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 앞에 히타이트의 전차부대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라 부대를 급습했다. 이집트군은 4개 부대 간에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력도 히타이트 군에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라 부대는 방심한 상태로 그것도 강을 건너는 도중에 습격당했기 때문에 히타이트군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궤멸되었다.
히타이트군은 이어서 선두의 아몬 부대를 공격했으며, 아몬 부대 역시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고 궤멸 당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전개 과정은 이집트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집트의 부조에는 아몬 부대의 모습과 이후 아몬 부대가 히타이트 전차부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모습 등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이집트의 기록도 명확하며 히타이트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이집트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기 시작하며 히타이트의 기록과도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다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군에게 잡히지 않은 것과 카데시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a) 이집트가 우세했다는 의견: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면, 람세스 2세는 이 시점에 신으로 변했다고 한다. 람세스 2세의 곁에는 오직 마부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다른 이집트군은 모두 달아났다. 람세스의 마부 역시 겁에 질려있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마부를 독려하고, 신으로 변해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한 후 유유히 이집트 군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집트 측 기록에 의하면 당나귀 턱뼈를 집어 들어 근처의 히타이트 군을 홀로 몰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람세스가 훌륭한 전사였다고 해도 한 사람의 힘으로 히타이트군을 궤멸시키고 승리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전차부대는 히타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활이 주 무기였으므로, 아무리 본인이 신으로 변했다고 해도 자기가 가진 화살 숫자보다 많은 적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집트의 기록이 이것으로 끝이었다면 람세스는 그냥 혼자 간신히 달아났으며 히타이트의 승리로 끝났다고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위의 '문자로 된' 설명에 붙어있는 부조의 내용은 설명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부조에서도 분명히 람세스는 혼자서 신나게 날뛰고 있지만, 부조 한 쪽 구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집트 측의 부대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설명에서는 람세스가 혼자서 이겼다고만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대의 정체에 대한 단서가 없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파라오의 근위대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가나안인 용병대라고 하기도 하며, 아무루의 원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은 정황을 바탕으로 한 추측에 불과하다.
설명이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부대는 부조에서도 단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혼자서 때려잡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한 사람의 힘만으로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며, 이들이 전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람세스 2세 혼자서 히타이트 군을 격파하고 승리했으며 주위에 람세스를 도와줄 사람은 마부 한 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설명과 모순되는 부대의 존재를 굳이 그려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대는 뭔가 '생략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할이 대체 무엇인가이다.
이집트가 실제로 히타이트 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고 보는 쪽에서는 그것이 람세스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 정체불명의 부대가 적절한 시점에 히타이트 군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가 히타이트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집트 측의 기록을 신뢰한 해석이다. 승리한 것 자체는 사실이고, 단지 람세스 2세가 자신의 공적을 과장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서는 히타이트 군이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해서 군기가 느슨해져서, 이집트 군이 남기고 간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 그 정체불명의 이집트군 부대가 나타나서 람세스와 함께 히타이트 군을 기습해서 격파했다고 본다.
b) 히타이트가 우세했다는 의견 : 히타이트의 승리라는 측에서는 이집트군은 단순히 패배했으며 이 정체불명의 부대는 단순히 람세스나 람세스의 아들 등을 구출해서 호위했을 뿐이라고 해석한다. 람세스의 용감무쌍한 전투는 단순히 달아나기 위해 혈로를 뚫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설명의 근거는 숫자가 좀 더 많다.
이집트의 부조에서 그 정체불명의 부대는 전차부대가 아닌 단순한 보병부대로 묘사된다. 따라서 대규모 전차부대가 격돌한 상황에서 전황을 뒤집을 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그 부대는 규모도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의 4개 부대에 필적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면 처음부터 언급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쪽에서 느리게 오던 세트와 프타 부대의 정황이 적혀져 있지 않아 추측이지만, 뒤늦게 나타난 군대가 이들일 수 있고 람세스와 아들을 구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요새를 향해 공격하려고 전진한 부대들은 아몬과 라 부대였고 세트와 프타부대는 아직 람세스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대의 대장들은 서둘러서 람세스가 있는 곳까지 갔으나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아몬부대는 완전히 궤멸당했고, 라 부대는 공격받고 있으며 람세스와 아들은 절체절명 위기였던 찰나에 이 두 부대들이 때마침 도착하였고 아마 람세스에게 있어서는 극적인 출현이자 히타이트들도 당황해 했을 것이다. 이 두 부대들이 진퇴양난에 빠진 람세스와 아들을 구출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나타나 람세스를 구출해주었어도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준비해둔 4부대 중 아몬 부대는 궤멸되고, 라 부대는 거의 전멸하다 싶이 했으며 뒤늦게 도착한 세트, 프타 부대도 람세스를 구출하느라 사실상 피해도 많았을 것이니 람세스도 굳이 이런 상황에서 요새를 함락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람세스가 신으로 변했다는 기록도 근거가 된다. 스스로 신으로 변해서 혼자서 히타이트 군을 몰살했다는 어마어마한 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패배를 승리로 조작하는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 2는 그 후에도 다른 파라오가 만든 건축물에서 해당 파라오의 이름을 삭제하고 자기 이름을 써넣거나 하는 등의 조작의 전력이 있다.
