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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18 17:36
[기타] 발해만 제해권 장악한 백제 북연(國勢) 흡수한 고구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943  

http://shindonga.donga.com/3/all/13/834553/1

백제(百濟)는 21세기의 패권국처럼 제해권을 중시했다. ‘100개의 나루(항구)’라는 나라 이름이 의미하듯 서해와 남해, 보하이만(渤海灣)의 제해권을 장악한 해상왕국이었다. 톈진, 다롄, 후루다오, 탕산, 옌타이, 웨이하이 등의 항구를 품은 보하이만은 예나 지금이나 요충 중 요충이다. 백제는 강력한 해군력을 배경으로 한강 금강 영산강 예성강 유역을 확보한 데서 더 나아가 한때 보하이만 연안의 랴오시(遼西)와 산둥반도 일부를 점령했다. 전기 백제, 즉 한성 백제는 규슈와 주고쿠 등 일본열도에도 진출했다.

‘송서(宋書)’ ‘양서(梁書)’ ‘위서(魏書)’ ‘남사(南史)’ ‘통전(通典)’ 등 중국 역사서는 한결같이 4세기 이후 백제가 랴오시(롼허-다링허 유역)에 진출했다고 기술한다. 해상왕국 백제가 383년 저족(氐族)의 전진(前秦)과 한족(漢族)의 동진(東晉) 간 ‘비수전(淝水戰)’ 이후 전진이 해체되고 모용선비족의 후연(後燕)이 아직 고토(故土)를 회복하지 못했을 무렵 보하이만 항구들을 중심으로 대륙의 몇몇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백제는 해상 근거지를 가진 남만주의 부여계 부족이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세운 나라로서 서해와 보하이만 연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랴오허-다링허 유역과 한강 유역으로 팽창했다. 고구려가 서쪽과 남쪽 2개 방향으로 거의 동시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서진(西晉)이 멸망(317년)한 후 흉노·갈, 선비, 저·강 등 5개 북방민족이 주도하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시작됐으며, 백제는 약해지고, 신라와 가야는 완전한 영토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374~413) 시절 확보한 제해권도 후연, 백제, 가야, 왜에 대한 고구려의 공격적 정책에 큰 도움을 줬다. 



백제와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화북(華北)이 1차로 흉노·갈, 2차로 선비, 저·강 같은 수많은 부족에 의해 점령되는 등 중국이 대혼란에 처한 덕분이다. 이 대혼란기에 수많은 나라가 짧은 기간 화북과 하서회랑 등 각지에서 흥망을 되풀이했다. 이 글의 서술은 다수의 나라 이름 탓에 복잡하다. 이 무렵의 한중관계사(史)를 이해하려면 서술이 복잡하더라도 인내하면서 정독할 필요가 있다.

서진 멸망 후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족이 대이동을 시작했다. 강남으로 이주한 한족이나 화북에 남은 한족 모두 살아남고자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해 향촌 질서를 유지했다.
 
자위단이 촌락 단위로 출현한 것은 183년 황건군 봉기와 관계가 있다. 자위단은 흉노·갈 등 북방민족이 화북 각지를 유린하기 시작한 서진 말에 급증했다. 자위단 구성원들은 지도자를 추대했으며 농지를 개간해 자립 기반을 갖췄다. 지도자인 주공(主公)은 독립국가의 리더 노릇을 했다. 자위단이 형성된 곳은 산간벽지였으며 성벽을 쌓아 외부의 침공에 대비했다. 

한족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을 오(塢), 보(堡), 또는 벽(壁)이라고 일컬었는데, 한족을 공격하려던 북방민족은 각지에서 오, 보, 벽의 저항에 직면했다. 북방민족은 오, 보, 벽의 일부는 함락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오주(塢主)에게 지방관직을 주어 향촌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한족의 자치를 인정한 것이다. 북방민족 국가 내 한족 백성에 대한 지배는 이렇듯 불철저했으며, 그로 인해 지배집단 내부의 작은 문제가 집단 전체의 존망과 연결된 사안으로 확대되는 예가 많았다. 

