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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25 08:58
[한국사] 구당서와 신당서에서의 냉형(冷陘/冷硎)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537  

※ 마음이 번잡스럽고, 생업 탓에 시간에 늘 쫓겨서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바 냉형 고찰의 경우도 우선 관련 사서 내용을 붙이고 후에 이를 시각화함으로써 취합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광개토대왕부터 멸망 직전까지 고구려 영토의 서쪽 한계선을 추적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동반 탐문자들께서는 고구려의 서쪽에 이중으로 복속돼 있던 거란의 영역을 고찰하여 고구려 서쪽 한계선을 추정하고자 하는 것임을 염두하고 사서 기록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 하기 국역은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 해석본을 붙이는 바이다.


1. 구당서


《卷二百一十二 鐵勒契丹奚室韋靺鞨渤海靺鞨霫烏羅渾》

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東與高麗鄰,西與奚國接,南至營州,北至室韋。冷陘山在其國南,與奚西山相崎,地方二千里。逐獵往來,居無常處。其君長姓大賀氏。勝兵四萬三千人,分為八部,若有徵發,諸部皆須議合。不得獨舉。獵則別部,戰則同行。本臣突厥,好與奚斗,不利則遁保青山及鮮卑山。其俗死者不得作塚墓,以馬駕車送入大山,置之樹上,亦無服紀。子孫死,父母晨夕哭之;父母死,子孫不哭。其餘風俗與突厥同。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 살았는데, (이 곳은) 선비(鮮卑)의 옛 땅으로 (당의) 경성(京城)에서는 동북으로 오천삼백 리 (떨어져) 있다. 동으로는 고려(高麗)와 이웃하였고 서로는 해국(奚國)과 접했고 남으로는 (당의) 영주(營州)에(까지) 도달하고 북으로는 실위(室韋)에 도달했다. 냉형산(冷陘山)은 그 나라의 남쪽에 있었는데 해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산길이 험준하였고 (그 길이 지나는) 지방은 이천 리였다.


(그들은 가축을) 쫓아 사냥하고 왕래하여 거처는 정해진 곳이 없었다. 그(들의) 군장(君長)의 성씨(姓)는 대하씨(大賀氏)였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병사(勝兵)가 사만삼천 명 있었는데 나누어 팔부(八部)로 삼았고 만약 징발(徵發)이 있으면 여러 부락이 모두 모름지기 모일 것을 의논했고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냥을 할 때는 부(락으로 단위)를 나누었으나 전투를 할 때는 함께 움직였다. 본래 돌궐(突厥)에 신속(臣屬)하고 해와는 전투하기를 즐겼는데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청산(靑山) 및 선비산(鮮卑山)으로 달아나 의지하였다.


그들의 풍속에는 죽은 자(를 위해서)는 무덤(塚墓)을 만들지 않았고, 말(이 끄는) 수레로 (시체를 싣고) 대산(大山)에 들어가 시체를 나무 위에 놓았으며 또한 상복을 입지[服紀] 않았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자손은 곡을 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 풍속은 돌궐(突厥)과 같았다.


延和元年,左羽林將軍、檢校幽州大都督孫儉,率兵十二萬以襲其部落,師次冷硎,前軍左驍衛將軍李楷洛等與大輔會戰,我師敗績。儉懼,不敢進救,遣使矯報大輔云:「我奉敕來此招諭蕃將,李楷洛等不受節度而輒用兵,請斬以謝。」大輔曰:「若奉敕招諭,有何國信物?」儉率軍中繒帛萬餘段並袍帶以與之。大輔曰:「將軍可南還,無相驚擾。」儉軍漸失部伍,大輔乃率眾逼之,由是大敗,兵士死傷者數萬。儉及副將周以悌為大輔所擒,送於突厥默啜,並遇害。