히타이트군의 군기가 느슨해졌다거나 하는 종류의 설명은 사료상의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정체불명의 부대가 히타이트 군을 공격하는 모습 역시 이집트의 부조에는 묘사되지 않았다.
전투에 직접 참여한 것은 히타이트군의 일부였으며, 보병의 대부분은 카데시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것은 요새에서 가까운 지역이었으므로 실제로 히타이트 군이 위기를 맞았다면 지원군이 출동했을 텐데, 요새의 히타이트 군이 움직이지 않았다.
람세스가 어떤 부대의 힘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 부대에 대한 찬사가 완전히 삭제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단순히 공적을 과장하기 위해서라면 아군을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이 전투의 기록에서는 람세스는 이집트 군을 분노에 찬 어조로 비난했으며, 어떤 부대에 대한 찬사도 남아있지 않다. "...나만큼 너희들에게 많은 일을 해준 파라오가 있었느냐? ...따라서 나는 전쟁터에서 너희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희는 모두 비겁하게 행동하였다! ...너희들의 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론 비난이 끝난 후에는 그들을 격려하기는 한다. "기운을 내라, 나의 병사들이여..." 그러나 이 또한 승리보다는 패배한 군사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전투의 결과가 히타이트의 승리 쪽으로 더 잘 설명된다. 무엇보다도 전투 직후 람세스 2세가 무와탈리 2세에게서 전투 행위를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서신을 받았을 때 이집트군은 일제히 람세스에게 그 권고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으며, 실제로 이집트군은 무와탈리의 권고대로 물러났다. 이는 평화조약이 아니었다. 히타이트군은 물러나지 않고 작전을 계속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이 원정에서 가지고 온 전리품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매우 빈약하다.
히타이트에서는 이집트 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기록했다. 히타이트 측에서는 전투의 자세한 경과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카데시 전투는 이 전투에 참여한 하투실리 3세에게는 대단한 업적으로 언급된다. 또한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는 카데시 전투를 이집트의 승리로 기록한 것에 항의하는 편지를 람세스 2세에게 보냈으며, 이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물론 하투실리에겐 중요한 업적이니 이쪽에서도 과장했을 수도 있다.
5. 결과
카데시 전투의 결과 이집트군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히타이트군은 그대로 군사작전을 계속하여 이집트의 중요한 거점인 우피(현재의 다마스쿠스 주변)를 점령했다. 또한 이집트의 동맹국인 아무루를 공격해서 약탈했다. 아무루는 이 때는 히타이트에 항복하지 않고 버텨낸 것으로 보이지만, 전투가 벌어진지 1년 이내로 다시, 히타이트의 동맹국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이로써 아시아(중동)에서의 이집트의 영역은 가나안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에도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에 분쟁이 이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후에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을 보면 그랬을 수도 있다. 단, 흔히 알려져 있는 대로 이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로 평화조약이 맺어진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공식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된 것은 전투에서 무려 16년이 지난 기원전 1258년의 일이며, 이때도 이집트의 왕은 여전히 람세스 2세였지만 히타이트의 왕은 새로 즉위한 하투실리 3세였다.
여하간, 카데시 전투 이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고 한다. (전쟁에서의 승리나 패배로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는 조약이 아닌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평화조약으로서 최초라는 뜻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어진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 조약문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으며, 복사본은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국제연합 본부에 걸려있다.
아부심벨 대신전의 기둥의 방을 감싸고 있는 벽에 카데시 전투의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 나무위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