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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3-18 16:25
[한국사] 가탐도리기 영주입안동도(營州入安東道) 분해와 분석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334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서쪽 영역의 한계를 추적하고 있다. 영주의 위치를 탐문, 고찰하는 것은 이를 위한 한 도구요 수단으로서 활용하기 위함이다.


북위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6~8세기, 즉 고구려 말기에서부터 고구려 멸망을 거쳐 발해가 들어서기까지 영주는 수차례 교치되었고, 거란과 해의 영역도 변화가 있었으며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지덕(至徳, 756 년 ~ 758 년) 년간에 최종 폐지되기까지 총 5곳(평양, 요동군고성, 신성, 평주, 요서군고성)을 오갔다.


즉 이러한 역사적 사실 정황에 맞춰서 가탐도리기 제 1도를 해석해야 함에도 무조건 영주를 현 조양시에 고정하여 두고서 현 조양시의 위치에 가탐도리기 제 1도 등을 억지로 꿰어맞추어 설명하는 것이 소위 학계통설이다.


영주는 중국 정권 직속의 영주 외에 7세기 말 거란의 영주 함락 이후 거란에 대한 회유책으로서 거란 우두머리에게 영주도독을 겸하게 한 바가 있어서 중국 정권 직속의 영주의 교치상 외에도 거란의 중심세력이 이리저리 움직임에 따라서 같이 움직여 간 정황 역시 있다.


영주가 현 조양시에 비정되게 된 데에는 통전의 개판오분전 거리기술(통전은 유성군과 영주 유성현을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유성군은 동쪽으로 480리에 요하가 있다고 해놓아서 이 요하가 현 요하일 시 현 조양시가 유성군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편 이 유성군 서쪽 200리에 북평군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북평군은 현 노룡현이므로 그 동쪽 200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현 산해관, 이 산해관에서 동쪽 400 리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리 가깝게 잡아도 대릉하를 벗어나지 않는다.)을 비판검증도 없이 덥썩 물어서 후대 사서가 받아적으면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 오대 시기에 왕건의 고려가 현 평양을 고구려 평양이자 서경으로 대내외에 선전하면서 ‘요수~압록강~평양 거리수 차’를 기계적으로 적용, 본격적으로 현 조양시가 영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통전에서는 요수와 압록강의 거리가 480리, 압록강과 평양의 거리가 450리라고 적고 있다. 학계에서는 요수를 현 요하에, 압록강을 현 압록강에, 평양을 현 평양에 고정하여 설명하여 왔다.


그런데 독사방여기요(와 명일통지 교차) 기술 요하와 압록강의 거리는 700 리 남짓(요하~요양 160리 + 요양~압록강 560리 = 720리이다. 무경총요의 경우는 동경과 압록강의 거리가 900 리라고 적고 있다(무경총요의 동경 정보는 교치 전후의 정보가 다소 섞여 있다. 거란 동경은 11세기 초에 거란 성종에 의해 현 의무려산 부근에서 현 요양으로 교치되었다). 이 두 사서 모두 현 압록강을 압록강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사서이다.


또한 압록강과 평양의 거리 450리는 실제 거리가 아니라 수나라군의 살수전투 패전 이후 도주 거리인 450리에서 온 것이다. (물론 이 거리는 현 압록강과 현 평양 거리에 근사하다.)


말이 길어지니 각설하고,


본인은 이곳 동아게에서 지난 몇 년 동안 가탐 제1도는 여러 곳에 있었던 영주와 역시 여러 곳에 있었던 안동도호부의 지리정보가 가탐이 지리정보를 청취, 합산하는 과정에서 구분 없이 뒤섞인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하여 영주의 위치를, 영주 자체가 아니라 1차적으로 송형령을 추적함으로써 윤곽을 잡는 것을 연구안으로 삼아 추적하였고


역대 사서를 분석하여 해와 거란의 거주지역과 관계가 있으며 두 종족의 분기점이 되는 송형령을 추적한 바


ⓐ 냉형상과 염산과 송형과 형과 형두가 동일한 지역에서 교차돼 나타나며

ⓑ 그 동일 교차지는 현 장가구시 동쪽의, 난하와 조하와 백하의 발원처가 되는 지역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 그밖에 현 당산 천안시 북쪽, 승덕시 남쪽에 위치했던 송형관

ⓓ 현 적봉시 서쪽에 해당하는 송산 지역 등을 송형령 가능지로 제시하였다.


