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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03 23:41
[기타] 낙랑에 대한 현재 강단의 입장(통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590  

https://joonho1202.blog.me/221234834462

낙랑군에 대한 강단의 시각(통설): 초기 낙랑군의 상황은 일단 한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조선 지역의 관습법 혹은 자체적 법률이 유지되었으며, 관리를 스스로 충당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는 한의 법률을 시행하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인 죽간들이 발굴되면서 '시도는 했다'는 정도로 정리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몰입(沒入)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자, 급기야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사군의 다른 군현은 임둔, 진번 2군이 폐지되고 현도군이 고구려현의 반발로 후퇴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낙랑은 이 폐지된 군의 관할 구역 중 관리할 여력이 남아 있는 지역을 흡수하면서 한때 인구가 40만이 넘는 성대를 누렸다. 이 때 낙랑은 25개 현을 산하에 두고 함경남도 ~ 강원도 방향의 옛 임둔군 지역인 '영동 7' 지역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방향의 옛 진번군 지역에는 남부도위를 두었는데 이는 이민족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보인다. 도위가 설치된 지역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았다.
 
기원전 1세기 낙랑군은 되도록이면 토착민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현지에 적응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형 동검 문화가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평양 정백동 고분군의 '부조예군', '부조장인' 등의 인장이 발견된 점 등으로 유추한 것이다. 또한 삼한의 군장으로 추정되는 염사치의 귀화 시도 기록이 나타나는 것이나 멀리 있는 진한이 낙랑을 두려워 했다는 기록, 초기 백제와 신라가 낙랑에게 상당한 견제를 당하는 기록 등을 통해 보아 주변국과의 관계 또한 낙랑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른 것으로 보인다.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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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9-02-03 23:44
 
1세기까지 낙랑군은 고구려, 삼한, 왜 등의 사이에서 동방의 외교 창구가 되었고, 주변국에 단조 철기나 칠기(漆器) 등을 전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변국의 유력층에게는 낙랑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이 지위의 상징으로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묘제로는 덧널무덤이 나타난다. 이러한 부를 기반으로 전한 - 신나라 - 후한의 교체기 때인 25년 토인(土人, 토착민 혹은 토착화된 한인) 왕조를 중심으로 태수를 죽이고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중국의 혼란기에 적미의 난의 진원지였던 산둥 반도의 인구가 낙랑 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광무제가 후한을 재건하면서 30년에 이 지역에 왕준을 파견하여 독립 세력을 일소하였고, 낙랑군은 다시 한의 군현으로 편입되었다(즉 ,그 말은 낙랑군이 폐지된 시기가 있었다는 의미)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광무제가 44년에 살수(청천강) 이남을 편입했다고 되어 있어 다소의 혼란은 있다. 어쨌건 이 때 도위 제도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광무제의 일관적인 정책이기도 했지만 동부도위 지역, 즉 영동의 7현이 버려졌다. 아마도 고구려와 같은 이민족의 성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세기 중반까지 낙랑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미해진다. 부여의 111년 침공 기록이 있지만, 그것을 딱히 쇠퇴의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다. 2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다수의 인구가 삼한 지역으로 빠져나갔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고구려의 한 군현 공격이 두드러지는 등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요동의 공손씨 세력이 낙랑을 장악하면서 삼한과 왜로부터 다시 인구가 회복되었다고 전하는 등 다시 재건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북방에 대한 견제는 어려워졌는지, 낙랑군은 황해도에 대방군을 건설(남부도위가 위치하던 지역)하면서 중심축을 남쪽으로 돌린다.
3세기 중엽에는 위나라의 관구검이 공손씨의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위나라와 싸웠다가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했고, 낙랑 · 대방군이 삼한 8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마한 세력이 반발하여 군현을 공격했으나 낙랑이 그 루트를 타고 가서 역습했다.
하여튼 낙랑군은 이 때 주변국에 제대로 힘을 썼고, 주위의 소국들이 줄줄히 항복, 복속하는 상황에서 고이왕도 혼인 관계를 맺고, 책계왕 때는 왕을 죽이고 분서왕 때 크게 백제의 공격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분서왕도 죽이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중국과 교통이 재개된 것도 무색하게,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초반에는 위(삼국시대)가 멸망하고 서진이 세워진 뒤 팔왕의 난과 오호십육국시대의 개막으로 본국과의 연결 고리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요동 ·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하여 끝내 미천왕이 이를 수복했다. 백제의 분서왕이 낙랑을 공격했다가 암살당하는 등 과거 삼한 지역 또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미천왕 대인 313년 낙랑이 병합되었다. 서구 학계에서는 이 313년을 한국사의 시작(구체적인 국가 형성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미천왕은 314년에는 대방군 또한 멸망시켜 한반도의 한사군 축출을 완료했다. 물론 낙랑군이 군사적으로 무너졌다고 해서 문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세기 ~ 3세기부터 등장한 낙랑의 벽돌 무덤은 4세기까지 꾸준히 나타났고, 고구려도 이 지역에 중국 계통의 유주자사 진이나 동수 등을 파견하여 반발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문화의 침투를 동반한 것이었고, 광개토대왕 대 남부 7성의 건립이나 평양 지역 9개 사찰의 건립 등 정지 작업을 기반으로 장수왕 때는 이 지역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 낙랑군의 일부 유민들은 요서 지역으로 건너가 낙랑군 복원을 시도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나 백제의 책봉호에 낙랑 관련 관직이 나타나니 포기하는 면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북제 시대에 폐지될 때까지 요서 지역에 교치된 군현의 형식은 남아 있었고, 수나라 양제의 원정 때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https://joonho1202.blog.me/221234834462
     
