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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1 17:19
[한국사] 947년, 석중귀와 황룡부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703  


1. 발해의 멸망과 황룡부의 성립




1) 거란국지(契丹國志)



《契丹國志卷之一》


太祖攻渤海,拔其夫餘城,更命曰東丹國,命長子突欲鎮之,號人皇王。一曰東丹王。以其次子德光元名耀屈之。守西樓自隨,號「元帥太子」。


태조(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하여 그(발해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발해를) 동단국으로 변경하라 명하고, 큰아들 돌욕(야율배, 요 태조의 제 1황자, 요 세종의 아비)에게 명하여 그(땅을) 지키라 명하고 인황왕이라 이름하였다. 다른 말로 동단왕이라 한다. 그(요 태조 야율아보기) 차남의 원래 이름인 요굴을 (바꿔서) 덕광으로 하였다. (야율덕공으로 하여금) 서루(조주, 祖州, 현 파림좌기 서남쪽 인근)를 지키며 스스로 따르게 하고 원사태자라 이름하였다.


先是,渤海國王大諲撰本與奚、契丹為唇齒國。太祖初興,並吞八部,繼而用師,並吞奚國。大諲撰深憚之,陰與新羅諸國結援,太祖知之,集議未決。後因游獵,彌旬不止,有黃龍在其氈屋上,連發二矢,殪之,龍墜其前。後太子德光於其地建州,黃龍府即其地也。太祖曰:「吾欲伐渤海國,眾計未定而龍見吾前,吾能殺之,是滅渤海之勝兆也。」遂平其國,擄其主。


처음에 발해국왕 대인선은 본래 해(奚)와 더불어 거란을 순치(순망치한, 즉 중원이나 초원세력으로부터 발해를 방어하는 완충 역할)국으로 삼았다. 태조(야율아보기)가 처음으로 창성하여 (거란의) 8부를 병탄하고 계속하여 군대를 부려서 해국(奚國)을 병탄하였다.


대인선이 그것(거란이 창성하는 모습)을 몹시 두려워하여 몰래 신라를 비롯한 여러나라와 결원을 맺으려 하였는데 태조(야율아보기)가 그것을 알아채서 (결원이) 이루어지지 못 하였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후에 사냥을 나가서 열흘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어느날) 전옥(털 전, 집 옥으로, 아마도 이동식 텐트를 이르는 말인 듯 하다) 위에 황룡이 있어서 (태조가) 연달아 두 시위를 당겨 (그것을) 쏘니 (그 황룡이) 죽어 떨어졌다(야율아보기의 죽음을 동명성왕의 죽음에 빗대어 신격화한 것이다). 후에 태자 야율덕광이 그 땅에 주를 세우고(용주, 龍州), 황룡부를 설치했다.


태조(야율아보기)가 말하길 “ 내가 발해국을 정벌하고자 바라여 ㅡ 해석 역부족 ㅡ는데 룡이 내 앞에 나타나 보여서 내가 능히 그것을 죽이니 이는 발해를 멸할 징조인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나라(발해)를 평정하고 그 주인 자리(그 땅을)를 빼앗았다.



2) 요사(遼史)



《遼史 卷二本紀第二 太祖下》


(天贊四年)十二月乙亥,詔曰:「所謂兩事,一事已畢,惟渤海世急未雪,豈宜安駐。」乃舉兵親征渤海大諲譔。皇后、皇太子、大元帥堯骨皆從。


(천찬 4년, 925년) 12월 을해일, (야율아보기가) 조서를 내려 말하길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이미 하나(해, 즉 장가구시 일대에 있던 서해 병합)는 마쳤으나 오직 발해와 대대로 원수진 일만은 설욕하지 못 했으니 어찌 말을 쉬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병사를 거느리고 발해 대인선을 친히 정벌하러 나섰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요골(야율아보기의 차남, 즉 훗날 요 태종) 등이 모두 따랐다.


閏月壬辰,祠木葉山。壬寅以青牛白馬祭天地於烏山。己酉,次撒葛山,射鬼箭。丁巳,次商嶺,夜圍扶餘府。


윤달 임진일에 목엽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인일에 청우와 백마를 바쳐 오(환)산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기유일에 살갈산에 이르러 귀전을 쏘았다. 정사일에 상령에 이르렀는데 밤에 부여부를 포위했다.


