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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21 22:28
[일본] [일본서기]진사왕의 죽음과 목만치의 전횡
 글쓴이 : 호랭이해
조회 : 2,846  

진사왕시해



아직기와 왕인



목만치의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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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제10

3년 겨울 10월 신미삭 계유(3일)에 동쪽의 하이(蝦夷)[28]가 모두 조공했다. 그래서 하이에게 구판도(厩坂道;우마야사카노미치)[29]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해[35]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36]  천황에게  무례하였다[37].  그래서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38],  우전시대숙녜(羽田矢代宿禰;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38][39],  석천숙녜(石川宿禰;이시카와노스쿠네)[40],  목토숙녜(木菟宿禰;츠쿠노스쿠네)[41]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42].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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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본 고대 동북지방에서 북해도에 걸친 지역의 주민을 대화조정 측에서 부른 호칭이다. 

[29]『宋書』  列傳  倭國條의  倭王武의 상표문에 보이는 毛人과 같다. 율령국가의 華夷思想의 영향 아래 이들이 일반 倭人과 문화적으로 다른 부분이 의도적으로 강조되었다. 또한 이들은 수렵을 생업으로 하며 농경을 하지 않는 야만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복·동화되어야 한다고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日本書紀』에는 神武卽位前紀 10월에 처음 나오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 東北經營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다. 29현재 奈良縣 橿原市 大輕町 下ッ道이다. 응신천황 15년 8월조에 의하면 백제왕이 보낸 阿直伎가 良馬 두 마리를 輕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사육했다고 하는데, 이곳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厩坂道 부근에는 응신천황의 輕島豐明宮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서명천황대에는 厩坂宮이 조영되기도 했다. 

[35]『日本書紀』 기년으로는 272년이다.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2간지 내리면 392년이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해는 辰斯王이 죽고 阿莘王이 즉위한 해이다.

[36] 貴國을 『日本書紀』 편찬자가 윤색한 말로 보기도 하고, 『백제기』에서 왜를 貴國이라고 적은 것에 주목하여 귀국을 2인칭적 호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貴國은 상대국을 부르는 존칭이 아니라 비천한 나라에 대한 존귀한 나라라는 의미, 즉 蕃國에 대한 貴國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貴國은 蕃國관념이 나타나는 7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 쓰인 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37] 백제왕이 천황에게 無禮를 범하였다는 식의 표현은 응신천황 3년 시세조 이외에도 『日本書紀』의 여러 곳에 보이는데 모두 윤색된 표현이다.

[38] 紀角宿禰(木角宿禰) 이하 네 명 모두 武內宿禰(建內宿禰)의 자식이다. 『古事記』 孝元段에 「此建內宿禰之子. 幷九[男七女二]. 波多八代宿禰者[波多臣…長谷部之君之朝也]. (중략) 次蘇賀石河宿禰者[蘇我臣…岸田臣等之朝也]. 次平群都久宿禰者[平群臣…馬御樴連等祖也]. 次木角宿禰者[木臣…坂本臣之朝].」라고 나온다. 紀角宿禰는 紀氏의 조상으로 전승상의 인물이다. 紀氏의 姓은 臣으로 천무천황 13년(684)에 朝臣을 받았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에는 「紀朝臣石川朝臣同祖. 建內宿禰男紀角宿禰之後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거지는 和歌山縣 紀ノ川 일대이고, 야마토의 平郡 지방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紀氏는 紀ノ川 북부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목재 덕택으로 일찍부터 수군을 보유한 군사씨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본거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한반도계 유적·유물의 분포는 紀氏와 한반도 제세력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日本書紀』에는 5~6세기 紀小弓宿禰, 紀生磐宿禰 등 기씨의 주요 인물들의 활동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한반도(특히 가야)와 관련하여 활약하고 있다.