관심병자 19-02-04 00:48
 
통설에서는 낙랑이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이고 이곳이 대동강을 끼고있는 평양이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조선 세종대에 고구려의 평양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지못했다.
당시 세종이 신하들에게 직접 발로 뛰어서 찾으라고 했지만 찾지 못했다는것은 조선의 영역내 즉, 한반도내에 고구려 평양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시대 일본 사학자들이 대동강 평양이 고조선,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확정지었지만 타당한가하는 의문이 든다.ㅁ

낙랑조선의 범금팔조, 다른말로 팔조범금을 지켰다고 기록한 족속들이 살던곳이 요하유역이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이 팔조범금을 지켰다고 요사에 남겨놓았다.
팔조범금은 고조선의 통치의 기반이다.
한나라가 세운 군현이 한나라의 법규로 통치하지않고 고조선의 법으로 통치했다?
이말은 한나라가 낙랑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중원 기록은 그냥 사신만 한번와도 조공했다고 기록해놓았다.
근대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같은 강대국들이 외교관을 보낸것을 자신들에게 조공을 했다고 기록해 놓은것만 봐도 알수있다.
비슷한 가정을 해서 로마가 이슬람세력을 점령했다고 치자,
그곳을 로마 영지로 만든후 이슬람 율법 혹은 그곳의 기존 토착세력의 법규에 따라 통치했다?
상식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나라 군현에 한나라 법이 아닌 고조선 법으로 통치됐다고 기록해 놓은것은,
한나라에 속했지만(혹은 우호적이지만) 실질적 통치를 한건 아니다라고 기록자가 적어놓은것이다.
이외에도 중원왕조가 낙랑왕, 낙랑공의 칭호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에게 뿌린것만봐도 그들 스스로도 낙랑이 중원의 영토라는 생각이 없었다는것을 알수있는게 아닐까?

낙랑을 공손씨의 세력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후한의 공손씨 세력가라면 삼국지에 나오는 공손찬과 공손도가 있다.
흔히 삼국지에서 비정한 이 두 공손씨의 위치와 이들과 관련된 기록상에 나오는 위치가 크게 차이난다.
일단 공손찬이 차지했던 영토는 알려진것보다 서쪽 북경 인근일 가능성이 크다.
공손찬이 하북에서 전투한 기록상의 지명들이 다 북경인근 지명이고, 그가 관직을 받은곳도 그쪽이다.
공손찬이 낙랑을 차지했을 가능성은 없고 굳이 공손씨라면 공손도일것이다.
기록상 공손도와 한나라 사이에는 오환족이 있었다.
후한때 한나라에서는 공손도 조차 컨트롤 하지 못했다.
공손도가 왕이 되려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지만, 아무리 혼란 시기라 해도 한나라에서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그런데 낙랑군을 한나라가 컨트롤 했다고?
역사는 단편이 아니라 쭉 이어지는 것이다.
요동조차 컨트롤 못했던 한나라가 한반도내의 지역을 통치 했다고?
          