天顯元年春正月己未,白氣貫日。庚申,拔扶餘城,誅其守將。丙寅,命惕隱安端、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遇諲譔老相兵,破之。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北院夷離堇斜涅赤,南院夷離堇迭裡是夜圍忽汗城。己巳,諲譔請降。庚午,駐軍於忽汗城南。辛未,諲譔素服,稿索牽羊,率僚屬三百餘人出降。上優禮而釋之。甲戌,詔諭渤海郡縣。


천현 원년, 926년 (음) 1월 기미일(0),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경신일(1)에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그것을 지키던 장수를 죽였다. 병인일(7)에 석은 안단, 전 북부 재상 소아고지 등에게 명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의 늙은 재상(또는 노상)의 군대와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이자 대원수 요골(훗날 요 태종), 남부 재상 야율소, 북원 이리근 사녈적, 남원 이리근 질리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 기사일(10)에 인선이 항복을 청했다. 경오일(11)에 홀한성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신미일(12)에 대인선이 소복(거친옷)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도타운 예로써 (대인선을) 맞으며 그를 풀어줬다. 갑술일(15)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


丙子。遣近待康末怛等十三人入城索兵器,為邏卒所害。丁丑,諲譔復叛,攻其城,破之。駕幸城中,諲譔請罪馬前。詔以兵衛諲譔及族屬以出。祭告天地,復還軍中。


병자일(17)에 근시 강말달 등 13 인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 정축일(18)에 대인선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야율아보기가)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을 내려서 병사들로 하여금 대인선과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발해를 함락시켰음을)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영으로 돌아왔다.



二月庚寅,安邊、鄚頡、南海、定理等府及諸道節度、刺史來朝,慰勞遣之。以所獲器幣諸物賜將士。壬辰,以青牛白馬祭天地。大赦,改元天顯。以平渤海遣使報唐。甲午,復幸忽汗城,閱府庫物,賜從臣有差。以奚部長勃魯恩、王鬱自回鶻、新羅、吐蕃、黨項、室韋、沙陀、烏古等從征有功,優加賞齎。丙午,改渤海國為東丹,忽汗城為天福。冊皇太子倍為人皇王以主之。


2월 경인일에 (발해의) 안변부, 막힐부, 남해부, 정리부 등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노획한 재물을 장병들에게 하사했다. 임진일에 청우와 백마를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 평정한 일을 당(후당)에 알렸다.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뒤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 왕욱 및 회홀, 신라, 토번, 항, 실위, 사타, 오고 등이 (발해) 정벌에 참전하여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황태자 배(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삼아 동단국 왕의 지위를 주었다.


天顯)二年八月丁酉,葬太祖皇帝於祖陵,置祖州天城軍節度使以奉陵寢。統和二十六年七月,進謚大聖大明天皇帝。重熙二十一年九月,加謚大聖大明神烈天皇帝。太祖所崩行宮在扶餘城西南雨河之間,後建升天殿於此,而以扶餘為黃龍府云。


천현 2년(927년) 8월 정유일에 태조황제(야율아보기)의 장례를 조릉에서 치르고 릉침을 받들기 위해 조주 천성군 절도사를 설치하였다. 통화 26년(요 성종, 1008년) 7월 대성대명천황제의 시호를 더하였고 중희(요 흥증, 1052년) 9월, 대성대명신열천황제의 시호를 더하였다. 태조가 붕어한 행궁은 부여성 서남쪽 우하(雨河) 근처인데 후에 승천전을 이곳에 건립하고 부여부를 황룡부로 삼았다.


《卷八本紀第八 景宗上》


(保寧七年)秋七月,黃龍府衛將燕頗殺都監張琚以叛,遣敞史耶律曷里必討之。九月,敗燕頗於治河,遣其弟安摶追之。燕頗走保匹惹城,安摶乃還,以餘黨千餘戶城通州。


(보령 7년, 975년) 가을 7월, 황룡부 위장 연파가 배반하여 도감 장거를 살해하여서 창사 야율갈리필을 보내어 그를 반드시 토벌하게 하였다. 9월, 치하에서 연파를 깨뜨리고 (연파가 달아나자) 그 아우(갈리필의 아우) 안단을 보내어 연파를 추격하게 하였다.  연파가 필야성(올야성)으로 달아나 숨으니 안단은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으며 (연파의) 잔당 1천여 호로 통주(通州)를 만들었다.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通州,安遠軍,節度。本扶餘國王城,渤海號扶餘城。太祖改龍州,聖宗更今名。保寧七年,以黃龍府叛人燕頗餘黨千餘戶置,升節度。統縣四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부여국의 수도였으며 발해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보녕(保寧) 7년(975년) 황룡부(黃龍府)의 반란인 연파(燕頗)의 잔당 천여호로 설치하였다가 절도로 승격시켰다. 관할 현은 넷이다.