강남으로 피난한 한족은 화교(華僑)가 돼 동남아계 원주민과 섞이거나 원주민을 높은 산지나 더 남쪽으로 쫓아내고 농경문화를 퍼뜨렸다. 일부는 랴오허 유역이나 내몽골, 하서회랑으로 피난해 그곳의 북방민족과 잡거(雜居)했다. 

북만주가 원주지(原住地)인 모용선비족의 왕 모용준은 갈족이 세운 후조(後趙) 멸망 후 화북으로 진출해 허베이, 허난, 산둥을 포함한 대제국을 세웠다. 모용준의 조부 모용외(269~333)는 동아시아 최초로 유목민을 대상으로 한 부족적 군사조직과 농경민인 한족을 대상으로 한 관료적 행정조직을 분리한 이원체제(二元體制)에 기초해 국가를 다스렸다.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은 후조는 물론, 우문선비·단선비 등 여타 선비족, 고구려·부여 등과 싸우면서 세력을 키운 끝에 337년 다링허 중류 차오양(朝陽)을 수도로 전연(前燕)을 세웠다. 


모용선비족이 확립한 이원체제는 거란(요), 여진(금), 몽골(원), 만주(청) 왕조를 거치면서 군산복합적(軍産複合的) 통치체제로 완성됐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이던 북방민족이 중원을 점령한 후 중원식 관료제도의 효율성을 고유의 군사적 장점과 결합해 백성을 통치한 것이다.  

이 무렵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랴오허 유역을 놓고 다투는 틈을 타 한반도 남서부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고구려로부터 황해도 북부와 강원도 서부를 탈취했다.

전연의 모용준은 후조의 멸망으로 화북이 혼란에 처하자 350년 수도를 베이징 근교 계(薊)로 옮기고 황제를 칭했으며 허베이 남부의 업(鄴)을 점령한 뒤 그곳으로 재(再)천도했다. 전연은 365년 뤄양을 점령했으며 366년 동진(東晉)의 연주(州) 등 화이허 이북 영토를 차지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후조가 멸망한 과정을 꿰고 있었는데 모용선비의 중원 진출이 지나치게 빠른 것을 보고는 전연이 곧 후조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모용외의 서형(庶兄) 모용토욕혼은 모용외와의 불화 끝에 따르는 무리 1700여 호를 이끌고 내몽골과 하서회랑을 지나 칭하이(靑海)로 옮겨갔다. 모용토욕혼은 285년 칭하이호 서쪽의 부사(伏俟)를 중심으로 선비족과 강족을 통합해 유목·농경·상업의 나라 토욕혼을 세웠다. 

갈족의 후조가 혼란에 처하자 저족 수장 포홍은 경쟁 부족인 강족 수장 요익중·요양 부자를 제압한 다음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도참설에 따라 성을 부(苻)로 바꿨다. 부홍의 아들 부건은 부족을 이끌고 원주지인 산시(陝西)로 복귀해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칭했으며 352년 황제에 즉위해 전진(前秦)을 세웠다. 부건이 죽은 후 맹장으로 이름난 그의 아들 부생이 황위를 계승했으나 민심을 잃어 재위 3년 만에 사촌 부견(338~385)에게 살해당했다. 부견은 지모원려(智謀遠慮)의 인물인 한족 왕맹을 기용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부견은 모든 민족을 인의로 대하고 은신으로 회유하면 결국 융합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부견이 국력을 키워나갈 무렵 동진의 장군 환온을 상대로 한 황하 연안 ‘방두 전투’ 전공 문제와 관련해 숙부 모용평의 견제에 시달리던 모용황의 또 다른 아들 모용수(慕容垂)가 전진으로 망명했다. 전연의 기둥 모용각(慕容恪)이 죽은 후 모용평과 공동으로 집정하던 모용수는 방두 전투 승리라는 큰 공을 세웠는데도 시기심 많은 모용평과 가족혼(可足渾) 태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전연의 약점을 파악한 부견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후 370년 9월 왕맹과 곽경에게 6만 대군을 줘 전연을 공격하게 했다. 왕맹은 전연 제1의 군사기지인 태원을 점령한 다음 모용평이 지휘하는 3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수도 업을 포위했다. 371년 봄 업은 함락되고 전연 황제 모용위는 곽경에게 생포돼 장안으로 압송됐다.  