[39]『古事記』 孝元段에 나오는 波多八代宿禰를 말하며 波多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記』에서 波多八代宿禰는 建內宿禰(武內宿禰)의 장자이고 波多臣, 林臣, 波美臣 등의 조상이라고 나온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의 「八多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禰命之後也.」라는 기록을 통해서 蘇我氏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40]『古事記』 孝元段의 蘇賀石河宿禰를 말하며 蘇我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記』에서 蘇我石河宿禰는 建內宿禰의 자식이고, 蘇我臣·川辺臣·田中臣 등의 조상으로 나온다. 蘇我氏는 6세기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왜왕권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 씨족이다. 계보 전승은 蘇賀石河宿禰를 시조로 滿智, 韓子, 高麗로 계승되었다. 稻目대에 이르러 稻目이 大臣이 되고 자신의 딸을 欽明의 왕비로 삼은 것을 계기로 정치의 중심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후 稻目의 아들 馬子는 物部守屋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더욱 그 권력기반을 다져 나갔다. 馬子의 아들인 蝦夷와 손자인 入鹿을 거치면서 소아씨의 권력은 더욱 절대화되어갔지만, 中大兄皇子(天智天皇)와 中臣(藤原)謙足 등에 의해 蝦夷, 入鹿 부자가 살해됨으로써 몰락하게 된다. 소아씨의 본거지는 大和와 河內지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출자가 백제계 이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41]『古事記』에 平群都久宿禰로 나오며 平群臣 등의 조상이다. 『日本書紀』 인덕천황 원년 춘정월조에 의하면 木菟宿禰가 태어날 때 집에 鷦鷯(굴뚝새)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같은 날 인덕도 태어났는데 황궁에 木菟(부엉이)가 날아들었다. 이것을 길조로 여긴 응신과 武內宿禰가 새의 이름을 따서 자식의 이름을 짓되, 날아든 새의 이름을 교환하여 각자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인덕은 大鷦鷯皇子라 하였으며 武內宿禰의 자식은 木菟宿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木菟宿禰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전승이 남게 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武內宿禰 계보에 平群氏가 포함되는 시기, 즉 推古朝로 보고 있다.

[42]『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392) 10월, 11월조의 「王狗原田旬經返. 十一月. 狗原行宮薨.」이라는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원년조(405)에 國人이 왕위에 있던 碟禮를 죽인 예를 보면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國人의 반발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無禮와 관련하여 百濟國 운운하는 부분은 정상적이지 않은 진사왕의 죽음을 바탕으로 『日本書紀』 편찬자가 만들어낸 표현일 것이다.

[43] 阿花, 즉 阿莘王의 즉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원년조(392)에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元子 (중략) 王薨詩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삼국사기』에는 왜국이 阿莘王의 즉위에 간여한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다. 이 또한 진사왕의 사망기사와 함께 『日本書紀』 편찬자가 조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왕 즉위와 관련하여 이와 같은 서술은 줄곧 『日本書紀』 기술의 기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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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가을 9월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인이 함께 내조하였다[51]. 이때 무내숙녜(武內宿禰;다케우치노스쿠네)[52]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53]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한인지(韓人池)[54]라고 불렀다.

8년 봄 3월에 백제인이 내조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 “아화왕(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무례하였다[55]. 그래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峴南)[56], 지침(支侵)[57], 곡나谷那)[58], 동한(東韓)[59]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60]를 천조(天朝)[61]에 보내 선왕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고 한다.].


14년 봄 2월에 백제왕[86]이 봉의공녀(縫衣工女)[87]를 바쳤는데 이름이 진모진(眞毛津)[88]이었다. 지금 내목의봉(來目衣縫;쿠메노키누누이)[89]의 시조이다.
이89해에 궁월군(弓月君)[90]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 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91]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92]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93]을 보내 궁월군의 인부를 가라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록 습진언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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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古事記』에서는 「亦新羅人參渡來.」라고 하여 응신천황대에 신라인만 건너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2]『日本書紀』 경행천황 3년 춘2월조 武內宿禰 참조.

[53]『日本書紀』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말한다. 『古事記』에서도 막연히 한반도를 가리킬 때 ‘韓’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54]현재 奈良縣 磯城郡 田原本町에 있는 唐古池로 추정되고 있다. 『古事記』 응신천황단에는 建內宿禰命이 도래한 신라인을 이끌고 ‘百濟池’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事記』에서 신라인이 만든 연못을 왜 百濟池라고 표현하였는지 알 수 없다.

[55]아화왕이 무례하여 왜국이 백제의 땅을 빼앗았다는 표현은 『日本書紀』 편찬자의 조작이다.

[56]『삼국사기』 지리지 4의 甘勿阿(현 전북 咸悅지역)에 비정된다.

[57]『三國志』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兒林과 같다고 보아 현재 충남 大興의 옛 이름인 任城에 비정하는 견해와 支侵國, 즉 현재 충남 洪城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58]谷那는 黃海道 谷山郡(臨津江이나 禮成江의 상류지역)으로 보거나 전남 谷城, 또는 충주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59]東韓에 대해서는 충북 괴산, 진천, 음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日本書紀』 응신천황 16년 시세조 東韓 참조. 한편 ‘동한의 땅’, 즉 ‘東韓之地’를 앞의 현남, 지침, 곡나의 총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0]阿莘王의 아들로 백제 제18대왕 腆支王(재위:405~420)이다. 『삼국사기』에는 腆支, 『宋書』와 『梁書』에는 映으로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腆支元年條에 「腆支王[或云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倭國.」이라고 나온다. 腆支가 왜국에 質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은 『三國史記』 阿莘王 6년조(397)(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質爲)에도 보인다. 「廣開土王碑」의 永樂 9년(399) 己亥條에는 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해 군사를 끌어들였다(百殘違誓與倭和通)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397년에 백제가 왜국에 腆支를 質로 파견한 이유가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한편 이러한 腆支의 왜국 파견은 백제의 고구려 견제정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국내적으로 볼 때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추방된 것이거나, 반대로 후계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로 이해되기도 한다.

