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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10 21:51
[기타] 대방군 관련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109  

대방군(帶方郡)은 중국의 삼국시대의 군벌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본래는 진번군의 일부였으나 기원전 82년낙랑군에 편입되었다가 이때에 분할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대방은 원래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진번군의 현(縣)이었다. 진번군에는 15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기원전 82년에 진번군이 폐지되면서 소속 15개 현 가운데 7개 현만 편입되고 나머지 8개 현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1] 낙랑군은 편입된 진번군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하여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7개 현 가운데 하나가 대방현으로 남부도위의 중심지였다.

낙랑군 일대는 2세기 말에 요동 일대의 군벌 공손탁의 세력에 속했다. 공손탁의 뒤를 이은 공손강은 건안 연간에 (韓)과 (穢)가 강성해지면서 변경을 위협하자 이를 견제하고자 남부도위 관할의 7개 현을 낙랑군에서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고 공손모(公孫模)·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流民)을 막았다. (魏)가 건국된 후 명제(明帝)는 사마의(司馬懿)를 파견하여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였는데, 낙랑·대방에 별도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점령하였다.(238년)

서진(西晋)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으로 서진이 몰락하자 낙랑군과 대방군도 쇠퇴하여 313년에 낙랑군이 고구려에 정복되었고 314년에 대방군도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대방군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가 지배하였다. 이후 요동지역에 자리잡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요서 대릉하 부근에 대방군(帶方郡)을 다시 설치하였다가, 430년 북위(北魏)에 의해 폐지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대방군


본래 이 지방은 고조선에 복속된 진번국()의 땅이었다. 고조선이 멸망된 뒤 한나라 무제()가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이른바 4군 가운데 하나인 진번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중국 군현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진번군은 곧 낙랑군()에 통합되고, 낙랑군은 이곳에 남부도위()를 설치하였다. 2세기 후반 한()·예()의 토착세력이 강성해져서 이 지방을 공격하게 되자 남부도위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20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실상 요동지방()의 지배자가 된 공손강()은 후한()의 헌제() 건안 연간( : 196∼220)에 낙랑군 소속 둔유현( : 지금의 )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대방군은 이때부터 약 1세기 동안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대방·열구( : 지금의 황해도 )·남신( : 지금의 황해도 )·장잠( : 지금의 황해도 )·제해( : 미상)·함자( : 지금의 황해도 )·해명( : 지금의 황해도 ) 등의 7현()을 관할하면서 치소()는 대방현에 두었다. 현재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동남 문정면에 있는 속칭 당토성()은 그 유지()로 추정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방군 [帶方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본인이 발견한 무덤하나 와 당토성이라는 이름이 있는 지역산성이 있어서 대방군이 되버린 황해도
 
<최신 고고학적 보고>
 
먼저 장무이묘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장무이묘가 '황해도=대방군(혹은 대방 지역)'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로 오랫동안 한국 학계에 군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  
 
그런데 그 다른 견해의 근거가 되는 것들이 바로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이 적힌 전돌'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 명문이 적힌 전돌, 그 자체에 주목하고 곧 분석하기 시작했다. 먼저 전돌에 대한 정보가 각 학자들마다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과연 장무이묘에서 출토된 전돌은 정확히 어떤 것들이 있고, 몇 점이 있는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朝鮮古蹟圖譜Ⅰ』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총정리하여 장무이묘 출토 전돌이 총 10점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그 중에는 문자없는 문양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기존에 이걸 지적한 연구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그동안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해당 유구의 출토 유물도 정확하게 몇점이 있는지 파악하지 못 한채 수십년동안 어설픈 자구 해석에만 집착했던 것이었다. 필자 또한 장무이묘에 대해서 기존에 나와 있는 해석과 정보만을 갖고 나름의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주객이 전도된 행동이었는지 이 논문을 보면서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중략 -------
 
문자전의 태토와 색조, 그리고 소성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 저자는 장무이 무덤의 벽돌의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동일한 공인이 일괄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공인 집단, 혹은 복수의 개인이 개별적으로 제작에 관여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급하게 무덤이 만들어 지다보니, 벽돌이 마구잡이로 사용되어
장무이 묘 안의 벽돌에 씌여진 글이 실제 무덤 안치자를 위한 벽돌이 아닐수 있다는 의미이다. 
쉽게말해 장무이의 무덤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냥 마구잡이로 중국에서 벽돌을 수입해서 썼는데, 그 중 5장 정도가 장무이 무덤에서 쓰던것(혹은 쓸것
이)이 사용됐다는 의미이다 (아니면 발굴자가 가져다 놓았든지, 무덤의 상태에 비해 너무 깨끗한 벽돌)  / 
대부분의 벽돌은 무문이었고(딱! 5장 명문벽돌을 찾았다 단지 운으로, 태수 장무이 라는 지석은 없었다)  
그나마도 수집된 벽돌이 정밀하게 발굴, 정리 되지 못한 문제까지 있었다.....즉, 다른곳의 벽돌일 가능성
이 제기된다....(장무이 무덤의 벽돌은 위조된 것 같다, 무덤의 상태에 비해 너무 깨끗했다)
그리고 무덤 양식이......전형적인 고구려식 고분 
고고학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이 고분의 형태이다.  다시말해 장무이묘의 주인은 장무이도 아니고, 냥 황해도 고구려 실력자라는 의미이다   

                                        -------중략-------
 
이 장무이묘가  축조 연대가 353년으로 알려져 있는 석개천장의 동리묘보다 시기가 올라가야 한다는 기존 견해는 수정의 여지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무이묘를 구성하는 많은 속성에서 고구려적인 요소가 있음을 밝히고 그것을 근거로 장무이묘가 4세기 중엽 이후의 고구려 고분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 이처럼 장무이묘가 시기도 4세기 중엽으로 떨어지고, 그 성격도 대방군과 관련된 인물의 고분이 아닌 고구려 고분이라고 한다면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로 보고, 그 치소를 장무이묘에서 가까운 지탑리 토성으로 판단했던 지금까지의 견해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소리가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 식민지고고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너무 겉모습만 단편적으로 판단했다~는 인식 하에 당시의 조사성과를 철저하게 재검토하고, 그 의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중략-------
앞으로 또 어떤 자료들을 발굴해서 새로운 견해들을 내놓을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연구성과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한사군, 낙랑군과 대방군과 같은 민감하고 중요한 사항들이 제대로 처리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정인성 교수


https://joonho1202.blog.me/221234036632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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