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야기는 <고구리사초·략>에만 있고,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기록들이다.
당시 신라의 첨해이사금은 자신의 딸을 고구리 중천태왕에게 후궁으로 바쳤고, 첨해가 어머니 옥모(玉帽)태후와 함께 고구리를 방문했을 때 옥모를 본 중천태왕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해 진귀한 선물도 주고 옥모를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후궁으로 거두고 싶었으나, 전(鳣)태후가 이를 시샘해 그리하지 못했다.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중천태왕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고는 친히 부축해 수레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는 신라에게 죽령(竹岺) 땅을 하사해 되돌려주니 신라로 귀화하는 백성들이 8천여 호나 되었는데, 세세토록 형제나라로 지내자고 쇠판에다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태왕은 옥모태후에게 여러 차례 진귀한 선물을 보내니, 옥모태후는 그 성의에 감읍하게 된다.
중천태왕 8년(255) 10월 백제의 고이왕이 신라의 봉산성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자 옥모는 몸소 국경으로 태왕을 찾아와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태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자 고이왕이 화친을 청해 서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삼국사기 백제·신라본기>에 공히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
그때 관계를 맺었는지 이듬해 8월 옥모가 황자 달가(達賈)를 낳으니, 태왕은 사신을 보내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를 황자로 삼는다. 이후 중천태왕은 옥모와 가끔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중천태왕은 12년 기묘(259) 봄 정월에 첨해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여 금・은 인장 두 개를 하사한다.
이어 사람을 보내 옥모에게 새 궁전을 고쳐주었고,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명까지 보내준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메뚜기떼)이 일어나 도둑이 많아졌다는 보고를 듣고는 곡식 2만석, 소와 양 8천두, 타락과 술, 피륙과 비단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라고 어명을 내릴 정도였다. <삼국사기>에 “가을 7월 가물고 황충이 일었다. 흉년이 들어 도둑이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