[61]倭國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편찬단계에서 윤색된 표현이다.

[86]백제 제17대 왕 阿莘王(재위:392~495)을 가리킨다.

[87]옷을 짜는 여자 기술자를 일컫는다.

[88]여기에서만 보인다. 다만 백제의 대성8족의 하나인 眞氏인 점을 감안하면 상층신분의 여성일 가능성이 있다.

[89]『和名類聚抄』에 「大和國高市郡久米」라고 나온다. 來目(久米)은 현재 奈良縣 橿原市 久米町 지역이다. 衣縫에 대해서는 『新撰姓氏錄』 和泉國 諸蕃條에 「衣縫. 出自百濟國神露命也.」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和泉國의 衣縫과 大和國의 來目지역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90] 秦氏의 선조이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16년 8월조에도 秦氏의 도왜전승이 보인다. 『古事記』 應神段에는 「秦造之祖 韓直之祖 (중략) 參渡來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秦氏는 『新撰姓氏錄』左京諸蕃上에 의하면 秦始皇帝의 후예를 칭하고 있지만, 실제는 신라 방면(울진)에서 건너간 도래인 집단으로 보고 있다. 秦氏는 山背國의 葛野, 紀伊郡을 중심으로 近江國 愛智와 太上郡을 비롯해 美濃, 越前, 攝津, 播磨國 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특히 농지개발과 양잠, 광산개발 그리고 鑄造 및 木工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따라서 관련 자료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京都府 남부의 山城지역과 큐슈 북부지역의 宇佐지역에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진씨는 일본열도에 정착한 후 재지의 호족이 되거나 야마토정권의 창고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인이 되어 활동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姓은 초기에는 造였다가 천무천황 12년(683)에는 連, 이어서 同15년에는 忌村 姓을 하사받았다.

[91]이 표현은 실제 궁월군이 120현의 인부를 데리고 渡日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秦氏가 일본 열도에 정착하여 다수 部民을 거느리게 된 이후 만들어진 전승으로 추정된다. 한편 『新撰姓氏錄』 左京諸蕃上에는 127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92]『日本書紀』에서 加羅라는 용어는 加耶諸國을 가리키는 경우와 고령의 加耶(大加耶)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93]『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5년 춘3월조 葛城襲津彦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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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가을 8월 임신삭 정묘(6일)에 백제왕[94]이 아직기(阿直伎)95를 파견하여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다.[95] 경(輕;카루)[96]의 언덕 위의 마구간에서 기르도록 하고 아직기(阿直岐)[97]에게 사육하는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을 사육하는 곳을 구판(廐坂;우마야사카)[98]이라고 불렀다. 아직기는 경전[99]도 잘 읽었으므로 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우지노와키이라츠코)[100]의 스승으로 삼았다. 천황이 아직기에게 “너보다 훌륭한 박사[101]가 있느냐?”고 묻자 “왕인(王仁)[102]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모야군(上毛野君;카미츠케노노키미)[103]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아라타와케), 무별(巫別;카무나기와케)[104]을 백제에 보내 왕인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아직기는 아직기사(阿直岐史;아치키노후비토)[105]의 시조이다.

16년 봄 2월에 왕인이 왔다[106]. 태자 토도치랑자는 왕인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전적을 배우니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書首;후미노오비토)[107]의 시조이다. 이 해에 백제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薨)[108]. 천황이 직지왕(直支王)[109]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110]{동한이란 감라성(甘羅城)[111]·고난성(高難城)[112]·이림성(爾林城)[113]이 그것이다.}.
8월에 평군목토숙녜(平群木菟宿禰;헤구리노츠쿠노스쿠네)[114], 적호전숙녜(的戶田宿禰;이쿠하노토다노스쿠네)[115]를 가라(加羅)[116]에 보냈다. 정병을 주며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길을 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목토숙녜 등이 정예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다. 신라왕[117]은 놀라 사죄하였다.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20년 가을 9월에 왜한직(倭漢直;야마토노아야노아타이)의 조상 아지사주(阿知使主;아치노오미)[125]와 그의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츠카노오미)[126]가 그들이 이끄는 무리 17현(縣)[127]을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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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응신기 기년을 백제왕력을 토대로 수정하면 이 해는 404년이 되며, 백제 阿莘王(14년)이다

