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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1-18 02:24
[한국사] 위서와 수서 거란전 다시 보기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990  

# 편찬 시기
ㅡ 위서 (551~559년 사이)
ㅡ 수서 (636년)


1) 위서와 수서의 거란전


➊ 위서 거란전

契丹國, 在庫莫奚東, 異種同類, 俱竄於松漠之間. 登國中, 國軍大破之, 遂逃迸, 與庫莫奚分背.

거란국(契丹國)은 고막해의 동쪽에 있고, (고막해와) 다른 갈래이나 같은 종족(異種同類)이며,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등국(登國, 북위 도무제, 386~396) 중에 나라의 군대(북위)가 이들을 크게 격파하여 마침내 흩어져 달아나 고막해와 나누어 등을 지고 (거주하였다.)

經數十年, 稍滋蔓, 有部落, 於和龍之北數百里, 多爲寇盜.

수십년이 지나 점차 번성하여 부락이 생겼으며, 화룡(和龍)의 북쪽 수백리에서 대부분이 도둑질을 하였다.

眞君以來, 求朝獻, 歲貢名馬.

진군(太平眞君,북위 태무제, 440~451) 이래 조헌(朝獻)을 청하여 해마다 명마(名馬)를 바쳤다.

皆得交市於和龍·密雲之間, 貢獻不絶.

모두 화룡(和龍)과 밀운(密雲)의 사이에서 교역할 수 있게 되었고, 공헌이 끊이지 않았다.

太和三年, 高句麗竊與蠕蠕謀, 欲取地豆于以分之. 契丹懼其侵軼, 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 求入內附, 止於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태화(太和, 북위 효문제) 3년(479), 고구려(高句麗)가 몰래 연연(蠕蠕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地豆于)를 취해서 나누고자 하였다. 거란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그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가 그 부락을 인솔하여 수레 3천승, 무리 1만 여 명과 여러 가축을 몰고 복속해 들어올 것을 청하고, 백랑수(白狼水)동쪽에 머물렀다. 이 해(479)부터 항상 조공하였다.

朝貢至齊受禪常不絶.

조공은 북제가 (동위를) 선양하기에(受禪)이르러서도 항상 끊이지 않았다.

# 북제가 들어설 때까지 조공이 계속됐다는 말


➋ 수서 거란전

契丹之先, 與庫莫奚異種而同類, 並爲慕容氏所破, 俱竄於松·漠之間. 其後稍大, 居黃龍之北數百里.

거란(契丹)의 선조는 고막해와 다른 부족이나 같은 종족이며, 모두 모용씨에게 격파당하여 송막(松漠)의 사이로 모두 달아났다. 그 후 점차 강대해졌으며 황룡(黃龍)의 북쪽 수백리에서 살았다.

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貔河.

북위(北魏) 때가 되어 (거란은) 고구려(高麗)의 침입을 받아 부락 1만 여 구가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백비하(白貔河)에 머물렀다.

# 백비하 : 장소는 미상이나 학계 통설에서는 요녕성 경계, 즉 대릉하와 소릉하의 상류지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수서의 이 기록은 상기 위서의 기록과 교차가 됨으로 ‘백비하’는 ‘백랑수 동쪽’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즉 백랑수 동쪽의 백비하 일대에 머무른 것이다.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그 후 돌궐의 위협을 받아 또 (거란인) 만가(萬家)가 (스스로) 고구려에 의탁하였다.

# 만가는 만 개의 부락, 또는 1만 가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모든(萬) 부락(家)이라고 해석하는 게 옳다. 그런데 이 기록은 통전에 이르러서는 ‘만여 가’로 변형된다

開皇四年, 率諸莫賀弗來謁. 五年, 悉其衆款塞, 高祖納之, 聽居其故地.

개황(開皇) 4년(584) (거란이) 여러 막하불(莫賀弗)을 인솔하여 내알(來謁)하였다. (개황) 5년(585), 모든 그 무리가 새내(국경, 장성)를 두드리니 고조(高祖)가 이를 받아들이고, 그 옛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였다.

# 옛 땅 : 백랑수 동쪽, 즉 백비하 일대

六年, 其諸部相攻擊, 久不止, 又與突厥相侵, 高祖使使責讓之. 其國遣使詣闕, 頓顙謝罪.

(개황) 6년(586), 그 여러 부락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고, 또 돌궐과 서로 침략하니 고조가 사신을 보내 그들을 꾸짖었다. 그 나라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수나라) 궁궐에 도착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다.

其後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 率衆內附. 高祖納之, 安置於渴溪那頡之北.

그 후 거란의 다른 부락 출복(出伏) 등이 고려를 배반하고 무리를 인솔하여 내부하였다. 고조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갈계나힐(渴溪那頡)의 북쪽에 안치시켰다.

開皇末, 其別部四千餘家背突厥來降. 上方與突厥和好, 重失遠人之心, 悉令給糧還本, 勑突厥撫納之. 固辭不去.