龍州,黃龍府。本渤海扶餘府。太祖平渤海還,至此崩,有黃龍見,更名。保寧七年,軍將燕頗叛,府廢。開泰九年,遷城於東北,以宗州、檀州漢戶一千復置。統州五、縣三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가 설치되었다. 본래 발해 부여부(扶餘府)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이곳에 죽었는데 황룡이 나타나서 (황룡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보령 7년(975) 장군 연파(燕頗)가 반란을 일으켜 부가 폐지되었다. 개태 9년(1020) 성을 동북쪽으로 옮기고 종주(宗州)와 단주(檀州)의 쭝궈 1,000호로 다시 설치하였다. 5주 3현을 관할하였다.



# 연파(燕頗)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40718&cid=40942&categoryId=34708


한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81651&cid=46620&categoryId=46620




2. 황룡부의 위치



1) 신오대사(新五代史)



《卷十七晉家人傳第五》


是歲六月,契丹國母徙帝、太后於懷密州,州去黃龍府西北一千五百里。行過遼陽二百里,而國母為永康王所囚,永康王遣帝、太后還止遼陽,稍供給之。《新五代史 卷十七晉家人傳第五》


이 해(947년) 6월, 거란국모(요 태종 야율덕광의 모후 응천황태후 술율평)가 황제(석진 폐황제 석중귀)와 태후(석중귀의 부인)을 회밀주로 옮겨가게 했는데 회밀주는 황룡부 서북쪽 1,500 리에 있다. 요양을 지나 200 리를 가다가 국모(술율평)가 영강왕(요 세종)이 있는 곳에 갇히게 되었고 영강왕이 황제(석중귀)와 태후로 하여금 요양으로 돌아가 머무르게 한 뒤에 차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였다.


거란국지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先是,述律太后徙晉侯並後於懷密州,去黃龍府西北一千五百里。行過遼陽二百里,而述律太后為帝所囚,晉侯與後複得還於遼陽,稍有供給。《契丹國志卷之四》).



2) 무경총요(武經總要)



《武經總要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


(東京) 東南至鴨綠水九百里;西南至錦州四百里;東北至黃龍府七百里;西北至顯州三百里。


(동경에서) 동남 쪽으로 압록수까지 900 리, 서남쪽으로 금주까지 400 리, 동북쪽으로 황룡부까지 700 리, 서북쪽으로 현주까지 300 리이다.



鴨子河,在大水泊之東,黃龍府之西,是雁鳴生育之處。


압자하는 대수백의 동쪽, 황룡부의 서쪽에 있는데 이곳은 기러기가 사는 곳이다.




3)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卷三十七 山東八》


鐵嶺衛司北二百四十里。北至三萬衛九十里,東南至撫順千戶所一百里。


철령위는 요동도사성 북쪽 240 리에 있다. (철령위에서) 북쪽으로 삼만위가 90 리, 동남쪽으로 무순 천호소가 100 리에 있다.

三萬衛司北三百三十里。南至鐵嶺衛九十里,西至廢懿州三百七十里,東北至三衛境廢信州三百十里。


삼만위는 요동도사성 330 리에 있다. (삼만위에서) 남쪽으로 철령위가 90 리, 서쪽으로 폐지한 의주가 370 리, 동북쪽으로 삼만위 경계의 신주가 310 리에 있다.


古肅慎地。隋唐時,為黑水靺鞨所居。唐元和以後,勃海取其地,屬上京龍泉府。勃海衰,黑水女真復有之,後滅遼,此為會寧府之地。金末,其將蒲鮮萬奴據遼東,蒙古克之。至元二十三年,置開元路《元史》:元初平遼東,置開元南京二萬戶府,治黃龍府。至元四年,更遼東路總管府。二十三年,改為開元路。王氏曰:開元者,金上京境內地名,元平遼東,引師至此,遂定其地。時上京一帶,俱已殘毀,因改建開元路。以三萬衛為即會寧故地者,誤也。明洪武二十一年,置兀者野人乞例迷女直軍民府。二十二年,罷府,置今衛。今改置開原縣,屬奉天府。


