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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23 12:47
[한국사] 거란 동경과 요수 ㅡ 무경총요를 중심으로 1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916  

무경총요가 기술하는 거란 지리 정보에서 흥중부(패주)와 백천주, 의주의 위치 정보는 후대 여러 사서와 교차 분석하여 볼 시에 위치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경총요가 기술하는 거란 지리 정보에서 문제가 있고, 또 우리가 문제시 해야 하며, 또 이 고찰에서 본인이 문제시 하고 있는 것은 특히 동경, 안시성, 철주, 요수의 위치이다.


흥중부(패주霸州)는 현 요령성 조양시(朝陽市) 조양현(朝陽縣)에 위치했다. 백천주(白川州)는 현 요령성 조양시(朝陽市) 북표현(北票市 , 현급시)에 위치했다. 의주(宜州)는 현 요령성 금주시(錦州市) 의현(义县, 義縣)에 위치했다.


무경총요에서 기술하는 동경, 안시성, 철주, 요수의 위치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무경총요의 해당 기록을 아래와 같이 거듭 살펴보며 비판, 분석하고자 한다.




1. 흥중부(興中府)


興中府,營州地,漢末烏桓鮮卑所居,唐平盧軍節度使泊所,今號興中府。

東至遼河三百里,西至中京三百里,西南至建州六十里,北至湟水四百里(舊契丹界),西北至松陘嶺百里,東南至安東都護府二百七十里,號平壤城,東北至白川州七十里。《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흥중부, 영주 땅으로 한나라(후한) 말기에 오환, 선비가 거주하던 곳이며 당나라 평로군절도사의 숙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이름은 흥중부이다.


동쪽으로 요하에 이르기까지 300 리, 서쪽으로 중경에 이르기까지 300 리, 서남쪽으로 건주에 이르기까지 60 리, 북쪽으로 (옛 거란 지역인) 황수(현 시라무렌강)에 이르기까지 400 리, 서북쪽으로 송형령에 이르기까지 100 리, 동남쪽으로 평양성이라 부르는 안동도호부에 이르기까지 270 리, 동북쪽으로 백천주에 이르기까지 70 리이다.


무경총요에서는 영주였다는 흥중부 동쪽 300 리에 요하가 있다고 적고 있으나 통전에서는 영주에서 요하까지 480 리(柳城郡東至遼河四百八十里《通典 卷一百七十八》)라고 적었다. ‘요하(遼河)’라는 표현은 통전에 처음 등장한다.


즉 통전에서 말하는 영주는 거란의 흥중부 자리인 현 조양시 조양현이 아니거나 통전의 요하와 무경총요의 요하는 다른 강인 것이다.


그런데 두우가 통전을 쓸 당시인 8세기의 당나라 영주는 현 진황도시 노룡현 동남쪽 인근에 있었고 송나라 때까지, 그리고 후에 거란이 차지하기까지 계속 그곳에 있었다.

당나라는 발해와 도산전투에서 대패한 후로 계속 도산 아래에 찌그러져 있었고 다만 발해에 협조한 거란만이 현 대릉하 유역에 거주하였다.


무경총요의 흥중부 동쪽 300 리 요하는 10 리 5km 적용시 현 부신시 서쪽 인근의 시허강(細河, Xihe River), 금주 동쪽 대릉하 하류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조금 더 인심을 쓴다면 부신시 북쪽에서 발원해 현 동남쪽으로 흘러 현 쌍태자하로 빠지는 유하(柳河, Liuhe, Liu River)가 해당한다. 유하보다 가까운 강을 찾자면 역시 부신시 북쪽에서 발원하여 흑산현과 태안현 사이를 흘러 판진해구로 들어가는 요양하(绕阳河, Raoyang River)가 해당된다.


통전 쓰여질 당시의 영주 위치인 현 노룡현 근처에서 동쪽으로 480 리는 현 대릉하 하류에 해당한다.