연화(延和) 원년(당 예종, 712),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검교유주대도독(檢校幽州大都督) 손검(孫儉)이 병사 십이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의 부락을 습격하려고 군대가 냉형산(冷硎)에서 유숙하며 전군좌효위장군(前軍左驍衛將軍) 이해락(李楷洛) 등이 대보와 만나 전투를 벌였으나 우리 군사가 크게 패했다. (그러자 손)검(儉)이 두려워하며 감히 진격해 구원하지 못하고 사자를 보내 대보에게 거짓으로 고하여 말하기를, “내가 조칙을 받들고 여기에 와서 번장(蕃將)을 초유(招諭)하려 했으나 이해락 등이 (나의) 명령을 받지 않고 함부로 병사를 부리니 청컨대 (그를) 참수하여 사죄코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보가 말하기를, “만약 (황제의) 칙을 받들고 와서 (우리를) 초유하려 한 것이라면 (그대들의) 나라에는 (우리에게 줄) 어떤 영묘한 물건(信物)이 있소?”라고 하였다. 검이 군대 중에 있던 증백(繒帛) 만여 단(段)과 함께 포대(袍帶)를 가지고 나와 그에게 주었다. 대보가 말하기를, “장군이 남쪽으로 돌아갈 수 있으나, 서로 놀라게 하거나 소요를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손)검의 군대가 점차 군대의 대열(部伍)을 잃어버리자 대보가 곧 무리를 이끌고 그들을 위협하니 이로 말미암아 (손검의 군대는) 크게 패했고 병사 (중의)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다. 검 및 부장(副將) 주이체(周以悌)는 대보에게 사로잡혀 돌궐(突厥)의 묵철에게 송환되어 모두 죽임을 당했다.




2. 신당서


《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


1)거란


契丹, 本東胡種, 其先爲匈奴所破, 保鮮卑山. 魏靑龍中, 部酋比能稍桀驁, 爲幽州刺史王雄所殺, 衆遂微, 逃潢水之南, 黃龍之北. 至元魏, 自號曰契丹. 地直京師東北五千里而贏, 東距高麗, 西奚, 南營州, 北靺鞨·室韋, 阻冷陘山以自固.


射獵居處無常。其君大賀氏,有勝兵四萬,析八部,臣於突厥,以為俟斤。


凡調發攻戰,則諸部畢會;獵則部得自行。與奚不平,每斗不利,輒遁保鮮卑山。風俗與突厥大抵略侔。死不墓,以馬車載尸入山,置於樹顛。子孫死,父母旦夕哭;父母死則否,亦無喪期。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위(魏) 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그들이 살던) 땅은 (당나라)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실위(室韋)와 (인접해 있었고), 냉형산(冷陘山)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君]는 대하씨(大賀氏)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에 신속하고 사근(俟斤)이 되었다.


무릇 (병사를) 징발하여 전쟁을 할 때에는 여러 부락(部)이 모두 모였고, 사냥을 할 때에는 부락(部)이 (그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해(奚)와는 (서로) 불만스럽게 생각해 매번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번번이 선비산(鮮卑山)으로 도망쳐 의지하였다. (그들의) 풍속은 돌궐(突厥)과 대체로 같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고 산으로 들어가 나무 꼭대기에 두었다. 자손이 죽으면 부모가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으나 부모가 죽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한 상복(喪)을 입는 기간(喪期)도 없었다.



2) 해


奚亦東胡種, 爲匈奴所破, 保烏丸山. 漢曹操斬其帥蹋頓, 蓋其後也. 元魏時自號庫眞奚, 居鮮卑故地, 直京師東北四千里. 其地東北接契丹, 西突厥, 南白狼河, 北霫.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에 의지했다. 후한(漢)의 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북쪽으로는 습(霫)과 접해 있었다.


