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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9 17:58
[기타] 밀고 당긴 간도분쟁 300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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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도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 Kitchin,T. 1745년

 

영국의 키췬(Kitchin,T.)이 제작한 <우리나라 지도>이다. 프랑스 당빌(D'Anville,J,B)의 <조선왕국전도>(1737년)와 흡사하게 그려진 우리나라를 ‘KAU-LI or COREA(조선)’의 왕국(KINGDOM)으로 표기하였다. 제주도는 ‘Quelpaert’라 표시하고 네덜란드 지도 표기를 따랐다고 하는데 제주도의 실제 위치보다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압록강을 'Ya lu Kyang or Green River'로 표기하고, 만주지방까지 우리나라의 강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향후 우리의 북방영토 경계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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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도>, 파리 외방전교회, 1924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우리나라 교구 영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1831년에 교황이 우리나라(조선)교구의 설립을 허락한 후, 교세가 확장되자 1911년에는 서울 교구와 대구 교구로 분리하였다. 이후 1920년에는 서울 교구에서 함경도와 북간도 지방을 분리하여 원산교구를 설립하였다. 이 지도에는 북간도가 원산 교구 소속으로 그려졌다.



백두산에서는 3개의 큰 강이 발원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이 천지 주변에서 시작해 각 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압록강은 서쪽으로,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송화강은 북쪽으로 향한다.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에 대한 논란은 강줄기에서 출발한다.



"제1조 청-일 양국 정부는 두만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江源)에 있어서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한다."



1909년 일본과 청의 양국 대표가 맺은 간도협약의 내용이다. 이때 이후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완전히 굳어져버렸다.



간도협약 석을수 경계선 그어

간도협약에 나타난 석을수는 두만강의 지류이다. 백두산으로 뻗어 있는 두만강의 지류는 4개이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류가 홍토수(紅土水), 그 다음이 석을수-홍단수(紅丹水)-서두수(西豆水)이다. 석을수는 두번째에 위치하고 있는 지류이다.



두만강 석을수 경계선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한-중의 국경으로 남았다. 북한은 1962년께 중국과 '조-중 변계조 약'을 맺어 석을수보다 위쪽에 있는 홍토수를 경계로 했다고 전해진다. 이 조약은 아직 원문이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약이다.



간도협약 때보다 280㎢가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간도가 중국땅임을 사실상 인정해주는 결과를 초래한 조약이었다. 또한 천지의 절반을 중국측에 내준 셈이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2인자인 저우언라이를 보내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군사지원을 상기시키며 국경협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김명기 천안대 석좌교수(국제학)는 "이 조약이 비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에 국제법상 실제적으로 인정받기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남북 통일 이후 북한을 비합법적 정부로 인정할 경우 조-중조약이 무효화될 가능성이 높다.



1905년 외교주권을 빼앗은 일본이 멋대로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과 비밀스럽게 체결한 조-중 변계조약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은 두만강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백두산에는 두만강뿐만 아니라 송화강도 있다.



1712년 조-청 양국 대표가 세운 백두산정계비에 따르면 양측 경계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이다. 토문강이란 명칭이 논란의 대상이었다. 청은 토문강을 중국식 발음인 투먼(도문)으로 해석, 도문강의 한국식 이름인 두만강이 경계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토문강이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라고 주장했다. 이때 이미 토문강의 동쪽인 간도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9년 간도협약 전까지 200년 동안 '토문강 논란'으로 이곳은 국경분쟁 지역이었다.

청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킨 위력을 앞세워 국경분쟁의 씨앗을 없애려 했다. 청의 요구로 열린 1895년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에서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게 맞섰다.



당시 청은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전제로 여러 갈래 지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비문에 나타난 토문강이 국경임을 주장하며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자고 맞섰다.



조선과 청의 대표는 3팀으로 나뉘어 홍토수와 홍단수, 서두수를 따라 정계비를 향해 출발했다. 현장을 답사한 후 이중하는 정계비 비문에 나타난 대로 강이 갈라지는 분수령을 기준으로 한다면 압록강과 토문강이 가장 근접한 분수령 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사이에 정계비가 있으며 양쪽 경계선의 표시인 울타리 역시 두 강의 발원지 사이에 놓여있음을 보여주었다. 두만강 지류 중 정계비와 가장 가까운 홍토수도 울타리와의 거리는 40∼50리나 됐다.