특히 적봉시 서쪽의 송산 지역은 그 일대부터 시라무렌강을 건너 림서현과 파림우기까지 해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이 요사에 기술돼 있을 뿐만 아니라 가탐 제 1도에서 황수(현 시라무렌강)와 영주의 거리 400 리에 합치하는 위치가 현 적봉시 일원에 해당한다는 것을 밝혀내었던 바


본인의 가설인 ‘가탐 제 1도는 여러 영주의 위치와 여러 안동도호부의 위치가 뒤섞인 것’에 맞추어 가탐 제 1도를 분해하고 또 분석하고자 한다.




1. 신당서 가탐도리기 제 1도 영주에서 안동도호부 가는 길(營州入安東道) - 다시 쓰는 유기 해석본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 其西奚, 其東契丹距. 營州北四百里至湟水.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又經汝羅守捉, 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府, 故漢襄平城也. 東南至平壤城八百里..,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西至建安城三百里, 故中郭縣也..,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 故安平縣也.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嶺府, 千五百里至渤海王城, 城臨忽汗海, 其西南三千里古肅慎城, 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里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고 그 서쪽은 해(奚)이며 그 동쪽은 거란(契丹)이 떨어져 있다. 영주(營州)에서 북쪽으로 400리를 가면 황수(湟水)에 이르고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한 (연군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서 료수(遼水)를 건너면 옛날 한국(漢)의 양평성(襄平城)이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까지 500리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까지 800리이고,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도리해구(都里海口)까지 6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서쪽으로 옛 중곽현(中郭縣)이었던 건안성(建安城)까지 300리이며, (안동도호부에서) 남쪽으로 압록강(鴨淥江) 북쪽에 있는 옛 안평현(安平縣)이었던 박작성(泊汋城)까지 700리이다. 안동도호부(都護府)로부터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지나고 또한 발해(渤海)의 장령부(長嶺府)를 지나는 등 1500리를 가면 발해(渤海)의 왕성(王城)에 이르는데 발해왕성은 홀한해(忽汗海)를 내려다보고 있다. 발해왕성의 서남쪽 30리는 옛 숙신성(肅慎城)이고 발해왕성(其)의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鎮)을 지나서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까지 1000리이다.




2. 영주와 안동도호부의 교치 내역


1) 영주의 교치상


■ 5세기(북위가 북연을 멸망 시킨 후부터)

: 현 적봉시와 난평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 그 후 수도를 평성(현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유연(연연)을 방어하기 위하여 6진의 설치와 함께 고북구와 밀운현을 거쳐 현 장가구시와 북경시 창평구 일대로 영주의 중심이 이동한 것으로 분석됨


■ 6세기 초(북위 말기) ~ 7세기 말(수 건국 전후)

:  6진의 난이 발생하여 영주가 함락됨에 따라 현 보정시 수성현에 남영주를 설치하였고, 본래의 영주 위치, 즉 현 장가구시(북위 연주 : 燕州)에는 임시소 개념의 북영주를 설치하였으며 영주는 이렇게 북위 멸망 이후에도 남영주와 북영주 2체제로서 수나라 건국 직전(고보녕의 반란)까지 유지되었음. 한편 527년 두락주의 반란 때는 연주(燕州)를 장악하고 유주를 공격하려는 두락주를 방어하기 위해 현 북경시 창평구에 새롭게 연주(燕州)를 설치하여 거용관-군도관으로 이어지는 장가구시(연주)에서 북경시(유주)로 오는 길목을 방어하였음.