그런데 시허강은 거란 의주였던 현 의현 동남쪽에서 대릉하와 합류하므로 노룡현 동쪽 480 리 요하와 현 조양시 동쪽 300 리 요하는 결국 같은 강(시허강~대릉하)을 가리킨다.


“북쪽으로 황수(현 시라무렌강)에 이르기까지 400 리, 서북쪽으로 송형령에 이르기까지 100 리”는 신당서 가탐도리기 영주입안동도의 기술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현 조양시에서 황수, 즉 시라무렌강까지 거리는 400 리가 아니라 10리 5km 적용시 현대 도로 기준 600 리를 상회한다. 400 리 위치는 현 적봉시에 해당한다. 이는 송형령 위치 문제와 함께 지난 고찰에서 매우 심도 깊게 다룬 바 있다.


“동남쪽으로 평양성이라 부르는 안동도호부에 이르기까지 270 리”는 통전의 기술(安東都䕶府西去柳城郡二百七十里管兵八千五百人馬七百疋《通典 卷一百七十二》, 柳城郡東至遼河四百八十里南至海二百六十里西至北平郡二百里北至契丹界五十里東南到安東府二百七十里西南到北平郡三百七十里西北到契丹界七十里東北到契丹界九十里契丹衙帳四百里去西京三千里去東京四千一百一十里戸八百七十四口三千《通典 卷一百七十八》)을 그대로 가져와서 그것에 ‘號平壤城’을 덧붙인 것이다.


신당서 가탐도리기에서 안동도호부는 한나라 양평성이었던 고구려 요동성에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무경총요의 기술에서는 가탐도리기의 기술(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其西奚,其東契丹。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城臨忽汗海,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里。《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을 그대로 가져왔으되 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을 평양성이라고 적고 있다. 서로 맞지가 않는 것이다.


또한 통전에서 비롯한 무경총요의 영주 ~ 안동도호부 270 리는, 8세기에 어양에 영주가 있었던 시기와 노룡 인근에 안동도호부가 있었던 시기가 일치하고 이 두 지점의 거리가 270 리에 상당한다는 것을 이미 본인이 이곳에 밝혀 보인 바 있다.


營州柳城郡,上都督府。本遼西郡,萬歲通天元年為契丹所陷,聖歷二年(699년)僑治漁陽,開元五年(717년)又還治柳城,天寶元年更名。《新唐書 志第二十九 地理三》


安東,上都護府。總章元年,李勣平高麗國,得城百七十六,分其地為都督府九,州四十二,縣一百,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上元三年徙遼東郡故城,儀鳳二年又徙新城。聖歷元年更名安東都督府,神龍元年復故名。開元二年(714년)徙於平州,天寶二年(743년)又徙於遼西故郡城。至德後廢。《新唐書 志第二十九 地理三》


그런데 비록 통전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서 이를 마냥 무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현 조양시 조양현에 있었던 흥중부 동남쪽 270 리에 있는 곳을 평양성이라 불렀다 기술한 무경총요의 기록은 요사 지리지 동경도가 현 안산시 소속 현급시인 해성시에 치소가 있었던 해주의 속주인 요주(耀州)의 속현인 암연현 서남쪽에 옛 평양성이 있었다고 적고 있는 것(耀州,刺史。本渤海椒州;故縣五,椒山,貉嶺、澌泉、尖山、巖淵,皆廢。戶七百。隸海州。東北至海州二百里。統縣一: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과 그대로 교차가 되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 해당 기술에서 암연현은 해주 서남쪽 120 리에 있다고 적었다. 이 위치는 역시 5km 10 리 적용시 현 판진시 인근에 해당한다. 암연현은 요주의 유일한 속현이므로 요주 자체가 현 판진시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즉 현 조양시 동남쪽 270 리 경의 평양성과 해주 서남쪽 120 리에 있던 암연현 서남쪽에 있었다는 옛 평양성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이다. 이 논증은 이미 이곳에서 1~2 년 전부터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한편 무경총요에서는 요주의 북쪽 150 리에 동경이 있다(耀州,地控新羅界,胡中要害之地。東至鴨綠江女真界,西至大遼,南至石城,北至東京百五十里。)고 적고 있다. 현 판진시 북쪽 150 리 경은 역시 5km 10 리 적용시 현 흑산현 일대에 해당한다.