(삼만위는) 옛 숙신의 땅이다. 수당 시대에 흑수말갈이 거주하였다. 당 원화(당 헌종, 806~820) 이후(발해 선왕 시대에 해당)에 발해가 그 땅을 취하여 상경용천부에 속하게 하였다. 발해가 망하고(쇠퇴하고) 흑수여진이 다시 그 땅을 회복하여 훗날 요나라를 멸하고 이곳을 회령부 땅으로 삼았다. 금나라 말기에 그 장수 포선만노가 요동에 있을 때에 몽고가 그를 물리쳤다(1233년). 지원(원 세조 쿠빌라이칸) 23년(1286년) 개원로를 설치했다. 원사에 따르면 원나라 초기에 요동을 평정하고 개원남경 2만호부를 설치하였으며 황룡부에서 다스렸다. 지원 4년(1267년)에 요동로 총관부로 변경하였다. 23년(1286), 개원로로 고쳤다. 왕씨가 말하길, 개원은 금나라 상경(회령부) 경내의 지명으로 원나라가 요동을 평정하며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마침내 그 땅을 평정하였다 하였다. 이 때에 상경(회령부) 일대가 이미 모두 잔혹하게 훼손되었고 (회령부를) 개원로로 고쳐 건립하였다. 회령부의 옛 땅을 삼만위로 삼았다 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명나라 홍무 21년, 올자야인(올량합)이 여진군민부를 설치해 달라고 구걸하여 설치하였다. 22년, 부를 파하고 지금의 위(삼만위)를 설치하였다. 지금은 개원현으로 고쳐 설치하고 봉천부에 속하게 하였다.


(鐵嶺衛司北二百四十里。咸平城在衛東北。) 歸仁城在故咸平東境。《遼志》:通州安遠軍,本扶餘國王城,勃海號扶餘城。遼初故置龍州,尋曰通州,領通遠、安遠、歸仁、漁穀四縣。金州廢,以三縣並入歸仁,屬咸平府。元初廢。


(철령위는 요동도사성 북쪽 240 리에 있다. 함평성은 철령위 동북쪽에 있다.) 귀인성이 옛 함평의 동쪽 경계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통주 안원군, 본래 부여국 왕성으로 발해에서는 부여성이라 했다. 요나라가 처음 옛 용주를 설치했는데 통주라는 이름으로 계승하였고 통원현, 안원현, 귀인현, 어곡현 등 4현을 거느렸다.” 라고 했다. 금나라가 통주를 폐지하고 3 현을 귀인현에 통합하여 함평부에 속하게 하였다. 원나라 초기에 (이 역시) 폐지하였다.


《卷三十八 山東九》


廢會寧城一名海古城。西南接三萬衛界,即勃海上京龍泉府之地也。女真初起於此。阿骨打既滅遼,置會寧州,完顏晟升為會寧府,建上京,兼置會寧縣為府治。海陵帝廢上京,尋復舊。元廢。


폐지한 회령성은 일명 해고성이다. 서남쪽으로 삼만위의 경계와 접하는데 즉 (회령성은) 발해 상경용천부의 땅이다. 여진족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발흥(起, 금나라 건국을 의미)하였다. 완안아골타(금 시조)가 요나라를 멸하고 회령주를 설치했으며 완안성(금 태종)이 회령부로 승격시키고 상경을 건립하여 회령현울 부의 치소를 겸하도록 하여 설치하였다. 해릉제(금 4대 황제, 완안량)가 상경을 폐지하고 옛 명칭(회령)을 되살렸는데 원나라 폐지했다.


黃龍府城在會寧西北。《遼志》:在勃海扶餘府。阿保機末,有黃龍見於此,因名。石晉開運三年,契丹以晉主重貴為負義侯,置於黃龍府。《五代史》:自幽州行十餘日,過平州,出渝關,行沙磧中七、八日,至錦州。又行五、六日,過海北州。又行十餘日,渡遼水,至勃海鐵州。又行七、八日,過南海府,遂至黃龍府。府北至混同江一百三十里。宋開寶四年,契丹主賢以軍將燕頗叛,府廢,改曰龍州,俗仍謂之黃龍府。政和五年,阿骨打將攻遼黃龍府,進薄益州,又敗遼兵於達魯古城,逐北至阿婁關。既而阿骨打次混同江,乘馬以濟,遂克黃龍府,後因改府為濟州,兼置利涉軍。紹興中,岳武穆嘗言:直抵黃龍,與諸軍痛飲。蓋以北狩擬於石晉之禍也。金天德四年,又升為濟州路。大定二十九年,改曰隆州。貞初,又升為龍安府,治利涉縣。時蒙古兵起,遼人耶律留寄聚眾隆安,至十餘萬,遣使附蒙古。金人討之,為所敗,遂自立為遼王。元初以其地並入開元路。○廢益州,在黃龍府東北,遼置,統靜遠縣。又黃龍縣,即故黃龍府治也。《遼志》:黃龍府統縣三,曰黃龍、遷民、永平;州五,曰益州、安遠州、威州、雍州、清州。金廢入龍州利涉縣。


