 갖춰졌다. 그러나 부여, 말갈 연합군은 단석괴에 의해 전멸되었고 부여 서부 국경 지역이 단석괴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부여는 단석괴에게 강화를 요청하였고 단석괴는 이를 받아들여 더 이상 부여 영내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는 단석괴의 외교적 책략으로 동족계열인 부여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단석괴는 중원 정벌에 관심이 있었고 후방의 안전을 위해 부여를 먼저 공격했던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말갈, 숙신등의 부여계 제 민족들을 세력 하에 넣어둘 필요가 있었다. 후한의 북쪽 국경 지역을 유린하면서 부여계 민족들을 고용하여 득을 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외교적 전략 중 하나였다.

후한은 부여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어 단석괴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부여가 이를 거절하여 사신을 잡아 단석괴에게 보냈다는 내용을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부여는 단석괴와의 관계를 좋게 함으로써 공동으로 후한을 견제하고 중원 진출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번조선의 영토에 4군(四郡)을 설치하였던 것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필자의 연구로는 부여, 고구려의 후한과 계속된 마찰이 4군 설치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현도군, 낙랑군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五,「高句麗本紀」, 第 三, <太祖大王> 
태조대왕 66년 :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태조대왕 69년 :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태조대왕 69년 12월 :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태조대왕 94년 :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그리고 부여도 현도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하북성 지역까지 밀고 들어갔다는 기록도 근거로 하였다. (張純喜 주편, 『후한서사전(後漢書辭典)』, 齊南 : 山東敎育出販事, 1979, 34p [본문] 夫餘攻勢, 玄菟郡和, 地域強化右北平,上谷,漁陽,被蹂躪。)

이후 가비능 시기에 접어들면서 부여와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위나라 시기에 부여는 점점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고 일부의 세력은 이미 고구려에 귀속된 상태였다. 그러나 부여는 기마민족이고 언제든 다시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국가라 위나라, 진나라는 부여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경계하면서 문물적으로는 교류를 하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경우는 유리명왕 시기에 선비가 발흥하자 이를 격파했다는 기록을 앞에서 서술한 바 있고 이후 선비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단석괴가 나타나기 이전 선비는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에서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五,「高句麗本紀」, 第 三, <太祖大王> [본문] 임금은 선비(鮮卑)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隧縣)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이 병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스스로의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여 막았으나 채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隧縣, 遼東太守蔡風,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歿於陣, 死者百餘人. )

이러한 전쟁들에 참전하여 실전 감각을 끌어올린 선비는 단석괴가 등장함으로 인해 독립하여 통일 민족을 구성하게 되었다.
단석괴의 단 선비는 부여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있어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문헌적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계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가비능 시기에도 단 선비와 고구려는 흔한 전투기록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 나라는 큰 갈등없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 부여, 선비의 주적은 후한이었고 세 나라는 서로 연합하기도 하면서 후한의 북쪽 변경을 유린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위나라 시기까지도 연결된다. 비록 단 선비는 위나라 시기에 가비능이 암살됨으로써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단 선비의 뒤를 이은 모용선비의 경우, 고구려, 부여와 일대 전쟁을 벌이는 등 관계가 악화되었다.

단 선비와 고구려, 부여와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부여와는 단석괴 시기에 한 번 전쟁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관계가 매우 좋았다. 고구려의 경우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었다. 대체로 이들은 관계가 매우 좋았으며 서로 공생하려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선비, 부여, 고구려는 같은 민족, 같은 계통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여가 쇠퇴하고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강력해지면서 북방의 패권을 두고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고구려가 승리하면서 북방의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선비와의 격쟁(擊爭)을 통해 동북아시아 최대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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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칸 19-05-01 18:50
   
음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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