독사방여기요에서는 거란 해주가 있던 곳에 설치한 해주위가 요양 서남쪽 120리에 있다(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南至蓋州衛百二十里,西至廣寧衛二百四十里,東南至鴨淥江五百八十里。《讀史方輿紀要 卷三十七 山東八》)고 적고 있으며 이 위치는 현 안산시 해성현에 해당한다. 요주는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 120 리, 현 판진시 방면에 있었으므로 요주 북쪽 150 리는 현 요양시의 위치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일치는 본인의 거란 동경 이치설의 하나의 주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전근대 사서에서 방위는 강줄기나 산줄기의 방향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2. 백천주(白川州)


白川州,築城在遼澤之中,東距醫巫閭山,西至營州地。宜桑柘,民知織之利,歲奉中國幣帛,多書白川州稅戶所輸雲。東至黔州七十里,西至中京四百三十里,東南至宜州百里,西南至霸州七十里。《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백천주, 요택 가운데에 성을 쌓았는데(주를 설치했는데) 동쪽으로는 의무려산과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 영주 땅에 이른다. 뽕나무와 산뽕나무의 마땅함이 있고, 백성들이 옷감 짜는 이로움을 알아서 매해 중국에 비단을 바쳤으며 많은 책을 백천주의 집집마다 세금으로 보내게 했다(의역, 비단과 책을 생산하였다는 의미). 동쪽으로 검주에 이르기까지 70 리, 서쪽으로 중경에 이르기까지 430 리, 동남쪽으로 의주에 이르기까지 100 리, 서남쪽으로 패주(흥중부)에 이르기까지 70 리이다.


백천주에서 ‘서쪽으로 중경에 이르기까지 430 리’라고 하고 ‘서남쪽으로 패주(흥중부)에 이르기까지 70 리’라고 했는데 정작 백천주에서 70 리 떨어진 흥중부에서 중경은 다시 300 리 서쪽에 있다고 동사서 무경총요는 기술하고 있다. 오차가 60 리이다. 이는 경로의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백천주 항목에서 가리키는 중경과 흥중부 항목에서 가리키는 중경이 다른 곳일 가능성을 띤다고 본다. 무경총요와 요사 등의 사서를 교차해 보면 거란 중경은 현 적봉시 송산구 남쪽과 영성현(현 학계 통설 중경 비정지)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백천주가 있던 현 북표현 일대를 무경총요는 요택의 가운데라고 적고 있다. 구글지도를 켜서 위성지도로 지형을 살펴보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데 대릉하 북과 남쪽이 모두 산지인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하천은 당연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대릉하만해도 상류가 여러 지류를 지니고 있고 중간중간에 여러 하천이 합류해 들며 북표현 위치에서는 북쪽에서 망우하(牤牛河)가 흘러와 합수한다. 또 그 동쪽은 부신시 서북쪽에서 발원하는 시허강(細河)이 서남류하여 현 의현인 의주의 동남쪽에서 대릉하로 합류하여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이러한 수리요 지형이어서 비가 내리면 물이 넘쳐서 진창, 즉 택지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현 조양시 조양현 서남쪽에 있었던 건주(석중귀가 말년을 보내고 죽은) 역시 수해를 자주 입어서 훗날 성종 때에 대릉하(요사 지리지에서의 령하靈河)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치되었다.