황룡부성이 회령 서북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발해 부여부(자리)에 있다고 하였다. 야율아보기가 말년에 황룡을 이곳에서 보았던 데에서 (황룡부라는) 이름을 얻었다. 석진 개운 3년(947년), 거란이 석중귀를 부의후로 삼고 황룡부에 안치했다. 신오대사에 따르면 유주로부터 평주를 지나 (유관까지) 10여 일, 유관을 나와서 (해변의) 모래밭을 지나 금주에 이르기까지 7~8일, 금주에서 다시 해북주를 지나 (현주에 이르기를) 5~6일, 다시 (현주에서) 요수를 건너 발해의 철주에 이르기까지 10여 일, 다시 (철주에서) 남해부를 지나 마침내 황룡부에 도착하기까지 7~8일이라 했다. (홍룡부에서) 북쪽으로 혼동강까지 130 리이다.  송 개보 4년(971년) 거란왕 현(야율현, 거란 경종)이 군장 연파가 반란하였던 까닭에 부(황룡부)를 폐지혔고 고쳐서 용주라고 하였으나 습관적으로 황룡부라 하였다. 정화 5년, 아골타가 요나라의 황룡부를 공격하면서 익주(용주 황룡부 소속 주)에 가깝게 진군하였는데 요나라 군대가 달로고성에서 또다시 (금나라 군대에) 패하여 북쪽으로 아루관까지 도망을 쳤다. 이전에 완안아골타가 혼동강에 이르렀을 때에 수레와 말로 건너서 황룡부를 함락(克)시켰으므로 후에 이로 인하여 황룡부를 제주로 고쳐서 이보군을 겸하여 설치했다. 초흥 년간에 악무목(악비)이 술을 마시며 말하길 “곧바로 황룡부까지 쳐들어가서 제군들과 더불어 통쾌하게 술 마시고 싶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석진(의 석중귀)이 불러 온 재앙이다. 금 천덕 4년, (제주를) 다시 제주로로 승격시켰다. 대정 29년, (제주를) 륭주로 고쳤다. 정초(?)에 다시 용안부로 승격시키고 리보현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ㅡ 하략 .



4) 한민족문화대백과


부여부


“부여부의 위치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길림성 농안현(吉林省農安縣)설이 유력하다. 그 밖에도 길림성 농안의 서남쪽에 있는 사면성(四面城)설 등이 있다.”



5) 바이두백과


扶余府


https://wapbaike.baidu.com/item/%E6%89%B6%E4%BD%99%E5%BA%9C?timestamp=1554100859838


扶余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渤海国置,治今吉林省农安县。


因为扶余国故地得名。下辖扶州、仙州。辖境约当今吉林农安县、长春市、辽源市、四平市,辽宁西丰县、昌图县等地区。辽太祖攻克后,在扶余府病死,后扶余府改为龙州黄龙府,金朝改为隆州隆安府


부여시(扶余市, 吉林省 松原市 县级市)


https://wapbaike.baidu.com/item/%E6%89%B6%E4%BD%99/13395?fromtitle=%E6%89%B6%E4%BD%99%E5%8E%BF&fromid=5042773&timestamp=1554101052295



농안현

https://goo.gl/maps/UfAyo5KLHH72


장춘시

https://goo.gl/maps/KpPV1NcRtFq


요원시

https://goo.gl/maps/GNKyLgZUydJ2


사평시

https://goo.gl/maps/HPkhRHrEaH52


철령시 서풍현

https://goo.gl/maps/RpUx53GJq3E2



철령시 창도현

https://goo.gl/maps/X3Xb6nVMtbu




3. 정리



회밀주(懷密州)는 회주(懷州)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회주 외에는 거리와 위치를 고려하여도 비슷한 이름을 지닌 역대 지역을 고찰하여도 없다.