이런 와중에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백제 태자)는 고구려가 전진-전연 전쟁에 관심을 쏟는 틈을 타 북상해 평양 전투(371년)에서 고국원왕을 패사(敗死)시켰다.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울(扶餘蔚)이 부여·고구려·갈족 인질 500여 명과 함께 성문을 열어 전진 군사를 맞아들였다. 부여울이 이끈 부여·고구려인 포로는 모용외, 모용황에 의해 포로가 된 이들이다.  

모용황은 342년 고구려 공격을 계획했다. 동생 모용한이 동쪽의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고 건의한 까닭이다. 모용한은 고구려를 격파한 다음 우문선비를 정벌하고 화북으로 진공하자고 제안했다. 모용황은 주력부대는 산길로, 보조부대는 평지로 진군하는 방법으로 고구려군을 속였다. 소수 병력으로 산길을 방어하던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황에게 대패한 끝에 필마단기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을 점령한 후 왕대비 주씨 등 5만여 명의 포로와 함께 회군했다. 그 과정에서 미천왕의 시신도 도굴해 수레에 싣고 갔다.  

고구려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모용황은 344년 우문선비를 정벌했다. 우문선비의 족장 우문일두귀의 아들 중 하나인 우문릉은 500여 기를 이끌고 탁발선비로 망명했다. 우문릉은 나중에 북주(北周)를 세우는 우문태의 선조다. 우문선비 일부는 모용선비에 편입됐으나 다른 일부는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남아 거란족의 모태가 됐다.

모용선비군은 346년 부여를 공격해 멸망시켰으며 부여왕 현(玄)과 백성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모용황은 부여현을 사위로 삼았는데, 왕맹과 곽경이 업을 함락할 때 부여·고구려·갈족 인질들과 함께 성문을 연 부여울은 부여현의 아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부여울은 전연에 의해 부여가 멸망했기에 전진 군대가 업을 공격할 때 같은 처지이던 고구려와 갈족 인질을 모아 조응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울은 전진에 투항한 후 고구려인 포로가 집단 거주하던 형양의 태수로 임명됐으며 정동장군(征東將軍) 부여왕에 봉해졌다. 부여가 재건된 것이다.  


전진은 373년 동진으로부터 저·강 계열 민족이 다수 거주한 쓰촨(파·촉)과 윈난(남만)을 탈취하고는 378년 창장(長江) 북쪽 지류인 한수(漢水) 연안 요충지 샹양(襄陽)을 점령해 동진에 치명타를 가했다. 전진은 또 탁발선비족의 대(代), 저족의 전구지국(前仇池國), 한족의 전량(前凉)도 멸해 화북을 통일했다. 촉한을 멸한 후 오(吳) 정벌을 앞둔 서진(西晉)과 비슷한 형태로 승승장구한 것이다.  

383년 11월 부견은 모용수 등의 부추김을 받아 부족연합군(部族聯合軍) 87만 명을 이끌고 동진 정벌에 나섰으나 화이허 남쪽 지류인 비수 전투에서 동진 북부군(北府軍) 사령관 유뢰지에게 패했다. 비수전 패전의 영향으로 전진 원정군이 붕괴되자 전진에 강제로 복속됐던 부족들은 하나같이 독립을 시도했다. 