■ 7세기 말(수 건국 및 고보녕 반란 진압 후)

: 애초 북위의 남영주 체제에 맞추어 현 보정시 수성현 일대에 영주를 설치하였다가 고보녕(은 돌궐과 결탁돼 있었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보녕이 장악했던 북영주 지역으로 영주를 옮겨 설치하였음. 연주와 영주는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둘 다 요서현에 그 치소를 두고 있었음. 요서현은 이름만 요서군에서 따온 것으로 본래 용성현에서 이름을 바꾸어 요서현, 또는 유성현이 한 것인데 이 두 명칭은 혼용돼 사용되었고, 후대 사서에서도 혼용해 사용하였음. 본래 이름 자리 용성현은 북연의 수도가 있던 용성현이 아니라 현 보정시 수성현의 남영주로 교치돼 있던 용성현으로 이것은 고보녕이 웅거했던 곳으로 교치시켜 간 것임. 이 수나라 건국 초기에 속말갈갈의 돌지계부락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수나라에 귀순해 오는데 이들을 살게 한 곳이 바로 이 영주이자 연주의 중심지(현이 달랑 1개) 요서현이었음. 이곳은 여라성, 또는 여라성 근처였음. 돌지계부락(이칭 내계부락 : 내부한 돌지계부락의 준말)은 당나라 건국 직후에 현 북경시 창평구로 교치되는데 그 직후에 규주(북위의 연주지역, 즉 현 장가구시)를 장악하고 유주를 공략하려 한 고개도의 침입을 격퇴하는 공을 세움. 즉 고보녕이 활동한 지역이자 수나라 영주이자 요서군 지역은 ‘현 장가구시 동남부 ~ 북경시 창평구 ~ 밀운현/고북구 ~ 노룡새’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역이었음. 수나라는 건국 직후 고보녕의 반란을 진압한 후에도 현 대동시에서 장가구시에 이르는 현 북경시 서쪽 라인에 수와 진을 여럿 설치하여 돌궐의 침입에 방비하였다.   


■ 수나라 605년

: 거란의 공격에 의해 수나라 영주 함락. 수나라 영주 폐지. 수양제는 이곳에 요서군 설치(실질 기능은 없는 명목상 행정지역)


■ 당나라 건국 직후

: 수나라 요서군 자리에 영주를 설치(618년 총관부, 624년에 도독부로 승격). 영주와 연주와 요주(돌지계부락)는 같은 곳으로 속현은 유성현(요서현) 1곳이었다. 이 당시의 영주(와 연주, 요주 모두)는 현 북경시 창평구 근방에서 현 밀운현/고북구 사이에 있었다 판단되는데 거용관-군도관-창평에 이르는, 옛 북위 말기 두락주의 반란 당시 북위가 연주를 교치해 설치하여 두락주를 방어하던 곳인 이 일대가 당나라 초기 영주 위치로 분석된다.


■ 당 태종 등극 이후부터 고구려 멸망 전까지

: 영주 예하에 628년에 또한 창주(昌州)를, 629년에는 사주(師)와 숭주(崇)를 관리하는 등 현 적봉시와 시라무렌강 중상류 일대의 거란에 대한 정치적 예속 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이들은 비록 당나라의 고구려 1차 침략에 용병으로 참전하기는 했으나 648년 현 적봉시 림서현과 파림우기 지역에 각각 요락도독부(해)와 송막도독부(거란)가 설치된 것을 분기점으로 당나라의 이 지역에 대한 실질 장악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거란 장악력은 이후에도 655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 나타났다.).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게 된 배경을 기술하는 신당서의 기술 내용에서 “당 태종이 영주를 지나다가 굴가를 불렀다”라고 돼 있는데 여기에서 영주는 영주 치소 소재처로서의 영주가 아니라 영주가 관할하는 지역으로서의 영주로 봐야 한다. 영주에 예속된 해와 거란의 여러 주는 대개 영주 동북쪽의 양사진과 정번수에 붙여 다스렸다고 구당서와 신당서는 적고 있다. 즉 이 시기의 영주(치소 소재처) 역시 현 북경 창평구와 밀운현 고북구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 고구려 멸망 후


이 당시의 영주 중심지, 즉 치소의 소재처는 현 적봉시 일원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본인은 사서 분석시에 이렇다 판단한다.


■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또는 이만영)의 영주 함락과 반란에 따른 교치


699~704년 어양(현 천진시 계현)

705~715년 유주(현 북경시) 경계, 또는 어양(현 천진시 계현)

716~719년 유성

720~722년 어양(현 천진시 계현)

723년 이후 유성(그 명칭이 유성군을 거쳐 758년에 다시 영주로 바뀌었다)

723 이후 유성은 고구려 멸망 후의 영주 치소 소재처로서의 유성이나 수나라 요서현으로서의 유성이 아니라 현 진황도시 노룡현, 즉 당나라 평주 치소가 있던 노룡현 근방으로 교치된 유성이다. 716~715년 유성 역시 이곳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당나라군은 732년, 현 당산 천안시(노룡현 서쪽) 북쪽의  마도산(馬都山) 전투에서 발해의 사주를 받은 거란과의 전투에서 대참패를 했으며 그 후에 안록산 역시 거란 정벌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대참패를 당했다.