其國西抵大洛泊, 距回紇牙三千里, 多依土護眞水. 其馬善登, 其羊黑. 盛夏必徙保冷陘山, 山直嬀州西北. 至隋始去「庫眞」, 但曰奚.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닿았고 회흘(回紇)의 본영[牙]과의 거리는 삼천 리였는데, 토호진수(土護眞水)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말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잘했고 그들의 양은 검은 색이었다. 한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陘山)으로 옮겨 가 의지했고 (그) 산은 규주(嬀州)의 서북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수(隋)에 이르러 비로소 (그들의 이름에서) 고진(庫眞)을 빼고 단지 해(奚)라고만 하였다.


顯慶間可度者死,奚遂叛。五年,以定襄都督阿史德樞賓、左武候將軍延陀梯真、居延州都督李含珠為冷陘道行軍總管。明年,詔尚書右丞崔餘慶持節總護定襄等三都督討之,奚懼乞降,斬其王匹帝。萬歲通天中,契丹反,奚亦叛,與突厥相表裏,號「兩蕃」。延和元年,以左羽林衛大將軍幽州都督孫佺、左驍衛將軍李楷洛、左威衛將軍周以悌帥兵十二萬,為三軍,襲擊其部。次冷陘,前軍楷洛與奚酋李大酺戰不利。佺懼,斂軍,詐大酺曰:「我奉詔來慰撫若等,而楷洛違節度輒戰,非天子意,方戮以徇。」大酺曰:「誠慰撫我,有所賜乎?」佺出軍中繒帛、袍帶與之。大酺謝,請佺還師,舉軍得脫,爭先無部伍,大酺兵躡之,遂大敗,殺傷數萬。佺、以悌皆為虜禽,送默啜害之。朝廷方多故,不暇討。



현경 연간(당 고종, 656~661), 가도자(可度者)가 죽자, 해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현경) 5년(660), 정양도독(定襄都督)인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좌무후장군(左武候將軍)인 연타체진(延陀梯眞)·거연주도독(居延州都督)인 이함주(李含珠)를 냉형도행군총관(冷陘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 다음 해 조칙을 내려 상서우승(尙書右丞) 최여경(崔餘慶)을 지절총호정양등삼도독(持節總護定襄等三都督)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려하자 해가 두려워하며 항복하기를 청했으나 (당은) 그들의 왕인 필제(匹帝)를 참수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측천무후), 거란(契丹)이 반란을 일으키자 해 또한 배반하여 돌궐(突厥)과 서로 표리(表裏)를 이루었는데 (그들을) 불러 ‘양번(兩蕃)’이라 했다.


연화(延和) 원년(당 예종, 712), 좌우림위대장군(左羽林衛大將軍)이자 유주도독(幽州都督)인 손전(孫佺)·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인 이해락(李楷洛)·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인 주이체(周以悌)에게 병사 십이만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그들의 부락(部)을 습격하게 했다. (그 군대가) 냉형(冷陘)에서 유숙(留宿)하고 있었을 때 전군장군(前軍)인 해락이 해의 우두머리(酋)인 이대포(李大酺)와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전(佺)이 두려워 군대를 거두고 대포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조칙을 받들고 와서 그대들을 위무(慰撫)하려 했으나 해락이 명령을 어기고 함부로 전투에 임했으니 (이는) 천자의 뜻이 아니므로 바야흐로 (그를) 주륙함으로써 (그대들에게) 보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포가 말하기를, “진심으로 나를 위무하고자 한다면 (나에게) 줄 것이 있소?”라고 하였다. 전이 군중에 (있던) 증백(繒帛)과 포대(袍帶)를 꺼내 와서 그에게 주자 대포가 감사해 하며 전이 군대로 되돌아가 군사를 들어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전의 군사가) 앞다투어 (나아가 군대의) 대오가 없어지자 대포의 병사들이 (그들을) 뒤쫓아 마침내 크게 패했고 살상자가 수 만 (명)에 이르렀으며 전과 이체 모두 포로로 잡혔고 묵철에게 송환되어 해를 입었다. (당) 조정은 바야흐로 (여러 가지) 사건이 많아 (그들을) 토벌할 겨를이 없었다.



