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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08 12:05
[기타] 북경에 살던 낙랑사람 조선인 묘 발굴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133  

https://blog.naver.com/john0591/221115217272

*북경에 살던 낙랑사람 한현도

-천안문 남쪽 20km 지점의 낙랑사람 묘
2014년 3월 16일 북경시 문물국은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고대 고분군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모두 129기의 무덤인데, 후한(後漢) 때부터 요(遼)나라 때까지 지배층의 무덤들이 묻혀 있던 것으로 보아서 낙양의 북망산처럼 북경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북경시 문물국은 2개월 반 정도에 걸쳐서 후한 때 묘 7기, 북조(北朝) 때묘 2기, 당(唐) 때 묘 33기, 요(遼) 때 묘 33기를 발굴했다. 그런데 이중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글씨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큰 흥미를 끌었다.
...
“원상(元象) 2년(539) 4월 17일 사망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 명기〔元象 2年4月17日 樂浪郡朝鮮縣人韓顯度銘記〕”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의 묘라는 것이다. 이 발굴결과에 충격 받은 것은 중국이었다.

-북경까지 한국사의 강역이었다(?)는 해석 차단하는 중국
그간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느닷없이 북경에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의 묘와 묘지명이 발견되었으니 당황한 것은 당연하다. 중국에서는 한반도에 거주하던 낙랑군 유민들을 모용씨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북경까지 강제 이주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또 한현도는 조선현에 안치되었던 조선인의 후손이며, 그의 무덤 역시 “강제 이주의 결과물이므로 한국에는 자랑거리가 아니다”라고 경계했다. 북경시 문물국은 이 발굴결과로 한국 학계에서 고대 한국사의 강역이 북경까지 걸쳐져 있었다고 주장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지만 이는 대한민국에 유리한 발굴결과가 나오면 일제히 ‘묵언수행’에 들어가는 한국 내 매국 갱단사학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 우려였다.

-하북성 노룡현에서 북경으로
『위서(魏書)』 ‘세조 태무제(世祖太武帝) 본기’는 “연화(延和) 원년(432) 9월 을묘에 거가(車駕)가 서쪽으로 귀환하면서 영구(營丘)·성주(成周)·요동(遼東)·낙랑(樂浪<wbr />)·대방(帶方)·현토(玄免) 6군 사람 3만 가(家)를 유주(幽州:북경)로 이주시키고 창고를 열어 진휼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태무제가 432년 6군사람 3만가를 북경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이때 평양에 있던 낙랑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조선현을 설치한 후에 조성된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국내 갱단사학계처럼 요동사람 장통이 313년 1천가구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간 것을 평양의 낙랑군이 지금의 요서로 이주했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는다. 북위는 몰라도 1천가구가 모용외에게 간 것을 낙랑군 전체가 옮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미안하게도 『위서』에는 낙랑 등 6군사람을 유주로 옮겼다는 기록만 있지 「유주」 산하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다. 게다가 432년은 고구려 장수왕 20년으로서 고구려의 전성기였고, 북위와는 사이가 좋았으므로 북위 태무제가 평양의 낙랑군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 따위는 발생할 수 없었다. 낙랑군 조선현은 중국의 여러 기록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초기부터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에 있었고, 이때 노룡현의 낙랑 사람 일부를 북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즉, 평양에서 북경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에서 북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의 고백(?)
자 이제 세키노 타다시의 『일기』가 다시 등장할 참이다.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 오전에 죽촌(竹村:타케무라)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 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세키노 타다시 일기』)」

세키노 타다시는 북경에서 낙랑유물들을 적극적으로 사다가 조선총독부에 보냈다. 그리고는 ‘신의 손’이 되어 한반도 북부에서 가는 곳마다 한사군과 낙랑군 유물을 발견하는 기적이 뒤따랐다. 그런데 그는 보고서에서 이런 유물들을 ‘우연히’ 발견했다라고 거듭 써놓았다. 평양일대가 낙랑군이라고 주장했던 세키노는 왜 낙랑 유물들을 평양이 아닌 북경에서 사 모아야했을까? 북경은 지리적으로는 하북성의 일부이자 하북성 내에서 출토된 고고유물들이 거래되던 시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퍼즐들은 하나씩 맞춰보면 맞아 들어간다.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전제에서 맞춰지는 퍼즐들이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평양에서 낙랑유물은 출토된 적도 없고, 거래된 적도 없었다. ‘낙랑군=평양설’은 아직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는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신다’고 믿는 매국 갱단사학이 이른바 ‘정설,통설’로 만든 신화일뿐이다.