흥중부(패주)와 의주의 거리가 200 리이고, 또한 그 사이가 요택에 해당한다고 무경총요는 적고 있으므로 이를 근거할 시에 당 태종이 건넌 요택 200 리는 현 조양시~금주시 의현에 해당하고 당 태종이 건넌 요수는 현 대릉하 하류라고 고찰하여 이곳에 1년여 전에 올렸던 것이다. (가탐도리기에서의 영주~연군성 거리 180 리는 흥중부 ~ 의주 거리 200 리 거리에 상당하는 것이다)




3. 의주(宜州)


宜州,按《皇華四達記》:營州東北八十里,凡九遞至燕郡城,自燕郡東經汝羅守捉,渡遼州十七驛,至安東都護府,約五百里。今以契丹地圖校,至東京五百二十里。

東京,即安東都護治所,州城即古之燕郡城是也。本遼之西地,漢魏間烏桓鮮卑所據,在營州之東,契丹置崇儀軍節度。舊有江南水軍,號通吳軍,置營居之。東至醫巫閭山,西至霸州二百里,南至錦州九十里。《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의주, (가탐의) 황화사달기에 따르면, “영주 동북쪽 80 리, 모두 9 개의 역참을 지나면 연군성에 이른다. 연군성에서 동쪽으로 여라수착성을 경유하여 요주의 17 개 역을 건너면(지나면) 안동도호부에 이르는데 약 500 리이다.”라고 했다. 지금 거란지도와 비교해 보니 동경까지 520 리이다.


동경은 즉 안동도호부 치소로 주(의주)성은 즉 옛 연군성이다. (의주는) 본래 요의 서쪽 땅이다. 후한과 조위 사이에 오환과 선비가 거처한 곳으로 영주 동쪽에 있으며 거란이 숭의군 절도를 설치했다. 옛날에 강남수군이 있었는데 통오군이라 했고 영주를 설치하여 거주하게 했다. 동쪽으로 의무려산이 있고, 서쪽으로 패주에 이르기까지 200 리, 남쪽을 금주에 이르기까지 90 리이다.


가탐도리기 제 1도 영주입안동도는 여러 곳에 있었던 영주의 위치 지리정보와 여러 곳에 있었던 안동도호부 위치 지리정보, 여러 곳에서 활동한 거란과 해의 정보가 어지럽게 짜깁기된 것이라는 것을 본인이 송형령 추적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인 바 있다.


무경총요는 의주를 연군성으로 주장하고 있으나(본인 역시 무경총요를 근거로 이렇게 추정하였다)


첫째, 가탐의 황화사달기와 도리기에서는 연군성이 영주 동북쪽(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其西奚,其東契丹。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府,故漢襄平城也。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城臨忽汗海,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里。《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에 있다고 기술하였으나 연군성으로 지목된 의주는 역시 영주로 지목된 흥중부, 즉 현 조양시 조양현의 동남쪽에 있다.


둘째, 연군성은 연군에 있어야 하는데 연군은 대대로 현 북경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당연히 현 북경에 있었다. 후연 당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이 연군을 공격한 바 있다.


셋째, 당나라 영주는 북위~북제~수의 영주와 마찬가지로 한 때 현 북경시 창평구 방면에 있었다. 이 위치는 북방세력이 유주로 진입하는 길목인 거용관-군도관을 막아서는 위치이다. 수나라는 이곳에서 밀운-고북구 방면으로 영주를 설치하였다가 598년과 605년에 고구려의 공격(605년 공격은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거란)을 받았고 급기야 605년에 영주가 함락돼 폐지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 유성(현 적봉시 영성현 일대)은 고구려 땅이었고 수나라 영주가 있던 요서현(유성현)은 고북구 방면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1년여 동안 이곳에 본인이 막노동에 가까운 자기혹사를 하면서 게시해 온 고찰문에서 다 다룬 바 있다.


다음으로


본인은 이제까지 “東京,即安東都護治所,州城即古之燕郡城是也。”를 의주를 설명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즉 의주가 동경이자 연군성이라고 기술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 부분의 해석을 바로잡으면 다음과 같다.