칼리S 19-02-04 09:04
 
1. 세종실록에 나오는 고구려의 도읍지를 알지 못한다는 내용(세종9년 3월13일 기사)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인 평양을 알지 못한다는게 아니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처음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임. 애당초 이 기사는 세종이 삼국의 시조묘를 세울 곳으로, 각 처음 도읍지로 하라고 한데서 나온 것으로, 고구려의 초기 수도는 조선의 영역 밖이므로 몰랐을 확률이 크죠. 지금도 고구려 졸본지역은 확실하게 입증되지 못할 정도니깐요.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만 봐도 평양부 연혁을 보면 답 나오는데, 멍청한 소리는 그만.

2. 맥락이 개판인데, 고조선이 팔조금법만이 있다라는 바보같은 해석을 하는데, 이건 아니죠. 기자가 처음 고조선으로 와서 8개의 단순한 법으로 교화시켰다는 중국식의 논리일 뿐이죠. 반대로 말하면 겨우 8개의 단순한 처벌만이 존재하는 국가였다면 고조선은 정치체제가 후진 국가였다는 헛소리죠. 요사 관련 부분은 찾아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요사 형법지 한번 찾아봤더니 그런 내용이 없어서요. 그리고, 고구려를 요동, 백제를 대방, 신라를 낙랑 관련 관작을 내린것은 이 중원 국가가 중원의 관작을 내린것인데, 먼 중원의 영토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그리고 이게 부끄러운 건 아니죠. 당시에는 지금같은 민족 개념이 투철한게 아니라서, 중원왕조의 권위를 부여받는게, 중요했으니깐요. 중원왕조 역시 다 지금같은 민족개념으로 보면 한족이 아닌것처럼 말입니다.

3. 고조선을 침공했던 시절인 전한 한무제때와 후한말엽을 비교하는건 바보짓 아닌가요?
               
관심병자 19-02-04 18:21
 
1. 댓글내용에서 조선 세종 당시의 지식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이 현 평양이 아니라는것에 동의하는걸로 봐도 되겠습니까?

2. 한나라 영지에서 고조선법으로 통치했다는게 비상식적인 이상한 일이죠.
팔조범금만이 고조선법 전체는 아니지만, 이게 고조선법의 특징.
억지로 현대에 비유한다면 고조선의 헌법이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한나라는 왜 자기 점령지에서 한나라법으로 통치하지 않고 적대했던 토착세력의 법으로 통치했나는 이상한 일이죠.
이는 미국이 독립전쟁으로 영국을 몰아낸후 미국 헌법이 있음에도 자국령을 영국법으로 통치했다고 하는것과 비교할수있겠죠.
그런일은 있을수 없는일이죠.
한사군에서 한나라법이 아닌 고조선법으로 통치됐다고 사가가 기록해놓은것에서 그 기록자가 말하고자 하는바는 이는 직접 통치지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걸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3. 한나라는 어떤 이유 어떤 사건으로 공손도와의 중간지역을 선비, 오환 세력에게 상실하게 되었나하는 문제가 있겠죠.
오환이 대대적으로 중원 북동부를 침공해  점령했던 적이 있었나.
없습니다.
그냥 거기 살던 족속들이고,
한나라가 팽창할때도 거기 살고 있었습니다.
한무제 당시에도 요동지역은 제대로된 통치력이 미치던 지역이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들 기준으로는 오랑캐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었죠.
요동의 동쪽도 오랑캐고 서쪽도 오랑캐였습니다.
절대 안정된 지역이라고 볼수없죠.
머라카이 19-02-04 23:22
 
학계통설을 정리하자면 멸망한 고조선 강역에 대한 통치력을 행사하려는 한과 중국세력을 몰아내려는 한민족이 싸우는 가운데 한군현 태반이 밀려나고 그 중 마지막으로 남은 낙랑 잔여 한군현을 흡수통합한 가운데 해당지역의 토착세력이 어느정도 자치를 누리면서 중국과 한국 문화가 융합되었고, 주변에는 중국문물의 전파자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보는거 같더군요. 본문에 나온 것처럼 한나라의 세력이 강성할땐 주변에 영향력을 투사하였으나 한나라 말기 이후 혼란기에 본토와의 연결이 끊기게 되면서 세력이 쭈그러들고, 주변 소국들을 흡수하며 성장한 고백신이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낙랑을 축출 흡수하면서 사라지게 되지요.
낙랑이 멸망하면서 낙랑과 왜의 중개무역으로 재미를 보던 가야가 무역루트가 끊기게 되면서 고대국가로의 성장이 멈추는 계기가 되고 마한과 낙랑의 힘의 공백지에서 줄타기하면서 성장한 백제가 낙랑의 위치를 대체하면서 가야, 왜에 영향력을 투사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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