3) 712년, 냉형 전투


《列傳第一百四十上 突厥上》

長安三年,遣使者莫賀達干請進女女皇太子子,後使平恩郡王重俊、義興郡王重明盛服立諸朝。默啜更遣大酋移力貪汗獻馬千匹,謝許婚,後渥禮其使。


中宗始即位,入攻嗚沙,於是靈武軍大總管沙吒忠義與戰,不勝,死者幾萬人,虜遂入原、會,多取牧馬。帝詔絕昏,購斬默啜者王以國、官諸衛大將軍。默啜殺我行人鴻臚卿臧思言,詔左屯衛大將軍張仁亶為朔方道大總管屯邊。明年,始築三受降城於河外,障絕寇路。久之,以唐休璟代屯。


睿宗初立,又請和親,詔取宋王成器女為金山公主下嫁。會左羽林大將軍孫佺等與奚戰冷陘,為奚所執,獻諸默啜,默啜殺之,更以刑部尚書郭元振代休璟。


장안(長安) 3년(703)에 (묵철이) 사자 막하달간(莫賀達干)
을 보내 (그의) 딸을 바쳐 황태자(皇太子)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것을 청하자 (무)후가 평은군왕(平恩郡王) 중준(李重俊)과 의흥군왕(義興郡王) 중명(李重明) 으로 하여금 옷을 잘 갖추어 입게 하고 조당에 서 있게 했다. 묵철이 다시 대추 이력탐한(移力貪汗)을 보내 말 천 필을 바치며 혼인을 허락한 것에 감사하자 (무)후가 후한 예로 그 사자를 접대했다.


중종이 막 즉위하자 (묵철이) 쳐들어와 (영주) 명사현(鳴沙縣)를 공격하자 이에 영무군대총관(靈武軍大總管) 사탁충의가 (그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해 죽은 사람이 몇 만 명이나 되었으며 (승세를 탄) 적이 마침내 원주(原州)와 회주(會州)까지 들어와 기르는 말을 많이 잡아갔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혼인을 끊으라고 하고 묵철을 베는 자를 국왕(國王)에 봉하고 제위(諸衛)의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한다는 현상금을 걸었다.묵철이 우리의 사자인 홍려경 장사언(臧思言)을 죽이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 장인단을 삭방도대총관으로 삼아 변경에 주둔하게 하고 그 이듬해 마침내 세 곳의 수항성(受降城)을 황하 밖에 쌓아 공격의 통로를 막게 했다. 얼마 있다가 당휴경(唐休璟)을 (장인단을) 대신해 주둔하게 했다.


예종(睿宗) 즉위 초에 (묵철이) 다시 화친을 청하자 조칙을 내려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의 딸을 데려다 금산공주(金山公主)로 삼아 (돌궐에) 시집보내라고 했다. 마침 좌우림(위)대장군(左羽林衛大將軍) 손전(孫佺) 등이 해(奚)와 냉형(冷陘山)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해에게 잡혀 여럿이 묵철에게 보내졌고, 묵철이 (이들을) 죽여버리자 (조정에서) 다시 형부상서(刑部尙書) 곽원진(郭元振)으로 하여금 (당)휴경을 대신하게 했다.


