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11-13 10:36
[한국사] 임삭궁(臨朔宮)과 임유궁(臨渝宮)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083  

임삭궁(臨朔宮)과 임유궁(臨渝宮)


수서 지리지부터 수 북평군(평주) 노룡현(북평군에는 속현이 노룡현 1 개)에 임유궁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후 신당서 지리지에는 그 임유궁이 석성현(옛 임유현 지역, 난하 서쪽, 당산시 동북쪽)에 있다고 역시 기술하고 있어서 수서 지리지와 신당서 지리지의 교차 분석이 성립한다. 즉, 이 두 사서의 교차 분석으로써 임유궁이 임유관과 함께 옛 임유현 자리인 석성현 지역에 있었다는 확인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두우의 통전과 10세기 말 북송의 태평환우기, 그리고 11세기 초, 역시 북송의 무경총요, 그리고 훨씬 후대인 청나라 초기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에 이르기까지 여타 역대 사서가 임유관을 현 진황도시 일대로 비정, 기술하고 거기에 더해서 임유궁이 그곳에 있었으며, 독사방여기요의 고조우는 임유관이 임유궁이며, 옛성을 비유적으로 궁이라 일컬었다고 설명을 붙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 양제가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이 임유궁에 행차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우리는 지난 추적 글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임유현이 현 난하 서쪽, 당산시 동북쪽에 있었으며 그 임유현이 무측천 시절에 석성현으로 개명하였다는 것을 고찰, 논증하였다.


또한 수나라 북평군(평주)이 차지한 영역은 현 청룡하 안쪽, 청룡하와 난하가 만나는 지점에서 난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의 서쪽에 불과했다는 것 역시 고찰, 논증하였다.


그 근거는 수서 지리지 북평군조에서 기술하고 있는 북평군의 지리정보가 전한과 후한의 비여현(로수, 현수), 해양현(룡선수, 봉대수, 염관), 려성현(갈석산) 지리정보, 북위의 양락현(복주산, 임유산) 지리정보(해양현 서남쪽에 있다가 북위 태무제가 비여현에 북평군을 설치하면서 영자와 영지 지역까지 흡수하며 오늘날 란현, 노룡현 지역까지 포함하게 됨)를 합한 것에 해당하고, 또한 수서의 지리 정보와 신당서의 석성현조 기술 지리정보가 상호일치하는 그 내용(온구, 온창진, 온수, 염관 등)이 후대 사서들에서 교차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지난 회차 게시글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연 임삭궁과 임유궁은 다른 곳이며 수 양제는 지금의 진황도시 무령현 임유진에서 대업 10년(613년)에 황제(중국 한족의 시조, 치우와 싸운 전설 상의 인물)에게 제사를 올렸는가 하는 것의 사실 검증이다. 즉 이러한 내용을 기술한 중국 역대 사서, 그리고 이들을 근거한 현대의 역사 기술들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현 임유진 지역은 황제가 머물며 제사를 지냈을 만한 유적도 그럴 정도로 드넓은 곳(황제가 머물며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이를 호위하는 병력, 그리고 원정군이 주변에 머물렀다는 의미)도 아니다.


본인은 우선 수서 지리지 북평군 원문의 거량수를 주목했다. 역대 중국사서 지리지 국역 개인DB인 ‘다시 쓰는 유기’에서 제시한 것은 신량수(臣梁水)였으나 중국사서 DB(위키소스) 상에서는 거량수(巨梁水)로 제시돼 있는 것에서 독사방여기요의 북직 챕터에 량수(梁水)를 추적했고 교차점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찾은 것은 현 북경지역인 순천부의 고량하(高梁河)였다. 하와 수는 중국 역대 사서에서 비교적 빈번하게 혼용됐다. 고량과 거량은 소리값도 의미값도 일치한다.


高梁河在府城西。自昌平州沙澗,東南流經高梁店,又東南流入都城積水潭。宋太宗伐遼,與遼將耶律沙等戰於高梁河。是也。金人亦謂之皂河,上有高梁橋。蒙古兵入居庸,至皂河,欲度高梁橋,為金將胡沙虎所敗。《水經注》:高梁水至潞縣注于潞河。今大通河,蓋即高梁河下流也。<독사 북직2 순천부>


고량하는 순천부(북경)의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순천부 지역에는 고량하뿐만 아니라 유하(榆河)도 존재했다. 이 유(榆)는 이 유(渝)와 함께 임유관의 유를 적을 때 서로 혼용된 글자이다.