개황 말, 그 다른 부락 4천여 가가 돌궐을 배반하고 항복해왔다. 상께서 바야흐로 돌궐과 화합하려는데, 먼 곳 사람 (돌궐인)의 마음을 잃을까봐 걱정되어, 모두 식량을 주어 본래 (거주지)로 돌아가도록 하고, 돌궐에게는 그들 (거란인)을 위로하여 불러들이라는 칙을 내렸다. (거란인이) 굳게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部落漸衆, 遂北徙逐水草, 當遼西正北二百里, 依託紇臣水而居. 東西亘五百里, 南北三百里, 分爲十部. 兵多者三千, 少者千餘, 逐寒暑, 隨水草畜牧.

부락이 점점 많아지자 마침내 북쪽으로 옮겨가 물과 풀을 좇아 요서 정북쪽으로 2백 리에 있는 탁흘신수(託紇臣水)에 의지하여 살았다. 동서로 5백 리, 남북으로는 3백 리에 걸쳐 있었고, 10부로 나뉘었다. 병사는 많은 경우 3천, 적은 경우는 천여 명이었으며, 춥고 더움을 좇고, 물과 풀을 따라 목축을 했다.

# 탁흘신수 : 학계에서 보누 장소는 미상이나 바이두백과에 근거할 시 중국 학계에서는 서요하의 2개의 큰 지류 가운데 하나인 로합하(다른 지류는 시라무렌강)로 보고 있다.
# 탁흘신수(託紇臣水) = 토호진수(土護眞水) = 토하(土河) = 북먀리몰리(北乜裡沒里) = 도외새몰리(陶猥思沒里) = 로합하(老哈河 : 하북성 승덕시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시라무렌강과 만나 서요하로 흘러드는 강) = 참류수(參栁水 : 본인은 서한 요서군 유성현의 참류수를 현 로합하로 보고 있다)
# 해는 장가구시와 승덕시 일대에 내려와 살았는데 7세기 말~8세기 초 거란의 반란과 침략에 당나라의 용병으로 참가하면서 세를 떨쳐 승덕시 동북방, 즉 현 로합하 일대까지 활동 및 거주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 때에 거란은 시라무렌강과 로합하 중하류 사이, 해는 로합하 상류와 장가구시 사이를 시라무렌강 이남의 활동 및 거주 영역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해와 해의 영역은 당나라 말기에 이름에 따라 거란에 흡수되었고, 10세기 초가 되면 해의 수장 거제가 당나라 규주, 즉 장가구시 일대로 거란을 피해 이주하게 됨으로써 서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有征伐, 則酋帥相與議之, 興兵動衆合符契. 突厥沙鉢略可汗遣吐屯潘垤統之.

정벌이 있으면, 우두머리들이 서로 의논하였으며, 병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동원할 때는 부계(符契)를 합쳐 (일치해)야 했다.

돌궐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 토둔(吐屯) 반질(潘垤)을 보내 그들을 통솔하였다.



2) 상기, 거란에 대한 위서와 수서 기록을 중심에 둔 시간 순서에 따른 북위~수 시대 구성

ㆍ344년, 전연 모용황, 우문부(우문선비) 격파
ㆍ우문부에 섞여 살던 고막해와 거란이 송막으로 달아나 흩어져 삶
ㆍ357년, 전연 모용준, 단부선비 몰살

ㆍ378년, 가을 9월, 거란이 고구려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킴

ㆍ388년, 북위 도무제, 약락수(현 시라무렌)에서 고막해 정벌
ㆍ고막해와 거란, 시라무렌강 유역과 대흥안령 남단 일대에서 동서로 나뉘어 거주

ㆍ392년 9월, 고구려 광개토대왕, 거란 정벌(삼국사기, 거란인 남녀 500 명 포로, 고구려인 1만 명 송환)
ㆍ395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염수(鹽水)의 패려(稗麗) 정벌

ㆍ402년, 고구려, 평주 함락
ㆍ404년, 고구려, 연군(현 북경시) 타격 또는 함락
ㆍ407년, 후연 멸망, 친고구려 정권인 북연 성립

ㆍ432년, 북위 태무제, 유주 밀운에서 정령(고차) 1만 명을 선발, 남쪽 길을 통해 북연 침공, 석성ㆍ대방 등을 함락한 후 북연의 영구, 기양, 현도, 요동, 낙랑 등의 3만 호(15만~20만 명)의 백성을 유주로 데려감

ㆍ435년, 북위 태무제, 고구려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

ㆍ436년, 북위 태무제, 북연 침략 전 고구려에 북연을 침략할 것을 알림

ㆍ436년, 북위, 북연을 멸망시킴
ㆍ436년, 북위, 화룡에 진(鎮) 설치
ㆍ고막해와 거란, 북위에 토산물을 바치며 수시로 교역
ㆍ거란, 화룡과 밀운 사이에서 교역
ㆍ444년, 북위, 영주(營州) 설치

ㆍ472년, 백제 개로왕, 북위에 사절단 보냄.
ㆍ472년, 북위 효문제, 백제에 사신을 보내기 위해 고구려를 지나가려 했으나 고구려가 불허.
ㆍ472년, 물길, 을력지를 사신으로 하여 북위에 입조. “고구려의 10 개 부락을 격파했다”, “백제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하니 이를 허락해 달라”
(ㆍ을력지의 이동 경로 : 난하(눈강) > 태리하(조아하) > 거란 서쪽 경계 > 화룡
# 한국 학계 통설에서는 태리하를 현 대릉하에, 화룡을 현 조양시에 비정한다. 이 건은 다음 고찰에서 다룰 것이다.)
ㆍ475년, 북위 효문제, 고구려가 육로와 해로를 차단하여 백제로 가려는 북위의 사신단을 막자 무리하게 도해를 시도하다가 사신선 난파됨.