《本紀第五 睿宗 玄宗》

先天元年正月辛未,享於太廟。甲戌,並、汾、絳三州地震。辛巳,有事於南郊。戊子,耕籍田。己丑,大赦,改元曰太極。賜內外官階、爵,民酺五日。版授九十以上下州刺史,八十以上上州司馬。辛卯,幸安福門,觀酺三日夜。壬辰,陸象先同中書門下三品。乙未,戶部尚書岑羲、左御史臺大夫竇懷貞同中書門下三品。二月丁巳,皇太子釋奠於國學。是春,旱。五月戊寅,有事於北郊。辛巳,大赦,改元曰延和。賜內外官陪禮者勛一轉,民酺五日。六月癸丑,岑羲為侍中。乙卯,追號大聖天後為天后聖帝。辛酉,刑部尚書郭元振為朔方道行軍大總管,以伐突厥。甲子,幽州都督孫佺、左武衛將軍李楷洛、左威衛將軍周以悌及奚戰於冷陘山,敗績。七月辛未,有彗星入於太微。兵部尚書李迥秀為朔方道後軍大總管。乙亥,竇懷貞為尚書右僕射、平章軍國重事。己卯,幸安福門觀樂,三日而止。丙戌,以旱減膳。八月庚子,立皇太子為皇帝,以聽小事;自尊為太上皇,以聽大事。壬寅,追號天后聖帝為聖後。甲辰,大赦,改元,賜內外官及五品以上子為父後者勛、爵,民酺五日。丁未,立皇太子妃王氏為皇后。戊申,封皇帝子嗣直為剡王,嗣謙郢王。己酉,宋王成器為司徒。庚戌,竇懷貞為尚書左僕射,劉幽求守尚書右僕射:同中書門下三品;魏知古為侍中,崔湜檢校中書令。戊午,流劉幽求於封州。九月丁卯朔,日有食之。甲午,封皇帝子嗣升為陜王。十月辛卯,獵於驪山。十一月丁亥,誥遣皇帝巡邊。甲午,幽州都督宋璟為左軍大總管,並州長史薛訥為中軍大總管,兵部尚書郭元振為右軍大總管。



《列傳第三十一 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

子佺,延和初,為羽林將軍、幽州都督,率兵十二萬討奚李大酺,分三屯,以副將李楷洛、周以悌領之。次冷硎,楷洛與大酺戰,不勝,壯校多沒。佺氣褫,乃紿言:「天子詔我招慰奚,楷洛違詔妄戰,當斬。」遣人謝大酺。大酺曰:「審爾,願出天子賜,明不欺。」佺揪聚軍中幣萬餘匹,悉袍、帶並與之。大酺知佺詐,好語勸引還,而佺部伍離沮,奚逼之,大敗,死者數萬。佺、以悌同見獲,送默啜所殺之。



4) 백습


《列傳第一百四十二下 回鶻下》

白霫居鮮卑故地,直京師東北五千里,與同羅、僕骨接。避薛延陀,保奧支水、冷陘山,南契丹,北烏羅渾,東靺鞨,西拔野古,地圓袤二千里,山繚其外,勝兵萬人。業射獵,以赤皮緣衣,婦貫銅釧,以子鈴綴襟。其部有三:曰居延,曰無若沒,曰潢水。其君長臣突厥頡利可汗為俟斤。貞觀中再來朝,後列其地為寘顏州,以別部為居延州,即用俟斤為刺史。顯慶五年,授酋長李含珠為居延都督。含珠死,弟厥都繼之。後無聞焉。


백습(白霫)은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경사로부터 동북쪽으로 5천 리 떨어져 동라, 복골과 접해 있었다. 설연타를 피해 오지수(奧支水)와 냉형산(冷陘山)에 살았는데, 남쪽으로 거란, 북쪽으로 오라혼(烏羅渾), 동쪽으로 말갈, 서쪽으로 발야고와 [접했고], 땅의 둘레 길이가 2천 리로 산이 그 밖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정예 병사가 만 명이었다. 사냥을 생업으로 했으며, 붉은 가죽으로 옷의 가장자리를 만들고 부인들은 구리 팔찌를 끼고 작은 방울로 옷깃을 꿰었다. 그 부락은 셋이었는데, 거연(居延), 무약몰(無若沒), 황수(潢水)라고 했다. 그 군장은 돌궐힐리가한에게 신속해 사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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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2-27 02:06
   
구당서 거란전 정리(동북아역사넷 국역본)

1.
거란(契丹)은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에 살았는데, (이 곳은) 선비(鮮卑)의 옛 땅으로 (당의) 경성(京城)에서는 동북으로 오천삼백 리 (떨어져) 있다.