또한 유관(榆關)도 (순천부 인근에) 존재하는데 이 유관은 현 내몽골 어월더쓰(오르도스)시와 숴저우(삭주)시 사이에 설치됐던 유림군(榆林郡)에 있던 것이므로 북평군, 또는 고구려 침략 방향과 전혀 반대로서 추적 과정에서 제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수서 지리지 북평군조에 임유궁이 기술된 이유는 실제 임유궁이 북평군에 있어서가 아니라 임삭궁을 혼동하면서 고량하와 함께 북평군 조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거량수(巨梁水)든 신량수(臣梁水)든 이 지리정보는 북평군 지역을 기술하는 역대 사서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하천 이름인데 난데 없이 갑자기 수서 지리지 북평군에 나타났으니 이는 임삭궁과 함께 탁군 지역의 지리정보, 즉 고량하(高梁河)가 북평군 지리 지술에 섞여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수서에서는 임삭궁과 임유궁을 혼용해 쓰고 있다. 수 양제가 대업 10 년,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임유궁에서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 대침략을 앞두고 제사를 지낸 곳은 역대로 탁군이었지 북평군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수서의 그 기록을 자세히 보자.


十年春正月

丁酉,扶風人唐弼舉兵反,眾十萬,推李弘為天子,自稱唐王。三月壬子,行幸涿郡。癸亥,次臨渝宮,親御戎服,祃祭黃帝,斬叛軍者以釁鼓。夏四月辛未,彭城賊張大彪聚眾數萬,保懸薄山為盜。遣榆林太守董純擊破,斬之。甲午,車駕次北平。五月庚子,詔舉郡孝悌廉潔各十人。壬寅,賊帥宋世謨陷瑯邪郡。庚申,延安人劉迦論舉兵反,自稱皇王,建元大世。六月辛未,賊帥鄭文雅、林寶護等眾三萬,陷建安郡,太守楊景祥死之。秋七月癸丑,車駕次懷遠鎮。乙卯,曹國遣使貢方物。甲子,高麗遣使請降,囚送斛斯政。上大悅。八月己巳,班師。庚午,右衛大將軍、左光祿大夫鄭榮卒。冬十月丁卯,上至東都。己丑,還京師。十一月丙申,支解斛斯政於金光門外。乙巳,有事於南郊。己酉,賊帥司馬長安破長平郡。《수서 卷四帝紀第四 煬帝下》


대업 10 년, 3월 임자일에 탁군에 행차하였고 그 11 일 후인 같은 달(3월) 계해일에 임유궁(臨渝宮)에서 황제(黃帝)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여름 4월, 즉 임유궁에서 황제에게 제사를 올린 날로부터 31일 후인 갑오일에 북평군에 도착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임삭궁과 임유궁은 현 북경시인 탁군에 있었고, 두 궁궐은 같은 궁궐을 서로 다르게 적었다는 말이며 임유궁은 임삭궁이라는 말이다. 임유궁이 북평군에 있는데 임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한달이 지나서야 북평군에 도착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수양제는 2차 침략을 앞둔 대업 7년에도 임삭궁에서 제사를 지낸 바 있다.


大業七年,征遼東,煬帝遣諸將於薊城南桑乾河上築社稷二壇,設方壝,行宜社禮。帝齋於臨朔宮懷荒殿,預告官及侍從各齋於其所。《수서 卷八志第三 禮儀三》


이 때를 제기(帝紀)에서는 여름 4월(음력)이라고 적고 있다.


七年春正月壬寅,左武衛大將軍、光祿大夫、真定侯郭衍卒。二月己未,上升釣臺,臨揚子津,大宴百僚,頒賜各有差。庚申,百濟遣使朝貢。乙亥,上自江都御龍舟入通濟渠,遂幸於涿郡。壬午,詔曰:「武有七德,先之以安民;政有六本,興之以教義。高麗高元,虧失籓禮,將欲問罪遼左,恢宣勝略。雖懷伐國,仍事省方。今往涿郡,巡撫民俗。其河北諸郡及山西、山東年九十已上者,版授太守,八十者授縣令。」三月丁亥,右光祿大夫、左屯衛大將軍姚辯卒。夏四月庚午,至涿郡之臨朔宮。《수서 卷三帝紀第三 煬帝上》


즉 임유궁은 임삭궁인 것이다. 임삭궁과 임유궁은 이명 동처로 같은 장소를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나라 임유궁은 북평군에 없었다. 수나라 임유궁은 탁군에 있었고, 바로 임삭궁을 달리 쓴 것이다.