“(의주를 가탐 황화사달기의 연군성으로 무경총요 사서기자는 보고 있고 황화사달기의 연군성~안동도호부 500여 리와 거란지도 상의 의주~동경 520 리가 일치한다고 기술한 다음에 이어서) 동경은 즉 안동도호부 치소로 주(의주)성은 즉 옛 연군성이다” (이미 위 본문에 올바른 해석을 붙였다)


거란 동경이 가탐 황화사달기의 안동도호부가 아님은 앞에서 상술한 바 있는데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연군성은 영주 동북쪽에 있는데 의주는 흥중부 동남쪽에 있다.


둘째,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에 있는데 거란 동경은 요동성이 아니다(무경총요에서는 안시성이라고 적었고 요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성이라고 적었다)


즉 가탐의 황화사달기의 거리 치수가 흥중부~의주~동경의 리수와 유사함에 근거해 무경총요 사서기자가 잘못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경총요가 거란지도에서 확인한 ‘의주~동경 520 리’는 무경총요 상의 다른 기술과 합치할까?


무경총요 상에 나타난 동경의 위치 및 요수의 위치를 다시 한번 따져보자.




4. 동경(東京)


東京,遼東安市城也。城之東即大遼河,城之西即小遼河。秦屬遼東郡,漢屬幽州,唐太宗平高麗,因名所幸山為駐蹕山,山在東北。後為渤海國,契丹建為遼州,得其地為東京。巖州在其東,即李所平白巖州也。《皇華四達記》曰:自安東府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里海口約六百里,西北至建安城約三百里,正南微東至鴨綠江北泊約七百里。今以契丹地形圖參校,惟達安城不知處所,其他地形遠近率同也。東至熟女真界約五百里,西至遼河百五十里,又八百八十里至中京,西六十里至鶴柱館,又九十里至遼水館,又七十里至閭山館,在醫巫閭山中,又九十里至獨山館,又六十里至唐葉館,又五十里至乾州;微北六十里至楊家寨館,又五十里至遼州;北六十里至宜州,又百里至牛心山館,在牛心山北中,又六十里至霸州,又七十里至建安館,又五十里至富水、會安至中京三驛程,各去七十里;南至平州五十里,自平州至幽州五百五十里;北至沈州百二十里;東南至鴨綠水九百里;西南至錦州四百里;東北至黃龍府七百里;西北至顯州三百里。



동경은 요동의 안시성이다. 성의 동쪽에는 즉 대요하가 있고, 성의 서쪽에는 즉 소요하가 있다. 진나라 때에는 요동군에 속했고, 전한 때에는 유주에 속했으며 당 태종이 고구려를 평정할 때에 산에 가서 머무른(駐蹕) 것에서 말미암아 이름을 얻은 주필산이 있는데 (그)산은 (동경의) 동북쪽에 있다. 후에 발해국이 되었고(발해 땅이 되었고), 거란은 요주를 설치했는데 그(요주) 땅을 얻어 동경으로 삼았다. 암주가 그(동경) 동쪽에 있는데 즉 이세적이 (백암성을) 평정한(하여 만든) 백암주이다.


(가탐의) 황화사달기에서 말하길 “안동도호부 동남쪽으로 평양성까지 800 리이고, (안동도호부) 서남쪽으로 도리해구까지 600 리이며 (안동도호부) 서북쪽으로 건안성까지 약 300 리, (안동도호부) 정남향에서 살짝 동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압록강 북쪽 박작성(박작구)까지 700 리”라 했다. 지금 거란지형도를 참고하여 (가탐의 황화사달기와) 비교해 보니 성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장소는 알기 어려우나 그 지형의 멀고 가까움을 겹쳐보니 대략 동일하다.