2.
동으로는 고려(高麗)와 이웃하였고 서로는 해국(奚國)과 접했고 남으로는 (당의) 영주(營州)에(까지) 도달하고 북으로는 실위(室韋)에 도달했다.

3.
냉형산(冷陘山)은 그 나라의 남쪽에 있었는데 해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산길이 험준하였고 (그 길이 지나는) 지방은 이천 리였다.
     
감방친구 19-02-27 02:27
   
1> 위서와 수서 분석을 통해서 황수(현 시라무렌강) 북쪽, 대흥안령 남부의 동남쪽에 살던 거란이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켜 소위 '요해를 연' 이후 북위의 국경을 드나들며 북위와 교류를 하였고 주로 화룡과 밀운 사이에서 교역을 하였으며 이후 화룡의 북쪽, 황수의 남쪽에 거주하며 도적질을 하였는데 479년 고구려가 물길과 백제의 연합을 계기로 현 타루하 발원처에 있던 지두우를 유연과 분할하며 거란을 공격하자 거란의 일부세력이 북위에 보호를 요청하였고 북위는 백랑수 동쪽(위서), 또는 백비하(수서)에 머물게 하였다. 그후 다시 화룡 북쪽, 황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 등을 지난 고찰에서 깊이 다룬 바 있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게 수나라 때까지도 계속되는데 이들은 위서, 수서, 통전 교차에 따르면

화룡 북쪽, 황수 남쪽
또는
요서 북쪽  200 리, 동서 500리, 남북 300 리 지역으로

현 시라무렌강과 로합하 사이의 땅에 해당한다
     
감방친구 19-02-27 02:32
   
2> 유연, 돌궐, 위구르, 철륵 등의 활동 등 국제 정세의 변화로 7~8세기에 본래 지두우-습 지역에 있던 백습뿐만 아니라 하얼빈 북서쪽에 있었던 실위까지 현 시라무렌강 중상류 지역까지 남하한다

한편
지방 2천 리는 7세기 정보이다
대하씨는 7세기 거란 우두머리 성씨이다
대하굴가가 당 태종에게 복속해 이씨 성을하사받고 송막도독부가 설치된다
고구려는 굴가의 배신으로 굴가의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한다

"(그들은 가축을) 쫓아 사냥하고 왕래하여 거처는 정해진 곳이 없었다. 그(들의) 군장(君長)의 성씨(姓)는 대하씨(大賀氏)였다. "
     
감방친구 19-02-27 02:36
   
3>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의 이 국역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난 고찰에서 지적한 바 있다

올바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냉형산(冷陘山)은 그 나라의 남쪽에 있는데 해의 서산(西山)과 서로 (이어져 있어) 산길이 험준하였다. (거란의) 지방(영토)은 이천 리였다."

이 정보는 7세기  정보와 9세기 말 정보가 섞였다.
서산은 현  북경시 서쪽, 태행산맥 북단을 가리킨다.
해는 거란에 복속돼 버리는데 해의 수장 거제가 일부 무리를 이끌고 현 장가구시에 있던 규주로 옮겨가 당시 유주 지역을 관할하던 유수광에게 의지한다.
감방친구 19-02-27 03:22
   
신당서 거란전(동북아역사넷 국역본/이하 생략)


1.
거란(契丹)은 본래 동호(東胡)의 (한) 종류로 그 선조가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선비산(鮮卑山)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위(魏) 청룡(靑龍) 연간(233~237), 부족의 우두머리(部酋)인 비능(比能)이 조금 사납고 교만했으나 (조위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에게 살해되자

2.
무리는 마침내 쇠잔해져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으로 도망쳤다.

3.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를 거란이라 불렀다.

4.
(그들이 살던) 땅은 (당나라)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오천 리에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려(高麗)와 떨어져 있었고, 서쪽으로는 해(奚), 남쪽으로는 영주(營州),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실위(室韋)와 (인접해 있었고),

5.
냉형산(冷陘山)이 가로막고 있어 스스로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다.