그렇다면 임삭궁은 어디에 있었는가?


臨朔宮在府治西南,隋時置宮於此。大業七年,伐高麗,至涿郡之臨朔宮。將發,又類上帝於宮南。尋廢。<독사 북직2 순천부>


현 북경시 서남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중국 학계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본인의 고찰과 같을까, 아니면 달라서 본인 보고 틀렸다 할 것인가?


《隋书·帝纪·炀帝》记载:“大业十年春二月辛未,诏百僚议伐高丽,数日无敢言者。三月壬子,行幸涿郡。癸亥,次临渝宫,亲御戎服,祃祭黄帝,斩叛军者以衅鼓。夏四月甲午,车驾次北平。秋七月癸丑,车驾次怀远镇。甲子,高丽遣使请降,囚送斛斯政。


此“临渝宫”当为“临朔宫”之误,临朔宫在今北京市西南。


<바이두 백과 https://baike.baidu.com/item/%E6%A6%86%E5%85%B3%E9%95%87?fromtitle=%E6%A6%86%E5%85%B3&fromid=5605634&timestamp=1541897141085>


이것을 며칠 고찰을 끝낸 후에 발견하고는 참 허탈했다. 바이두 백과를 먼저 봤다면 그 고생을 덜 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임유관은 어디에 있었나?

우리는 지난 긴 고찰에서 적어도 6세기 말에서 7세기,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에 한정하여 보덜도 임유관은 현 난하 서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도달했다.


1차 고구려 원정(598년)에서 수나라 군대는 임유관을 통해 나와서 고구려로 진군하였다.


明年,元率靺鞨之眾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沖擊走之。高祖聞而大怒,命漢王諒為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饋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 <隋書 卷八十一列傳第四十六>

그밖에 수나라의 총 4차에 걸친 고구려 침략 과정을 적은 수서의 기록에서 특별히 임유관이 등장하지는 않으나 다만 양현감의 반란 때에 그의 동생인 현종이 수 양제가 있던 곳에서 도망쳐 임유를 거쳐 복귀했다는 기록이 있다.


明年,帝復征高麗,以元淑鎮臨渝。及玄感作亂,其弟玄縱自帝所逃歸,路經臨渝 《수서 卷七十列傳第三十五》

어찌 됐든 수나라 당시 임유관은 고구려와의 경계 일대에 설치돼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수서의, 수 양제 대업 10 년 기록에서도 3월에 임유궁에서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31일 후인 여름 4월에 북평(군)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으므로 수 나라의 군대는 탁군에서 북평(군)으로 행군해 북평(군)을 거쳐 고구려를 침략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나라 이전의 북평군은 현 당산시와 그 서부에 있었다. 수나라가 이를 어양군으로 바꾸고 그 동쪽에 북평군을 새로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북평군에 임유관이 있어도 하등 문제가 없어 보인다(만약 북평군에 임유관이 있었다면 현 진황도시 쪽이 아니라 난하 서쪽, 당산시 동쪽 방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미 고찰을 통해 거론했다.)


그런데 과연 수나라 임유관이 북평군에 있었는가 하는 것이 다음을 근거로 회의에 빠진다.


1) 임삭궁이 임유궁인 것을 이미 확인하였다. 이는 본인이 직접 고찰하여서 논증하였고, 이미 중국 사학계의 정설임도 확인하여 본인의 고찰과 교차하여 사실로서 성립한다.


임삭궁은 현 북경시에 이었다. 임삭궁이 임유궁이고 그 임유궁이 현 북경에 있었다면 이름이 같은 임유관 역시 북경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않지 않은가?


2) 다음의 기록  


“돌궐이 ㅡ 생략 ㅡ 고보녕과 더불어 임유진을 공격해 함락시키니 결탁한 여러 방면의 부락이 공모하여 남쪽을 침략했다.”


“宣帝時,突厥攝圖請婚於周,以趙王招女妻之。至開皇元年,攝圖曰:‘我周家親也,今隋公自立而不能制,復何面目見可賀敦乎?’因與高寶寧攻陷臨渝鎮,約諸面部落謀共南侵。《隋書  卷五十一列傳第十六 長孫覽從子熾 熾弟晟》


한중 학계 통설에서 영주는 유성에 있었고, 그 유성은 현 요녕성 조양시에 비정되어 있다. 현 조양시에서 현 진황도를 거쳐 기주의 중심지인 탁군을 거쳐야 남쪽으로 올 수가 있다. 학계 통설대로라면 제면 부족의 침략은 동쪽을 침략했다라고 적어야 사리에 맞는다.