■ 중문 위키백과 : 懷州,中國遼朝時設置的州。遼太宗天顯年間,遼國設置懷州,奉陵軍節度使。遼太宗安葬在懷州,他的陵墓叫懷陵。下轄扶余縣(治所,今內蒙古巴林右旗西北50裏)、顯理縣。遷移渤海國扶餘府、定理府的遺民建立懷州。金太祖天輔四年(1120年)金國攻克,金熙宗皇統三年(1143年)廢除懷州,地入臨潢府。


■ 요사 지리지 상경도 : 懷州,奉陵軍,上,節度。本唐歸誠州。太宗行帳放牧於此。天贊中,從太祖破扶餘城,下龍泉府,俘其人,築寨居之。會同中,掠燕、薊所俘亦置此。太宗崩,葬西山,曰懷陵。大同元年,世宗置州以奉焉。是年,有騎十餘,獵於祖州西五十里大山中,見太宗乘白馬,獨追白狐,射之,一發而斃;忽不見,但獲狐與失。是日,太宗崩於欒城。後於其地建廟,又於州之鳳凰門繪太宗馳騎貫狐之像。穆宗被害,葬懷陵側,建鳳凰殿以奉焉。有清涼殿,為行幸避暑之所。旨在州西二十里。隸永興宮 。


압자하는 혼동강을 가리킨다. 거란 성종 때인 1024 년에 성종의 명에 따라 압자하를 혼동강으로 개칭하였다. 현 길림성을 서부를 종단하여 하얼빈으로 이어지는 송화강의 남류 수계(남송화강)를 가리킨다. (太平四年春正月庚寅朔,宋遣張傳、張士禹、程琳、丁保衡來賀。如鴨子河。二月己未朔,獵撻魯河。詔改鴨子河曰混同江,撻魯河曰長春河。《遼史 卷十六本紀第十六 聖宗七》)


금사의 거란 공략 기사에 따르면 완안아골타는 황룡부를 혼동강을 건너서 공략하고 있다. (收國元年八月戊戌,上親征黃龍府。次混同江,無舟,上使一人道前,乘赭白馬徑涉,曰:「視吾鞭所指而行。」諸軍隨之,水及馬腹。後使舟人測其渡處,深不得其底。熙宗天眷二年,以黃龍府為濟州,軍曰利涉,蓋以太祖涉濟故也。九月,克黃龍府,遣辭剌還,遂班師。至江,徑渡如前。丁丑,至自黃龍府。己卯,黃龍見空中。癸巳,以國論勃極烈撒改為國論忽魯勃極烈,阿離合懣為國論乙室勃極烈。《金史 本紀第二》)


그런데 무경총요의 압자하 설명은 거란국지의 기술을 고려할 때에 달로하로 불린 현 조아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매해 (음력) 정월 상순이면 보통 60일이 걸리는 사냥을 나간다. 그런 후에 모두 모여 달로하(물길 을력지가 배를 가라앉혀 숨겼던 그 강)의 얼음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하는데 얼음이 녹은 후에는 곧 매를 부려(놓아) 거위와 기러기를 잡는다. 每歲正月上旬,出行射獵,凡六十日。然後並撻魯河鑿冰釣魚,冰泮,即縱鷹鶻以捕鵝雁。《契丹國志卷之二十三》”


조아하와 (남)송화강, 즉 달로하와 압자하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20188&cid=40942&categoryId=40012


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765_000_17/20180221232812758_JLZV2JZEQ.gif/103851_0.gif?type=ori_1&wm=N



황룡부는 발해 부여부 자리에 설치한 거란의 행정지로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 정벌 후에 부여성 서남쪽에 있는 우하 근처에서 갑자기 죽자 요 태종 야율덕광이 그 자리에 승천전을 건립하고 발해의 부여부를 황룡부로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통주 조에서는 태조가 용주를 설치했다고 했으나 용주는 태조가 죽은 뒤에 설치된 것(동명성왕의 신화를 차용하여 야율아보기의 죽음을 신격화하면서 용, 또는 황룡이 등장한 것이다. 요사 태조본기에서는 야율아보기의 죽음을 옛 역사의 부여지변 - 舊史扶餘之變-이라고 수사하고 있다.)이므로 적어도 용주를 설치한 것은 태조가 아니다. 따라서 통주 조의 해당 설명은 그르다.


요사 경종본기와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통주와 용주 기술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975년, 황룡부를 지키던 발해출신 장수 연파의 반란이 기점이 되었다.


연파가 반란을 일으키고 올야성으로 도망쳐 숨자 경종은 황룡부에 남아있던 연파의 잔당내지 주민들을 수습하여 통주를 건립하였다. 즉 통주는 경종이 975 년에 건립한 것인데 이 자리가 기존 황룡부 치소 자리인지 아니면 황룡부 관할의 어느 땅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기술하는 용주는 그로부터 50여 년 후인, 1020 년에 거란 성종이 기존 자리에서 동북쪽으로 옮겨 다시 설치한 것이다. 즉 이 1020 년 이후로 통주와 용주는 동시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 상경도에서는 상경 직속현인 보화현을 설명하며 태조가 발해의 용주를 격파하고 그 주민을 옮겨와서 설치했다(  保和縣。本渤海國富利縣民,太祖破龍州,盡徒富利縣大散居京南。)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에 그곳이 용주로 불렸다는 말이 아니라 용주 자리가 발해 부여부 자리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현이 후대의 기술로서 들어간 것일 뿐이다.