(동경에서) 동쪽으로 숙여진 경계까지 약 500 리이며, 서쪽으로 요하까지 150 리, 다시 880 리를 가면 중경에 이르는데ㅡ (동경에서) 서쪽으로 60 리에 학주관, 다시 90 리에 요수관, 다시 70 리에 의무려 산중에 있는 여산관, 다시 90 리에 독산관, 다시 다시 60 리에 당여관, 다시 50 리에 건주, (건주에서) 북쪽으로 살짝 치우친 방향(서서북)으로 60 리에 양가새관, 다시 50 리에 요(서)주, (요서주에서) 북쪽으로 60 리에 의주, 다시 100 리에 우심산 북쪽 산중에 있는 우심관, 다시 60 리에 패주, 다시 70 리에 건안관, 다시 50 리에 부수, (부수가) 중경에 이르는 3 개의 역참을 감싸 흐르는데 (그 역참은) 각각 거리가 70 리, (부수에서) 남쪽으로 평주까지 50 리, 평주에서 유주까지 550 리, (동경에서) 북쪽으로 심주까지 120 리, (동경에서) 동남쪽으로 압록수까지 900 리,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금주까지 400 리,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황룡부까지 900 리,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현주까지 300 리이다.


顯州,本渤海國,按《皇華四達記》:唐天寶以前,渤海國所都顯州,後為契丹所並。又有集康二州,並撥屬本州。東至遼州九十里,又三百九十里至東京,西至宜州百二十里,南至乾州七里,北至醫巫閭山。


현주, 본래 발해국(의 땅)이다. (가탐의) 황화사달기에 따르면 당 천보(742~756) 이전까지 발해국의 도읍이 현주에 있었는데 훗날 거란에 병합되었다. 또 집주와 강주 두 주가 있었는데 폐지되어 본래의 주(?)에 병합(강주는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현주에 소속되었고, 집주는 본계와 무순 사이에 나타난다)되었다. 동쪽으로 요주(遼州)가 90 리, 또 390 리에 동경이 있으며, 서쪽으로 의주가 120 리, 남쪽으로 건주가 7 리, 북쪽으로 의무려산이 있다.


乾州,在醫巫閭山之南,古遼澤之地,虜主景宗陵寢在焉,今置廣德軍節度兼山陵都部署。東至顯州八里,西南至銀治寨二十五里,西至遼州六十里,北至兔兒橋四十里。


건주, 의무려산 남쪽에 있는데, 옛 요택의 땅으로 노주(오랑캐왕, 즉 거란의 왕) 경종의 능묘가 있다고 하며 지금은 광덕군 절도사 겸 산릉도부서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으로 현주까지 8 리, 서남쪽으로 은치(은광)새가 25 리, 서쪽으로 요주(遼西州를 가리킨다)가 60 리, 북쪽으로 토아교가 40 리이다.( “在醫巫閭山之南,古遼澤之地”는 합쳐서 “건주는 의무려산 남쪽 옛 요택의 땅에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巖州,本高麗所據之地,唐太宗伐遼,師次白巖城下,因建為巖州。今契丹置兵屯守,州名不改。東至女真界百九十里,東南至東京五十里,南至集州,北至雲山縣。


암주, 본래 고구려가 있던 곳으로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하고 군대를 몰아 다음에 백암성에 다달았는데 이로 인하여 암주를 세웠다. 지금은 거란이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주명은 고치지 않았다(즉 당나라 이래로 암주라 한다는 뜻). 동쪽으로 여진계까지 190 리, 동남쪽으로 동경까지 50 리, 남쪽으로 집주가 있고, 북쪽으로 운산현이 있다.


沈州,德光所建,仍曰昭德軍,契丹舊地也。東至大遼水,水東即女真界,西南至東京百三十里,北至雙州八十里。


심주, 야율덕광(거란 태종, 902~947)이 소덕군을 두었는데 거란의 옛땅이다. 동쪽으로 대요수가 있는데 대요수 동쪽은 여진계이며, (심주에서) 서남쪽으로 동경까지 130 리, 북쪽으로 쌍주까지 80 리이다.


同州,阿保機所建,仍曰鎮安軍,契丹舊地。東至生女真界,西南至東京二百里,西北至雙州七十里,東北至集州七十里。


동주, 야율아보기가 건립하여 진안군이라 하였으며 거란의 옛땅이다. 동쪽으로 생여진 지역에 이르며 서남쪽으로 동경까지 130 리, 북쪽으로 쌍주까지 80 리이다.