□ 역사상 유성현은 총 4곳이 나타난다.

ⓐ 한나라 요서군 유성현(본인 고증지 현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닝청현)

ⓑ 수나라 요서현(유성현과 혼용돼 쓰였다)

ⓒ 8세기 초 평주 노룡현 근방으로 교치된 유성현(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근방)

ⓓ 오대 시기 사서부터 점차 나타나는 현 조양시를 가리키는 유성현(학계 통설)



2) 안동도호부의 교치상


① 總章元年(668 년) ㅡ 평양성(平壤城)

② 上元三年(674 년) ㅡ 요동군의 옛 성(遼東郡故城)

③ 儀鳳二年(677 년) ㅡ 신성(新城)

④ 聖歴元年(698 년) ㅡ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개칭

⑤ 神龍元年(705 년) ㅡ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명칭 복원

⑥ 開元二年(714 년) ㅡ 평주(平州)

⑦ 天寳二年(743 년) ㅡ 요서의 옛 군성(遼西故郡城)

⑧ 至徳(756 년 ~ 758 년) 년간 ㅡ 폐지




3. 가탐 제 1도에 대한 본인의 해석(다시 쓰는 유기 해석본과 큰 차이는 없으나 본인의 해석이 더 바른 해석에 가깝다고 판단한다)과 분해


a.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其西奚,其東契丹。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는데 그 서쪽은 해, 그 동쪽은 거란이 있다. (송형령이 해와 거란 영역의 분기점이라는 말이다)


이 영주는 현 적봉시 근방을 가리킨다.


b.

距營州北四百里至湟水。

영주에서 북쪽으로 황수까지 400 리이다.


이 영주는 현 적봉시 근방을 가리킨다.


c.

營州東百八十里至燕郡城。

영주 동쪽으로 180 리를 가면 연군성에 이른다.


이 영주는 현 장가구시 연경구, 또는 북경시 창평구

이 연군성은 현 북경시 모처


d.

又經汝羅守捉,渡遼水至安東都護府五百里。

또 (연군성에서 동쪽으로) 여라수착을 경유해 요수를 건너 안동도호부에 이르기까지 500 리이다.


이 여라수착은 현 북경시 모처

이 요수는 현 난하

이 안동도호부는 현 노룡현, 또는 그 근방


e.

府,故漢襄平城也。

안동도호부는 옛 양평성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요동성으로 현 요녕성 부신시 동북쪽


f.

東南至平壤城八百里;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에 이르기까지 800 리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요동성으로 현 요녕성 부신시 동북쪽

이 평양성은 현 요양과 본계시 일원


g.

西南至都里海口六百里;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도리해구에 이르기까지 600 리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현 노룡현, 또는 그 근방

이 도리해구는 도리진으로 현 산동성 빈주시(濱州市)


h.

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안동도호부에서) 서쪽으로 옛 중곽현이었던 건안성에 이르기까지 300 리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평양성으로 현 요양과 본계시 일원


i.

南至鴨淥江北泊汋城七百里,故安平縣也。

(안동도호부에서) 남쪽으로 옛 안평현이었던 박작성까지 700 리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요동성으로 현 요녕성 부신시 동북쪽

이 박작성은 현 요녕성 안산시 일원


j.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又經渤海長嶺府,千五百里至渤海王城,城臨忽汗海,其西南三十里有古肅慎城,其北經德理鎮,至南黑水靺鞨千里。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과 신성을 경유하고 또 발해 장령부를 경유해 발해왕성에 이르기까지 1,500 리인데 발해왕성은 홀한해를 끼고 있으며 발해왕성의 서남족 30 리에 옛 숙신성이 있고, 발해왕성의 북쪽으로 덕리진을 경유해 남흑수말갈에 이르기까지 1,000 리이다.