황룡부의 위치를 기술하는 사서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① 회(밀)주 동남쪽 1,500 리 (신오대사)

② 동경 동북쪽 700 리 (무경총요)

③ 압자하(혼동강, 즉 송화강 남쪽 줄기)가 황룡부 서쪽에 있다 (무경총요)

④ 황룡부는 혼동강 건너에 있다. (금사)

⑤ 삼만위는 요동도사 북쪽 330 리에 있고, 삼만위 동북쪽 경계는 회령과 연접해 있는데 이 회령 서북쪽에 황룡부가 있었다. (독사방여기요)


무경총요의 “압자하가 황룡부 서쪽에 있다”는 기술은 현 조아하, 즉 당시 달로하(장춘하)를 오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거란 상경도 회주는 현 파림좌기 서남쪽 인근에 위치한다.


③을 제외하고 기록을 종합할 때에 947년, 석진의 폐황제 석중귀가 부의후에 봉해져서 도착한 황룡부는 현 사평시 철동구와 철령시 창도현 일대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즉 이곳이 본래의 용주이자 훗날(975년)의 통주 자리이며 이곳에서 동북쪽에 1020년에 새롭게 다시 설치된 용주가 자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치는 황룡부의 부치소가 있는 곳의 위치일 뿐으로 황룡부 자체의 관할 영역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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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4-01 17:20
   
(글이 잘려서 이어서 붙인다)

금나라 초기 완안아골타가 거란의 황룡부 지역을 공략하는 과정을 보면 현 (남)송화강 서쪽을 아우르면서 현 조아하 남쪽 지역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란 황룡부는 발해의 부여부 자리를 그대로 계승하였던 바 학계에서는 사서 기록과 유물, 유적을 종합하여 현 길림성 농안현과 사면성(철령시 창도현) 두 지역을 부여부의 중심지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 송원시로부터 장춘시, 사평시, 요원시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부여부의 관할 영역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황룡부는 현 장춘시를 중심하여 북쪽으로는 송원시, 동쪽으로는 남송화강(혼동강), 남쪽으로는 사평시를 아우리는 지역이며 947년, 석진의 폐황제 석중귀가 유주를 출발하여 남배부를 거쳐 도착한 황룡부는 황룡부의 치소 지역으로서 옛 용주이자 훗날 통주가 되는 곳이다.

발해 부여부 → 거란 황룡부 → 금 제주 → 금 륭주

928년, 동단국이 각지의 반란으로 인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고 요나라 요주 동평군 지역으로 쫓겨가면서 숙여진과 생여진을 편성하였는데 숙여진은 거란의 호적에 수록돼 있는 여진족이다. (남)송화강과 장춘, 길림, 하얼빈 일대는 생여진 활동지역이었다. 숙여진과 생여진, 거란지역과 생여진지역의 분기점으로 요사에서는 압록강을 지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압록강은 현 동요하에 해당한다. 이 분기점은 훗날 명나라가 요동도사의 관할 영역과도 비슷하여서 명나라 역시 동요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따라서 928 년 이후에 황룡부의 중심지 역시 자연스럽게 서남하여 현 사평시 지역으로 내려와 있었다 추정할 수 있다.
 
1020년, 거란 성종이 용주를 새롭게 다시 설치한 이후로는 황룡부 치소가 용주에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철령시 창도현 지역은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고려와 인접하다 하여 신주를 새롭게 설치한 곳으로 금사, 만주원류고 등과 교차 분석시 나타나는데(이미 본인이 예전에 고찰글을 올린 바 있다) 요사 지리지에서는 이 지역이 발해 회원부에 속했던 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 부여부는 당연히 이 북쪽에 해당할 것이므로 1020년을 기점으로 그전부터 동정 활동을 활발히 한 거란 성종에 의해 928년 이후 축소돼 서남쪽 통주(동경 동북쪽 700 리) 지역으로 내려와 있던 황룡부 치소의 기능을 그 동북쪽으로 용주를 새롭게 다시 설치하면서 확장시켰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 줄 요약 : 947 년, 석중귀가 도착한 황룡부는 동경 동북쪽 700 리, 현 철령시 창도현(사면성) 일대
감방친구 19-04-01 17:23
   