雙州,契丹號保安軍,有通吳軍營壘。東至逆流河二里,入生女真界,西至遼州七十里,南至沈州七十里,北至渝州百二十里。


쌍주, 거란이 보안군이라 하였는데 통오군영의 보루가 있다. 동쪽으로 2 리에 역류하가 있는데 생여진계로 들어가며(흐르며), 서쪽으로 요주(遼州)까지 70 리, 남쪽으로 심주까지 70 리, 북쪽으로 유주까지 120 리이다.


耀州,地控新羅界,胡中要害之地。東至鴨綠江女真界,西至大遼,南至石城,北至東京百五十里。


요주, 땅이 신라(고려) 지역(경계)을 감싸고 있어서 오랑캐(거란)에게 있어서 요충지이다. 동쪽으로 압록강의 여진 지역이, 서쪽으로 대요(동단국 영역이었던 동경도를 제외한 거란의 본국을 가리킴)가 있고, 남쪽으로 석성이 있으며, 북쪽으로 동경까지 150 리이다.


銀州,阿保機所建,女真國舊地。東至逆流河五里,入生女真界,西至雙州七十里,南至東京三百里,北至渤海州六十里。


은주, 야율아보기가 건립하였으며 여진국의 옛땅이다. 동쪽으로 역류하가 5 리이며 (역류하는) 생여진 지역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쌍주가 70 리, 남쪽으로 동경까지 300 리이다.


宗州,在石熊山之陽,管熊山一縣,古遼東之地。東至遼水,南至顯州一百里,北至潢水。


종주는 석웅산 남쪽에 있는데 관할현이 웅산현 하나이고, 옛 요동의 땅이다.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고, 남쪽으로 현주(顯州)까지 100 리, 북쪽으로 황수(潢水, 현 시라무렌강)에 이른다.


十三山,北醫巫閭山,南距大海,東至東京,西小遼水。


십삼산, 북쪽에 의무려산이 있고, 남쪽으로 대해(大海)와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경에 이르고, 서쪽에는 소요수가 있다.


遼水,在漢樂浪玄荒之地,東西四百八十里。《水經》云: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南流會白槍水,至安市城。今號東京小遼水,源出遼山西南。流與天梁水會,在國西也。


요수는 동서 480 리 전한 낙랑군의 거친 땅에 있다. 수경에서 이르기를, 대요수가 말갈국 서남산/말갈국의 서남쪽 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백창수(백추수)와 모여 안시성에 이른다고 했다. 지금의 이름은 동경 소요수로 ① 요산의 서남쪽에서 발원한다. 천량수와 더불어 흘러 그 땅(동경)의 서쪽에서 모인다.  ② 요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천량수와 더불어 모이는데 (요수는) 그 땅(동경)의 서쪽에 있다. (# “今號東京小遼水,源出遼山西南。流與天梁水會,在國西也。”은 현대 중국인들이 2 개의 문장으로 끊어 놓은 것인데 본래는 1 문장이어야 문맥에 맞다. 따라서 ① 해석이 합당하다.)


※ 주의 : 본인은 거란 동경이 거란 성종에 의해 이르면 993년, 늦으면 1020년에, 또는 이 사이에 현 북진시 방면에서 현 요양시 방면으로 인근 속주 및 속현과 함께 이치되었다고 지난 이태 동안 계속하여 주장하여 왔다.


무경총요 사서기자는 거란 동경을 안동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신당서 가탐 도리기의 원저본으로 추정되는 가탐의 황화사달기에서 말하는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거란 동경으로 보고 거란 동경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무경총요 사서기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란 동경이 황화사달기의 안동도호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앞에서 상술 제시하였다. 이를 다시 적으면 다음과 같다.


① 연군성은 영주 동북쪽에 있는데 의주는 흥중부 동남쪽에 있다.