이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요동성으로 현 요녕성 부신시 동북쪽

이 발해왕성은 하얼빈 일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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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3-18 17:32
 
1. 다음의 두 조건에 합치하는 곳은 현 적봉시, 또는 그 근방밖에는 없다. 유일하다.

1) 거란과 해의 경계가 되는 특정지점(송형령)이 A의 서북쪽 100리에 있다
2) 황수(현 시라무렌강)는 A의 북쪽에 있으며 그 거리는 400리(148~160km)이다.
     
감방친구 19-03-18 17:40
 
이것만으로도 현 조양시는 절대 가탐 1도 기술상 영주(치소)가 있던 곳이 될 수 없다.
감방친구 19-03-18 17:39
 
2. 연군성은 연군의 성, 또는 연군의 외곽을 지키는 수착성(규모 300명~7,000명 주둔)을 가리킨다. 연군은 역사적으로 현 북경에 있었고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3. 여라성, 또는 여라수착성은 수나라 영주에 있었던 곳으로 속말말갈 돌지계 부락이 내부해왔을 때에 거주하게 한 곳이다. 역시 현 북경시 일원, 또는 근방에서 찾아야 한다.
     
감방친구 19-03-18 19:01
 
본인은 2018년 봄, 무경총요를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영주를 학계통설 대로 현 조양시에  놓고 가탐 1도를 비정하려 한 바 있다.
감방친구 19-03-18 18:02
 


감방친구 19-03-18 18:03
 



위서가 기록한 505 년의 기상현상
상기 지도에 표시된 유현진에서 발생한 모래돌풍이 그 다음날 영주에 이르러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갔다
이 모래폭풍이 지나간 505년 당시 영주는 어디겠는가?

(正始)二年二月癸卯,有黑風羊角而上,起於柔玄鎮,蓋地一頃,所過拔樹。甲辰,至於營州,東入於海。《魏書 靈徵八上 志第十七》

"정시(북위 선무제) 2년(505) 2월 계묘일에 양뿔 모양을 한 검은 바람이 유현진에서 생겨나 높이 솟았는데 1경(약 2만 평)의 땅을 모두 덮는 규모였는데 지나가는 곳의 나무를 뽑아버렸다 . (그 바람은) 갑진일에 영주에 이르러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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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시절의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는 위서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로 한두 달이 멀다하고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

북위는 장수왕부터 요해제군사라는 작위를 주고 있으며 고구려가 백제로 가는 길목을 막음에도 그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으며 그 전에 북연을 정벌할 때에도 북연에 대한 고구려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침략하기 전에 미리 알려줬고 고구려가 화룡성의 재물을 미리 차지하고 그곳 주민들을 데려간 후에 진군했으며 풍홍을 돌려주지 않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아주 친밀했다.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북위는 고구려 방향의 동북쪽이 아니라 유연 방향의 서북쪽에 소위 6진을 설치하여 유연의 침입에 방비하였다.

영주는 그 목적이 군사적 목적하에 국경밖의 종족들을 화전양면술로써 제무하여 침입을 대비하는 것에 있다.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
동북방 제종족 및 제국가에 대한 고구려의 종주권을 인정한 북위의 일관된 태도,
군사시설을 유연과의 연접지에 새롭게 조성한 사실 등으로 볼 때에

낙양 천도와 6진 설치 후의 북위의 영주는 현 장가구시 연경구 방면으로 교치됐던 것이 분명한 것이다
감방친구 19-03-18 18:29
 
그렇다면 화룡의 위치, 즉 북연 멸망 후 북위가 진을 두었다가 곧이어 영주 치소를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화룡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거란의 서쪽 국경을 따라 화룡에 도달했다"

즉 상기 지도상 F 위치(현 적봉시), 또는 이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고북구 방향으로 진행한 일선상에 물길 사신 을력지가 도착한 화룡이 있었고,

낙양 천도와 6진 설치를 전후하여 이곳(F)에서 505년 기상현상 기록에 등장하는 영주의 위치인 현 장가구시(북위 연주) 방면으로 영주 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백운 19-03-18 19:13
 
적봉시가 그나마 가슴에 와 닿는군요.
한족들이 제멋대로 써놓은 소설속에서 진실을 찾아내시고자 하는 그 열정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어쩌면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 반복되어 지치실수도 있는 데 한 가닥 응원의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훌륭하신 의견 잘 보았습니다.
     