부견은 동진 정벌을 떠나기 전 중신(重臣) 여파루의 아들 표기장군 여광에게 서역 원정을 명했다. 여광은 383년 봄까지 서역 30여 국을 정복했다. 여광은 385년 구자(龜玆)를 점령한 후 계속 서진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회군을 결정했다. 이것이 후량(저족), 북량(저거흉노), 서량(한족), 남량(독발선비족), 서진(걸복선비족) 등 하서회랑의 분열로 이어졌다. 구자에서 후퇴하던 여광은 385년 9월이 돼서야 전진의 비수전 패배와 장안의 혼란, 부견의 죽음을 알았다. 여광은 주천공(酒泉公)을 칭하고 이듬해 후량(後凉)을 건국했으며 387년까지 하서회랑 전역을 제압해 이전에 한족 장무가 세웠던 전량(前凉)의 영역 대부분을 확보했다.

한편 부견에 의해 장안으로 끌려온 모용선비족이 세운 서연(西燕)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강족 지도자 요장은 부견의 질책이 두려워 384년 진왕(秦王)을 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장은 386년 전란으로 텅 빈 장안에 무혈입성해 황제를 칭하고 후진(後秦)을 건국했다. 요장의 아들 요흥은 전진 잔존 세력과 서진, 남량, 후량 등을 모두 굴복시키고 산시와 하서회랑을 통일했다. 후진은 399년 10월 동진이 지배하던 뤄양을 점령해 한수(漢水) 이북 지역 장악을 완료했다. 이때가 후진의 최전성기다. 이후 후진은 탁발선비와의 분수(汾水) 유역 시벽전투에서 대패하고, 왕족 간 분란으로 쇠약해져 동진이 파견한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했다. 장안은 나중에 철불흉노 출신 혁련발발이 세운 하(夏)에 넘어갔다가 마지막으로 탁발선비 북위(北魏)의 손에 들어갔다.  

모용수는 385년 전진군을 이탈한 후 모용선비군 7만 명을 이끌고 허베이의 중산과 업을 중심으로 후연을 세웠다. 후연과 탁발선비의 북위는 원래 후연 우위와 연합관계였다. 북위는 387년 7월 후연의 도움을 받아 오르도스의 철불흉노를 격파했다. 후연과 북위는 391년 7월부터 국경을 접하면서 충돌했다. 후연은 394년 8월 병주의 장자를 근거로 하던 서연을 멸망시키고 산둥과 화이허 이북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때가 후연의 극성기다.


후연과 전진의 잔존 세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385년 7월 후연의 건절장군(建節將軍) 부여암(扶餘巖)이 베이징 근처 무읍에서 4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모용수에게 반기를 들었다. 부여암은 전연의 수도이던 계를 점령한 후 수천 호(戶)를 포로로 삼고 롼허 하류 영지(令支)로 이동해 웅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그해 11월 아들 모용농에게 보기(步騎) 3만을 줘 부여암을 치게 했다. 영지성은 모용농의 맹공에 곧 함락됐으며 부여암은 참살됐다. 이에 앞선 384년 산둥 칭저우(靑州)에서는 벽려혼(辟閭渾)이 전진의 칭저우 자사 부랑을 축출하고 후연에 맞섰다. 동진은 벽려혼을 유주자사로 봉했다. 벽려혼은 제수(齊水) 상류 평원까지 북진해 후연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벽려혼은 후연의 거듭된 공격을 잘 막아내고, 399년 모용덕이 세운 남연(南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약 14년간 산둥에서 세력을 유지했다.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는 투르크-몽골 계통이다. 탁발선비어와 현대 터키어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다싱안링(大興安嶺) 알선동 동굴을 고향으로 하는 탁발선비는 1세기 중엽 원주지를 떠나 3세기에는 내몽골 인산(陰山) 지역까지 남하했다. 이동하는 동안 탁발선비는 흉노, 정령, 오환 등 투르크계 및 몽골계 여러 부족을 흡수해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311년 영가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탁발선비는 남흉노·단선비와 싸우는 한편, 서진과의 주종관계에서 벗어났다. 338년 부족장 탁발십익건은 선비족, 철불흉노족, 귀순해온 한족을 모아 산시의 평성(다퉁)을 중심으로 대(代)를 세웠다. 그러나 대나라는 부견이 보낸 전진군(前秦軍)에 멸망당했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371~409)는 당시 6세의 아이였는데, 전진군의 포로가 됐다. 탁발선비는 비수전 이후 초원으로 돌아온 탁발규를 중심으로 불꽃처럼 다시 일어났다.  