수나라 초기, 임유진이 현 북경 인근에 있었다 한다면 상기 수서 열전의 고보녕 관련 기록에 부합한다


3) 다음의 기록


“선비족이 다투어 일어나니 노룡의 사방이 모두 전장이 되었고 중국의 말과 가르침이 영주와 평주에 다시 도달하지 못 하길 수백 년이 되었다. 수나라가 비록 주현을 설치하였으나 황폐하게 두고 다시 경영하지 못했다.

及鮮卑競起,盧龍四境皆為戰地,中國聲教不復達平、營者數百年。隋雖置州縣,而荒略未改。


독사방여기요 북직 8에서 영평부의 연혁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지난 게시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


수나라가 이 지역을 제대로 관리했다면 이런 기술이 나올 수가 없다. 어떻게든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사서를 적는 것이 중국 사가들의 특기이다.


우리는 앞에서

1) 수나라 북평군이 실제로는 청룡하와 난하를 동한계로 했다는 것

2) 수서 지리지 북평군의 지리정보는 탁군의 지리정보가 섞여들었다는 것

3) 임유궁은 임삭궁으로 탁군, 즉 현 북경에 있었다는 것


을 고찰, 추론, 논증하였다.


따라서


수나라 당시 임유관은 현 당산시 방면에 있었거나 현 북경시, 또는 북경시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수_북평군.jp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14
19409 [한국사] 견훤의 고향은 진짜 어딜까요? (1) 삼한 12-18 1393
19408 [한국사] 한서 28권으로 본 한사군 (33) 위구르 12-17 1329
19407 [한국사] 중국 25사에 나타나는 단군조선(삼조선)의 위치? (1) 수구리 12-17 1240
19406 [기타] 지겹네요. 원조논쟁 (3) 하이시윤 12-17 818
19405 [한국사] 북부여사 (2) 스리랑 12-17 997
19404 [한국사] Marauder님이 제기한 두가지 문제에 대해 몇가지 답변 (2) 하이시윤 12-16 851
19403 [기타] Marauder님이 제기한 두가지 문제에 대해 답변이 된다… (1) 하이시윤 12-16 740
19402 [한국사] 대한민국의 식민사학자들이 가장 부정하는 책 환단… (5) 스리랑 12-15 1146
19401 [한국사] 환단고기 위서론의 실체 (16) 수구리 12-14 1448
19400 [기타] 아랫글에서 두분이 치열하게 논쟁하길래 정리해봅니… (9) 하이시윤 12-13 1089
19399 [한국사] 쌀(feat.소로리 볍씨)관련 나무위키 내용 중.. (11) 밑져야본전 12-13 1077
19398 [한국사] 환단고기에 대한 생각 (10) 위구르 12-12 1288
19397 [한국사] 그래 나는 니들이 말하는 진정한 환빠요, 국뽕이다. (30) 스리랑 12-12 1160
19396 [한국사] 한국이 벼의 종주국? (142) 밑져야본전 12-11 1592
19395 [한국사] 야요이의 볍씨와 수전에 대한 질문과 답(?) (13) 밑져야본전 12-11 900
19394 [한국사] "우리"와 "울루스" (3) 나기 12-11 867
19393 [한국사] 벼 재배 기원은 한반도였다(1만 5천년 전 소로리 볍씨… (42) 수구리 12-11 1297
19392 [한국사] 야요이에 대한 질문과 답 (5) 밑져야본전 12-10 1001
19391 [한국사] 한(漢)나라는 황하 주변의 크지 않은 나라였다(하북… 수구리 12-10 1039
19390 [기타] 야요이인의 기원 (4) 밑져야본전 12-09 1487
19389 [한국사]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문제점을 잘 말해 줍니다. 스리랑 12-06 1302
19388 [한국사] 가덕도 유골은 서양인이 아닙니다. 조몬인입니다. (13) 보리스진 12-06 3088
19387 [기타] 동아시아 민심을 완전히 상실한 왜구 (4) 도다리 12-06 1552
19386 [기타] 코리안이브 1편, 가덕도 7천 년의 수수께끼 (5) 관심병자 12-05 1133
19385 [한국사] BC 147년 경 만들어진 단군신화 벽화(산동성 무씨 사당… 수구리 12-02 2425
19384 [한국사]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안병우 교수) (16) 고구려거련 11-30 2471
19383 [한국사] “신민 삼은 주체, 왜 아닌 백제”… 광개토대왕비 … 수구리 11-29 1518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