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왜란을 통해 수천~수만의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보다도
왜군들에 의한 왕릉도굴과 선왕들의 시신훼손을 가장 분하고 비통하게 여겼습니다.
당시 중종 뿐만 아니라, 성종이 묻힌 선릉도 파헤쳐져서 결국 성종의 경우는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선릉은 엄밀하게는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중종의 경우는 겨우 시신은 수습했다고는 하지만..이 또한 당시 수많은 이들이 되찾은 중종의 시신에 대해
여러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냥 서둘러 봉합하여 논란을 금지시켰습니다.
훗날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선결조건으로 조선측에서 왕릉도굴범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을 정도로, 조선왕실과 조정의 분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의 국교가 시급했던 것은 막부보다 전통적으로 조선에 의존했던 대마도가
간절했기 때문에...대마번측에서 번내의 사형수 두 명을 왕릉도굴범으로 속여 조선에 인도했고
조선도 당시 대마도의 농간을 눈치챘지만, 명분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형식적인 심문과정을 거친 뒤
서둘러 참수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