청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이중하의 주장을 반박했다. 첫째는 당시 청의 강희제 때 만주문자가 있었는데 비문에 만주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문이 새겨진 지 200년이 지났지만 자획이 완전하다는 것이며, 셋째는 비의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협상결렬로 여전히 분쟁 지역

결국 을유담판에서 경계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문제는 2년 후인 1887년 정해담판으로 넘어갔다. 정해담판에서 청측은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청은 홍단수를 경계선으로 주장했다. 이곳에 15개의 비석을 세우려고 했다. 조선측 대표였던 감계사 이중하는 "내 목이 잘릴지언정 땅은 한치도 내놓을 수 없다"며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중하는 끝내 홍토수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노계현 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외교사)는 "당시 이중하는 석을수가 협상의 최소 조건이라는 청국의 공문을 간파한 후 협상을 고의적으로 결렬시키기 위해 토문강 주장을 버리고 청이 받아들일 수 없는 홍토수를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은 두번째 백두산 답사 후 석을수로 양보했다. 하지만 이중하는 홍토수를 고집했다. 협상은 결렬돼 간도땅은 그대로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됐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한국사)는 "을유담판과 정해담판를 통해 양측 대표의 국경회담이 결렬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 문제가 여전히 분쟁 상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해석했다.



1888년 4월 28일 청국교섭공사인 원세개가 조선 외무독판 조병직에게 보낸 문서에서 "1887년의 감계는 협정에 이르지 못하고 경계는 후일의 감계를 기다릴 것"이라고 인정한 부분은 당시 국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없어지자,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있는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다. 또한 1902년 종3품 이범윤을 간도로 파견해 관리토록함으로써 영토주권을 행사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고려 때만 해도 1108년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동북 9성 가운데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전해지며, 간도 땅은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우리 민족의 영토로 확실한 역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간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1616년 만주에 청나라가 건국된 후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인의 유입이 빈번하고 이로 인해 양국간에 군사적·외교적 마찰이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당시 간도 지역은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고, 주민들도 국경을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생활의 편의에 따라 유동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청나라는 1627년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지역에 일종의 완충지역인 공광지대를 설치하기에 이릅니다.


1689년 청-러 간에 조약이 체결되어 흑룡강 상류지역이 청과 러시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청이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두었던 간도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러시아가 흑룡강 연안으로 남하하면서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다.




이에 청 의 강희제는 목극등 일행에게 명을 내려 1712년 서쪽으로는 압록강과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조선과 청의 경계로 한다는 정계비를 백두산 분수령에 세우게 된다. 결국 이 때 서간도 1만9천여㎢의 영토가 청나라 땅인 양 되어버렸고, 토문강을 경계로 한 동쪽의 북간도 지역만이 조선의 땅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정계비에 언급된 지명에 대한 해석마저도 엇갈려 양국 영토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은 옛 종주국 행세와 오만한 태도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조선측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우리 국토는 한 치도 줄일 수 없다고 강하게 항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청은 토문강-도문강-두만강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며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토문강은 중국의 여러 지도에도 송화강의 상류로 표시되어 있는 점을 증거로 제시하며 두만강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맞섰다.


[중국 전요지(全遼志)에는 토문강의 이름을 토문하(土門河)로 적고 있으며 송화강의 원류라고 밝혀 놓았고, 정약용의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에도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 표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규장각(奎章閣)에서 찾아낸 백두산 정계비도(定界碑圖)에도 토문강원이 송화강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이후 조선과 청은 간도 지역의 영유권에 대한 몇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끝내 간도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분쟁은 러·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맺고 우리 땅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리고 맙니다.


 


 


그로부터 95년이 지난 2004년. 새해 첫날부터 신사참배에 나서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를 더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논쟁의 여지도 없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한 술 더 뜨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간도영유권 문제에 있어 당사자인 중국도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가동하며 영토 문제에 있어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있다.

영토 문제는 대개 100년이 지나면 시효가 만료되는 것이 국제법의 통례라고 한다. 독도는 분명한 우리의 영토임에도 일본이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시효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향후 6년 후인 2009년에 100년을 맞기 전에 우리도 공식적인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일제 치하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본거지였고, 지금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광활한 우리의 북방영토 간도. 그 동안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 분단의 아픔에만 초점이 맞춰져 간도를 되찾기 위한 어떤 노력도 부족한 상태였고 지금은 관심마저 끊긴 상태이다.

간도는 가까운 장래에 동북아 중심기지로 부각될 기회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다. 우리 민족은 '간도의 꿈'을 다시 키워야 한다. 간도를 정당한 권리 없이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 대하여 그동안 간도영유권을 주장할 기회가 없었더라도 이제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을 펼쳐야 할 시점인 것이다


간도의 역사 이야기 였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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