6.
사냥을 해서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君]는 대하씨(大賀氏)로 승병(勝兵) 4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무리를) 팔부(八部)로 나누어 돌궐(突厥)에 신속하고 사근(俟斤)이 되었다.
     
감방친구 19-02-27 03:35
   
2> 황룡(화룡) 북쪽, 황수 남쪽은 북위 시대인 5세기 말부터 거란이 거주한 지역이다. 거란은 해(고막해)와 함께 최종적으로는 4세기에 모용선비에게 우문선비가 격파되면서 송막지역(현 시라무렌강의 발원처인 평지송림과 대흥안령 남부 일대)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감방친구 19-02-27 03:37
   
신당서 해전

1.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에 의지했다. 후한(漢)의 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2.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3.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북쪽으로는 습(霫)과 접해 있었다.

4.
그 나라의 서쪽은 대락박(大洛泊)에 닿았고 회흘(回紇)의 본영[牙]과의 거리는 삼천 리였는데, 토호진수(土護眞水)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5.
그들의 말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잘했고 그들의 양은 검은 색이었다. 한여름에는 반드시 냉형산(冷陘山)으로 옮겨 가 의지했고 (그) 산은 규주(嬀州)의 서북쪽과 마주하고 있었다.
     
감방친구 19-02-27 03:49
   
5> 거란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특히 연운 16주를 얻어냄에 따라 냉형산의 위치정보가 규주(현 장가구시)의 동쪽, 난하, 조하, 백하의 발원처 일대에서 규주의 서북쪽으로 제시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감방친구 19-02-27 03:50
   
712년 냉형지역(냉형지전)이 있었던 냉형산에 대하여 중국학계에서는 대흥안령 남부로 보고 있다
감방친구 19-02-27 03:52
   
신당서 회홀 백습전


백습(白霫)은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경사로부터 동북쪽으로 5천 리 떨어져 동라, 복골과 접해 있었다. 설연타를 피해 오지수(奧支水)와 냉형산(冷陘山)에 살았는데, 남쪽으로 거란, 북쪽으로 오라혼(烏羅渾), 동쪽으로 말갈, 서쪽으로 발야고와 [접했고], 땅의 둘레 길이가 2천 리로 산이 그 밖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정예 병사가 만 명이었다. 사냥을 생업으로 했으며, 붉은 가죽으로 옷의 가장자리를 만들고 부인들은 구리 팔찌를 끼고 작은 방울로 옷깃을 꿰었다. 그 부락은 셋이었는데, 거연(居延), 무약몰(無若沒), 황수(潢水)라고 했다. 그 군장은 돌궐힐리가한에게 신속해 사근이 되었다.
     
감방친구 19-02-27 04:20
   
이를 실제 시간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ㅡ 남쪽으로 거란, 북쪽으로 오라혼(烏羅渾), 동쪽으로 말갈, 서쪽으로 발야고와 [접했고], 땅의 둘레 길이가 2천 리로 산이 그 밖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정예 병사가 만 명이었다.
ㅡ 동라, 복골과 접해 있었다.

2.
ㅡ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경사로부터 동북쪽으로 5천 리 떨어진 곳에서 설연타를 피해 오지수(奧支水)와 냉형산(冷陘山)에 살았다
ㅡ 그 부락은 셋이었는데, 거연(居延), 무약몰(無若沒), 황수(潢水)라고 했다. 그 군장은 돌궐힐리가한에게 신속해 사근이 되었다.
     
감방친구 19-02-27 04:32
   
백습은 뒤에 해에게 흡수되었다
감방친구 19-02-27 22:43
   
거리 기록

ㅡ 거란 : 경사 동북쪽 5,300 리(구당서), 동북쪽 5,000 리(신당서)

ㅡ 해 : 경사 동북쪽 4,000 리(구당서, 신당서)

ㅡ 습 : 경사 동북쪽 5,000 리(구당서)
ㅡ 백습 : 경사 동북쪽 5,000 리(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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