ㆍ479년, 유연(연연)과 고구려의 지두우국 분할 시도, 고구려의 거란 공격
# 이후 거란, 고막해, 지두우의 움직임으로 볼 때에 실제 분할했을 가능성이 높음
ㆍ거란, 막불 하불우 휘하 1만여 명, 북위에 보호를 요청, 북위는 이들을 백랑수 동쪽(백비하)에 거주케 함
ㆍ480년, 고막해, 지두우의 공격을 받고 북위에 보호를 요청하며 국경 안으로 들어옴

ㆍ488년, 490년, 495년, 총 3차례의 걸친 북위와 백제의 전쟁. 백제의 승리.

ㆍ490년, 지두우, 북위의 국경지역 공격

ㆍ492년, 북위가 고구려 문자명왕을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령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
ㆍ494년,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
ㆍ497년 이전, 고막해, 북위의 안주와 영주 등 국경지역에서 북위인들과 섞여 삶
ㆍ498년, 고막해, 북위의 안주를 약탈, 북위는 유주, 연주, 영주의 군사 수천 명으로 이들을 진화

ㆍ거란, 화룡 북쪽 수백 리에서 도적질을 하며 삶

ㆍ523년, 옥야진(沃野鎭)을 비롯한 6진의 란
ㆍ524년, 영주(營州) 취덕흥(就德兴)의 란
ㆍ533년, 북위, 남영주(南營州) 설치 및 영주 관할 속군 교치, 현 하북성 보정시 일대

ㆍ534년, 북위 멸망,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
ㆍ550년, 동위, 북제(北齊)로 교체
ㆍ556년, 서위, 북주(北周)로 교체
ㆍ577년, 북제, 북주에 멸망
ㆍ581년, 북주, 수(隋)로 교체

ㆍ거란, 돌궐의 위협을 받고 고구려에 만가(萬家)가 스스로 의탁(복속)
ㆍ578년, 영주자사 고보녕(高保寧), 돌궐과 작당해 반란
ㆍ583년, 수나라, 고보녕 반란 진압 및 유주와 그 서북방 일대에 여러 진과 수 설치
ㆍ584년, (거란이) 여러 막하불(莫賀弗)을 인솔하여 수나라에 내알(來謁).
ㆍ585년, 모든 그 무리가 새내(국경, 장성)를 두드리니 고조(高祖)가 이를 받아들이고, 그 옛 땅(백랑수, 즉 백비하 일대)에서 살도록 허락.

ㆍ586넌, 거란 내분, 거란과 돌궐의 군사적 갈등
ㆍ586년 경, 거란의 출복(出伏)이 고구려에서 이탈, 수나라에 투항, 수나라는 이들을 갈계나힐(渴溪那頡)의 북쪽에 살게 함
# 갈계나힐 : 위치 미상

ㆍ598년, 고구려, 말갈과 거란을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와 임유관(당시 난하와 청룡하 라인 안쪽에 위치) 선제 타격
ㆍ598년, 제 1차 고ㆍ수 전쟁 발발, 고구려 대승, 수나라 참패, 수나라 정권 교체

ㆍ605년, 거란, 수나라 영주 함락, 수나라 영주 폐지
ㆍ605년, 수나라, 영주 함락에 대한 복수로 돌궐 계민가한의 군사 2만 기를 빌려 거란 정벌

ㆍ612년, 제 2차 고ㆍ수 전쟁 발발, 고구려 대승, 수나라 참패



ㅡ 영주(營州)와 고구려 서계(西界) 추적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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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9-01-18 03:06
   
<거란의 활동 영역 변천>

현 파림좌기(이곳은 본진으로 요나라 상경이 들어서 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 변함이 없음)



시라무렌강을 중심한 그 남북지역(436년 북연 멸망 후)



백랑수/백비하, 즉 승덕시 일대(479년, 거란의 일부 세력,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과 그 부족 1만여 명,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6세기 중후반, 거란의 복속이지 거란인들이 고구려땅으로 옮겨 가서 산 것이 아님)



백랑수/백비하, 즉 승덕시 일대(585년, 거란의 일부 세력)



갈계나힐(渴溪那頡)의 북쪽(고구려를 배신한 출복의 부족)



시라무렌강과 로합하 사이(6세기 후반 백비하 일대에 살던 일부 거란 세력, 승덕시 동북~적봉시 일대, 동서로 5백 리, 남북으로는 3백 리)



돌궐의 서쪽, 유성의 북쪽(605년), 당시 유성은 고구려 땅
아마르칸 19-01-18 09:58
   
좋은 자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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