탁발규는 386년 외가 하란부(賀蘭部)의 도움을 받아 대(代)를 부흥시켰다. 후연의 지원을 받아 철불흉노를 격파해 나라의 기초를 세웠으며 396년 국호를 위(魏)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는 한편, 모용수 사후 극단의 내분에 빠진 후연 세력을 다링허 유역 용성으로 축출했다.

탁발규는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가족 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화북의 농업생산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 한다. 계구수전에서 발전한 균전제에 따라 각 농가는 7.7㏊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유목민의 토지 공유 사상이 중국의 토지 제도에 적용된 것이다. 균전제 도입으로 생산력이 회복되자 대나라의 인구는 급증했다. 균전제는 위나라 조조가 꿈꾸던 토지제도를 구현한 측면이 강하다. 군현제가 한족 농경민의 시대이념이었다면 균전제는 북방 유목민의 시대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위는 탁발규의 손자 탁발도 시대에 화북을 통일했다. 탁발도는 외몽골 오르콘까지 출정해 유연(柔然)을 격파함으로써 북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탁발도는 428년 오르도스 통만성을 수도로 하는 철불흉노족 하(夏)를 공격해 황제 혁련창을 사로잡았으며, 431년에는 잔존 세력까지 토멸해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또한 탁발도는 하서회랑의 저거흉노족 북량, 룽시(隴西)의 저족 후구지도 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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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칸 19-02-18 20:02
 
좋은 정보네요.
감방친구 19-02-18 23:06
 
몇 가지 언급을 하자면

ㅡ 모용선비의 용성은 현 대릉하의 조양시가 될 수 없음
ㅡ 그 이전 세력인 공손씨의 현도군이 부산, 즉 현 의무려산 근방에 있었음
ㅡ 모용선비의 용성은 전한 유성현, 또는 그 인근 북쪽에 있었는데 현 적봉시와 평성현 사이임

ㅡ 서진은 멸망한 317년이 아니라 이미 전한 우북평군(과 후한 요서군) 자리에 평주를 새로 설치하고 당빈이 갈석산을 종단점으로 삼아 장성을 보수한 260~280년대 이전부터 현 난하 동쪽에 대한 실질 지배권을 상실한 상태였음

ㅡ 이 난하 서쪽과 현 요하 동쪽에 단선비, 우문선비, 모용선비가 자리하고 있었고 특히 모용부는 끊임 없이 유주로 진출하려 했음

ㅡ 정령은 선비족이 남하하며 흡수한 게 아니라 388년 도무제가 현 몽골 서북부의 고차(고거)국을 정벌할 때에 끌려온 부족

ㅡ 정령은 태무제가 북연을 정벌할 때에 밀운에 있다가 징발되기도 하였음
감방친구 19-02-18 23:11
 
선비족의 시원지는 북위 시절 오락후가 있던 곳으로
대흥안령 최북단, 눈강 상류지역

이 인근에 부여 유민이 세운 두막루국이 있었음

이 두막루국은 원부여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인데 두막루라는 국명 자체가 고토회복을 의미하는 다물과 동원어

무슨 얘기냐
선비족 조상들과 부여인들이 거의 동일한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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