②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에 있는데 거란 동경은 요동성이 아니다(무경총요에서는 안시성이라고 적었고 요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성이라고 적었다. 훨씬 후대의 독사방여기요조차도 요동성을 심양중위 서북쪽 180 리에 있는 요빈성遼濱城으로 적고 있다. )


무경총요에서 기술하는 동경의 지리정보는 특히 다음의 두 가지 기술이 상충하여 모순을 띤다.


첫째, 동경은 요동의 안시성이다. 성의 동쪽에는 즉 대요하가 있고, 성의 서쪽에는 즉 소요하가 있다. 東京,遼東安市城也。城之東即大遼河,城之西即小遼河。


둘째,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금주까지 400 리,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황룡부까지 900 리, (동경에서) 서북쪽으로 현주까지 300 리이다. 西南至錦州四百里;東北至黃龍府七百里;西北至顯州三百里。


거란 동경을 학계 통설대로 현 요양시에 고정하여 보면 ‘서쪽에 소요하, 동쪽에 대요하’라는 설명을 적용할 대상이 사라진다. 억지로 대입하면 현 혼하가 소요하, 현 태자하가 대요하가 돼버린다. 실제로는 학계 통설에서는 대요하를 현 요하로 보면서 혼하를 소요하에 비정하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


후대에 쓰인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는 완연하게 요하를 현 요하로, 혼하를 현 혼하로, 양수를 현 태자하로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遼河出東北山口為範河,西南流為大口,入於海;東梁河自東山西流,與渾河合為小口,會遼河入於海,又名太子河,亦曰大梁水;渾河在東梁、範河之間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다시 쓰는 유기 해석본)


즉 현 혼하와 태자하를 소요하, 또는 대요하로 볼 근거가 없는 것이다. 어느 기록과도 교차가 안 된다. (교차 되는 사서, 또는 기록이 있으면 제시해주시라.)


동경이 소요하와 대요하 사이에 있다는 무경총요의 이 기록만을 근거하면 거란 동경은 적어도 현 요하 서쪽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금주(~동경 400 리), 현주(~동경 300 리)과의 거리 거리 및 방위 기술을 보면 10 리 5 km 적용 시 현 요양시 인근에 거란 동경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송나라가 무경총요 편찬을 시작한 1040 년 이전까지 수집한 거란 지리 관련 정보를 참고하여 무경총요 전집 북번지리 거란 항목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거란이 동경을 이치하기 이전의 정보(993~1020년 이전)와 이치 이후의 정보(1020년 이후)가 뒤섞인 결과라고 본인은 판단하였고 이렇다 주장해 왔다.


요사 성종 본기와 요사 지리지 동경도 기록을 면밀히 읽어보면 동경도 소속의 주, 군, 현의 대다수가 거란 성종 대에 이치, 교치, 재설치 등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이는 본인이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 여러 편의 고찰을 통해 제시한 바 있다.


거란 성종의 3 차례에 걸친 고려 침입과 군사적 시위를 통해서 고려는 현 판진시를 비롯하여 현 요하와 태자하 사이의 땅을 잃고 태자하 남쪽으로 국경선이 후퇴하였으며 반면에 현 동요하 상류에 해당하는 요원시에서 장춘시 등에 이르는 강동 6주를 할양 받아서 이를 기반으로 남만주를 석권하고 여진족을 복속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인이 여러 사서 원문을 직접 해석하고 교차 분석, 고찰하여 낸 결론이며 이 역시 본인이 이곳에 무려 2년여에 걸쳐 계속하여 다양한 각도로서 고찰문을 게시하였다.


동경의 이치 문제는 우선 무경총요 상에 기술된 요수의 위치를 분명히 하면 더욱 윤곽이 잡힌다. 앞의 고찰문에서 이미 무경총요에 나타난 요수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해석과 함께 게시한 바 있다.



(글이 잘리는 관계로 다음 게시글에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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