감방친구 19-03-18 19:42
 
고맙습니다
Attender 19-03-18 22:00
 
감방친구님, 기운차리셨군요...
힘내세요, 언제나 응원합니다....
칼리S 19-03-18 22:10
 
고구려의 대중 방어선(즉 고구려 서쪽 변경의 성들, 유명한 요동성 포함)이 현 학설과 달리 요서지역에 있다면, 왜 고구려성의 잔재가 보이지 않을까요? 현 요하 이동에는 고구려성의 유적들이 많이 보입니다.

머 고구려성곽 유적들이 훼손되서 현 요서지역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럼 고구려 멸망기의 평양성이 현 요양과 본계시 일원이라면, 백제 멸망 이후(662년 초) 당의 고구려 정벌시에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보급부대의 이동경로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무왕2년(662년)의 삼국사기 기사는 사실상 조작이라고 해야겠죠. 아니면 그 당시 신라의 북방이 현 압록강이라면 또 모르겠네요. 고구려가 사실상 한반도 밖의 요동국가였나보죠?
     
감방친구 19-03-18 23:14
 
님은 제가 지난 2년 간, 무수히, 집요하게, 계속하여 댓글과 발제글로 고찰한 것들을 제대로 보지 않으셨네요

그리고 다른 분들이 신라 보급라인부터 오골성 전투까지 여러차례 댁 또는 다른 이들 반박에 상세히, 수차례 설명한 것도 보지 않으셨고요

중국과 수교 이후 댁이 추종하는 강단주류사학계에서 중국현지 답사를 통해 북진시 일대를 비롯한 현 요하 서쪽에서 고구려성 유적이나 기와조각들을 발견하여 언론지상에 대중적으로 널리 연재되기도 수차례였던 것도 전혀 모르고 있고요

하여 강단주류사학계에서 소극적으로나마 북위, 또는 수나라 때에 현 대릉하 동부, 또는 진저우시 일대까지 영토로 하였다고 영역지도에 새롭게 반영하고 있는 현실이나

수나라 1차 침략에서의 대승 이후 현 조양시(통설에서 영주 유성으로 비정)까지 영역으로 삼았다는 것 역시 학계에서는 통설화하였다는 것도 모르시고요

삼국사기부터 제발 한번이라도 완독하시고 정신 차리세요
     
신수무량 19-03-19 09:17
 
예전에 수나라 쫄병들이 180켈로 하루밤낮만에 도주했다고 했던 분이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신지...이해가 안되는군.
삼국사기 초기기록이나 믿고서 댓글 다시오..
아니면 댁나라 역사에나 관심가지시라니까..왜 우리나라역사를 그리 깎아내리면서 관심이실까 몰라...
          
칼리S 19-03-19 12:03
 
수나라 병사들이 다 도망갔나요? 도망친 숫자가 얼마 안 된다는건 결국 일반 병졸들이 다 도망간게 아니라, 기병 위주의 기동력이 있는 쪽만 도망친거죠. 무슨 보병들이 다 도망친걸로 착각하지 마세요. 그러니깐 그 거리가 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김유신의 부대는 군량 수송이 주가되는 부대로 그 속도가 형편없이 느리죠. 당연히 적지이니깐 특히나 그렇고요.

삼국사기 지명만 봐도, 칠중하, 장새 이런 지명들은 국내지명들입니다. 그 지명과 거리들만 봐도 삼국사기 고구려 멸망기의 평양은 결코 요양지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통설에서는 적어도 고구려 성곽유적들과 사료를 통합해서 위치비정을 합니다만, 위의 위치지정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만 근거해서 사료를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위치비정을 하죠. 당연히 그 위치에는 고구려의 성곽 유적이 없고요.

현 요하 서쪽에는 고구려 성곽 유적이라고 할 정도로 뚜렷한 곳은 없습니다. 반면에 요하 동쪽 지역에는 많죠.

수, 당이 점유하지 못했으니 그 공간은 다 고구려가 지배했다는 거 자체가 무식한 소치입니다. 고구려 비롯해서 삼국은 다 성을 기반으로 통치했기에 성곽유적이 중요한 겁니다.