[출처] 북경에 살던 낙랑사람 조선인 묘 발굴|작성자 네오


http://www.historyin.org/?act=board&bbs_code=sub03_2&bbs_mode=view&bbs_seq=49


이른바 강단사학계가 믿는 마지막 보루는 고고학이다. ‘한사군=한반도설’이 중국 고대 문헌사료에 의해 모두 부정되자 믿을 곳은 ‘말없는 고고학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일제히 고고학으로 도망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강단사학계의 태두 이병도 박사가 1976년 『한국학보』에 실린 대담에서 자신의 후예들이 고고학으로 도망갈 줄 알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사학도로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문헌을 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말하고 그 다음 문헌적 자료를 말하는데, 이건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요. 고고학은 하나의 보조과학이니까 참고로 해야 하는 것이지 먼저 고고학을 가지고 덤벼서는 안 된단 말예요(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년, 239~240쪽)”
이때 이병도 박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유가 있다. 1964년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가 풍납토성을 시굴 조사한 결과 풍납토성이 1세기 때 초축(初築:처음 축조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고고학 발굴 결과 부정된 것이다. 그 후 이병도 박사를 추종하는 문헌사학자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서 공격하자 김원룡 교수는 자신의 발굴결과를 부인하고 말았다. 이는 이른바 강단사학계가 학자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대사연구가인 황순종 선생이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2015, 만권당)』에서 낱낱이 밝혔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현재 강단사학계가 도망간 고고학은 ‘제국주의 고고학’이란 용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행위이다. 이들이 구세주로 삼는 고고학자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인데, 세키노 타다시는 도쿄공대에서 조가학(造家學:건축학)을 전공하고 1901년 도쿄제대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세키노는 1902년에 한국을 방문했고, 1906년에는 통감부의 초청으로 다시 방한해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 부설 현장인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훗날 세키노 타다시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한사군의 유물”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나타난다. 세키노는 1909년의 2차 조사 때 평양 대동강 유역의 석암리를 발굴했지만 이때만 해도 낙랑유물이라고 특정하지는 못했다. 
최근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2016, 우리역사연구재단)』에서 세키노 타다시 일기를 공개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세키노가 1918년 북경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가를 돌아다니면서 한나라 및 낙랑 유물들을 미친 듯이 사들여 조선총독부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①“대정 7년(1918년) 3월 20일 맑음 북경…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②“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漢代ノ發掘物多ク, 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余極力蒐集ス)

세키노는 한대(漢代)뿐만 아니라 낙랑(樂浪) 출토품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3월 20일은 300원(지금의 1500만원)어치를 샀다고 했는데, 22일에는 얼마치를 샀다고는 하지 않고 ‘한대 및 낙랑 출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고 썼다. 세키노가 총독부 돈으로 북경의 골동품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이 사들여 총독부로 보낸 그 유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유물들이 ‘낙랑=평양설’을 조작하는데 쓰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강단사학자들은 ‘낙랑=평양설’은 100년 전 조선총독부 시절에 논증이 끝난 ‘정설, 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 100년 전 세키노 타다시는 ‘어디 한대(漢代) 및 낙랑 유물 없나?’라고 눈을 부라리며 북경 유리창가를 배회했다. 그리고 지금껏 그를 추앙하는 한국인 후예들은 세키노가 북경의 유리창가를 배회하던 그 심정으로 이 땅을 배회하고 있다. 한국사의 강역과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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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리 19-02-08 14:31
   
좋은 자료네요.
세키노 타다시 일기 에 낙랑유물 관련된 전부 내용 공개해주실수있나요(일본글 버전으로)?
적어도 본문중에 인용된 두개의 문구만이라도 순수한 일본어 버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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