이 글은 아래 '발해 남경 남해부와 947년 석중귀'에 붙이는 글이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9666&sca=&sfl=mb_id%2C1&stx=cellmate

이 고찰의 목적은 거란 황룡부가 아니라 '947년 석중귀의 이동 경로를 통해 본 발해 남경 남해부의 위치'이다.
감방친구 19-04-01 17:24
   
해석에 문제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관심병자 19-04-01 23:16
   
황룡부와 그리 상관없을수도 있지만,
황룡국이 처음 등장하는것은 고구려 초기 기록에서 해명태자와 관련해서 등장합니다.
황룡국에서 고구려에 활을 선물했고 해명태자가 이것을 사신앞에서 부러뜨려버리는 외교결례를 범한 이야기.
이후 등장하는 황룡국은 중원에서 북연(모용선비, 고운)을 황룡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황룡국 출신이라고 하죠.
강단사학에서는 황룡국을 북한 평양인근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9-04-13 02:27
   
회밀주를 본인은 회주로 보고 있는데 회주의 위치는 무경총요 기록 상 현 시라무렌강 남쪽에 있었다

懷州,契丹號奉陵軍,州將兼少陵都部署,即虜主德光葬所也。東南至中京三百五十里,西至平地松林四十里,北至潢河十里,河北至上京百五十里,西北至達靼國三百里。<무경총요 전집 북번지리>
감방친구 19-04-13 02:40
   
본인은 회주의 위치를 요사 지리지 상경도 기록에서 '조주 서쪽 50 리'에 근거했다

중국역사지도집 역시 요사 지리지를 따르고 있다

회주는 요 태종이 묻힌 회릉을 중심으로 조성한 주이다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11102_265%2Fjhy8365_1320215525838KelUC_JPEG%2F16.jpg

회주(懐州), 봉릉군(奉陵軍), 上, 節度. 원래 당국(唐)의 귀성주(歸誠州)이다. 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장막을 옮겨다니며 방목하였다. 천찬(天贊) 년간에 태조(太祖)로부터 부여성(扶餘城)을 격파하고 룡천부(龍泉府)를 물리쳐 그곳 사람들을 포로로 삼아 채(寨)를 쌓고 살게하였다. 회동(會同) 년간에 연(燕)과 계(薊)를 약탈하고 포로를 가지고 다시 설치하였다. 태종(太宗)이 죽자 서산(西山)에 장사지내고 회릉(懐陵)이라고 불렀다. 대동(大同) 원년에 세종(世宗)이 주(州)를 설치하여 받들었다. 이해에 말탄 자가 10여인이 있어 조주(祖州) 서쪽 50리에 있는 대산(大山) 가운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흰말을 타고 홀로 흰 여우를 추격하여 화살로 쏘았는데 한발에 맞추었으나 홀연히 (태종이) 보이지 않고 오직 여우와 화살만 얻었을 뿐이었다. 이 날에 태종은 란성(灤城)에서 죽었다. 후에 이곳에 묘를 설치하였다. 또한 회주(州)의 봉황문(鳯凰門)에 태종이 말을 달리며 여우를 쏘는 형상의 그림을 그려넣었다. 목종(穆宗)이 해를 당한 후에 회릉(懐陵) 곁에 장사를 지내고 봉황전(鳯凰殿)를 지어 받들었다. 청량전(清涼殿)이 있는데 행차할 때 더위를 피하는 곳이다. 대개 주의 서쪽 20리에 있다. 영흥궁(永興宫)에 예속되었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懐州, 奉陵軍, 上, 節度. 本唐歸誠州. 太宗行帳放牧於此. 天贊中, 從太祖破扶餘城, 下龍泉府, 俘其人, 築寨居之. 㑹同中, 掠燕薊所俘亦置此. 太宗崩, 葬西山, 曰懐陵. 大同元年, 世宗置州以奉焉. 是年, 有騎十餘, 獵于祖州西五十里大山中, 見太宗乗白馬, 獨追白狐, 射之, 一發而斃., 忽不見, 但獲狐與矢. 是日, 太宗崩于灤城. 後於其地建廟, 又於州之鳯凰門繪太宗馳騎貫狐之像. 穆宗被害, 葬懐陵側, 建鳯凰殿以奉焉. 有清涼殿, 為行幸避暑之所. 皆在州西二十里. 隸永興宫. 統縣二. <요사 지리지 상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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