진출했다고 해서 지배한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고구려만 봐도 위나라나 선비족에게 도성이 털렸지만, 그들은 고구려 땅을 통치하지 않고 돌아가죠. 몽골만 봐도 고려 영토를 헤집어놨어도 결국 통치는 하지 않았습니다(아니 못한거죠) 일시 그 지역을 공격해서 성공했다고 영토화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수, 당의 통치군현만 가지고, 고구려의 서쪽영역을 정한다는건 오류죠. 그리고, 당장 삼국사기의 작자 김부식은 평양성을 고려 서경 지금의 평양 인근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를 머 다시 보라니요 ㅋㅋㅋ. 애당초 작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아니라고 우길려면 본인이나 제대로 통독하시길.

어차피 학계에서 인정도 못 받고, 그냥 개인 취미생활 하는거 말릴 생각 없습니다만, 시간이 아까우실거라서 한 마디 적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여기는 요동성이요 안시성이요 신성이요 이렇게 찍어대면 누가 인정합니까? 당장 점 찍은 곳에 가면 고구려 성곽 유적이 아예 없는데 말입니다.
               
Attender 19-03-19 13:12
 
"현 요하 서쪽에는 고구려 성곽 유적이라고 할 정도로 뚜렷한 곳은 없습니다. 반면에 요하 동쪽 지역에는 많죠. "

저도 참 아까운게 칼리S님의말씀처럼 열심히 감방친구님께서는 사서연구를 통하셔서 위치를 비정하는것 까지 다 좋지만, 문제는 성곽유적이 요서지방에 흔하지가 않다는게 너무나도 아깝습니다...

사서가 말을 해줘도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니 너무나도 슬픈현실입니다....
               
포테이토칩 19-03-19 16:44
 
유적과 사료를 분석해서 위치비정???
비사성이 대련이란 근거는요?
안시성은요??

그리고 고구려 방어선유적 잔존이 제가 알기론

백암성 안시성 비사성 개모성 정도
신성 남소성 유적은 어디에 있나요???
                    
칼리S 19-03-19 20:26
 
비사성은 대흑산산성
안시성은 영성자산성 또는 해룡천산성
신성은 고이산성
남소성은 철배산성 또는 비아랍성(구로성) 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추정이고, 적어도 이렇게 유적지를 근거로 사료와 같이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료가 매우 빈약한 상황에서 이러한 고고학적 실증연구가 병행되지 않는한 인정받는건 힘들다는 겁니다.
                         
감방친구 19-03-19 21:28
 
아니 그러니까
거기가 비사성이라고 한 사서를 대보라니까?
                         
위구르 19-03-19 23:41
 
저 장애인하고 말을 섞는게 시간 낭비입니다. 차라리 무시하시는게 나을듯
영종햇살 19-03-18 22:39
 
감방친구님이 비정한 신성의 위치가 맞다면 대청광여도의
순천부(북경) 남쪽의 신성은 무엇일까요?
http://blog.daum.net/sabul358
광서순천부지(1884)에도 북경밑에 신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9-03-18 22:57
 
신성은 석성과 마찬가지로 여러곳에 존재했습니다
신성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만 해도 두 곳, 혹은 세 곳의 동명이처가 나타납니다

즉 이렇게 동명이처가 지근 거리가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나타날 때에는 보다 확실한 기준점을 잡고서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고구려 말기 당나라와의 전쟁사에 등장하는 신성이지요

/요수/
            ㅡ 요동성/개모성/신성
            ㅡ 백암성
            ㅡ 안시성/건안성
            ㅡ 오골성
/오골강/
            ㅡ 비사성
/압록강/
ㅡ 박작성                                     
ㅡ 평양
/패수/


고구려 방어선
1차 방어선 ㅡ 거란
2차 방어선 ㅡ 요수
3차 방어선 북부 라인 ㅡ 요동, 현도, 개모, 신, 백암
3차 방어선 남부 라인 ㅡ 안시, 건안, 오골
4차 방어선 ㅡ 압록강
5차 방어선 ㅡ 살수
해안 방어선 ㅡ 비사, 박작, 패수

비사성 구원성 ㅡ 안시, 건안
박작성 구원성 ㅡ 건안, 오골

이상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라본기, 자치통감, 신당서 등에 나타난 윤곽입니다
     
감방친구 19-03-1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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