[95]『古事記』 응신천황단에는 阿知吉師로 나온다. 그런데 『古事記』에서는 아지길사를 왜국에 보낸 백제왕을 照古王, 즉 近肖古王(재위:346~374)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日本書紀』에서는 阿直伎의 천거에 의해 王仁을 초빙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古事記』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日本書紀』 응신천황 20년 추9월조에 등장하는 阿知使主와 아직기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96]현재 奈良縣 橿原市 大輕町 부근이다.

[97]이하 한자표기에서는 모두 ‘岐’로 나온다.輕의 坂 위에 있는 마구간을 가리킨다.

[98]廐坂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체로 백제에 의해 4세기 중후반에 왜국에 승마풍습이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馬冑 등으로 말을 무장하는 것은 5세기 후반까지 내려간다.

[99]여기서는 經書와 典籍이라는 의미로 유교 관련 서적을 말한다.

[100]응신천황의 태자이다. 『日本書紀』 인덕천황 즉위전기에 의하면 응신이 사망한 후 당시 太子였던 菟道稚郞子가 大鷦鷯皇子(후에 仁德天皇)와 서로 황위를 사양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空位 상태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때 大山守皇子가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지만 菟道稚郞子가 이를 알아차리고 大山守皇子를 제거한 후 자신은 大鷦鷯皇子가 천황에 즉위할 수 있도록 xx하였다.

[101]고대 일본의 博士는 율령제하에서 陰陽寮나 大學寮 등의 부서에 소속되어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는 官人을 말한다. 이외에도 대학이나 교육과는 무관한 전문기술자(瓦博士 등)를 박사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본조에서는 막연히 學者라는 의미가 강하다. 『日本書紀』에서는 계체, 흠명기 등에 백제가 ‘五經博士’, ‘曆博士’, ‘易博士’ 등을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6세기대에 백제에 박사제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梁書』卷54 列傳 百濟條에서 백제가 中大通 6年(534)과 大同 7年(541) 두 차례에 걸쳐 梁나라에 毛詩博士를 청하는 기사가 참고된다.

[102]『古事記』 應神段에서는 和邇吉師로 나오며,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文首氏(西文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王仁의 도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에 의하면 阿直岐의 추전을 받아 王仁이 건너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승은 원래는 별도로 되어 있던 것이 후대에 같은 백제계라는 동족적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래 시기는 『古事記』의 경우 照古王(近肖古王)의 시대로 전하고 있지만, 『日本書紀』에서는 응신천황 15년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백제왕력기사를 토대로 120년 내리면 백제 전지왕 원년(405)에 해당된다. 한편 일본의 고승이었던 行基의 墓誌에는 「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라 하여 행기를 王爾, 즉 王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행기의 묘지명에 의하면 왕인의 후예씨족들은 적어도 8세기 중엽까지는 그들의 선조의 본관을 백제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왕인의 실재에 대해서 다른 인명과의 유사성, 전래서적의 편찬시기, 박사라는 용어가 유행한 시기 등을 근거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103]上毛野氏는 下毛野氏와 함께 崇神의 황자인 豐城入彦命의 후예를 칭하는 皇別氏族이다. 천무천황 13年(684)에는 朝臣 姓을 사성받는 당대 유력씨족이었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에 의하면 上毛野朝臣은 『日本書紀』 웅략 9년 7월조에 보이는 田邊史伯孫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河內지방에 있던 田邊史가 東國의 上毛野지방(현재 群馬縣 지역)으로 이동하여 上毛野氏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田邊史는 河內지방의 백제계 도래인 집단으로, 『日本書紀』 웅략천황 9년 7월조에 의하면 王仁의 후예씨족인 書首(西文)氏와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04]『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9년 춘3월조 荒田別·鹿我別 참조.

[105]『古事記』 應神段에는 阿直史로 나온다. 천무천황 12年(683) 10月에 連姓을 받고, 承和 元年(834) 9월에는 阿直史福吉 등 3인이 淸根宿禰로 改姓되었다. 『新撰姓氏錄』 石京諸番下에 「安勅連. 百濟國魯王後也.」라고 되어 있다. 安勅은 阿直과 음이 통한다. 魯王에 대해서는 毗有王의 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史는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기록을 담당했던 씨족에게 주는 姓으로 주로 도래계 씨족이 사성받았다. 史姓은 대체로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史姓을 가진 도래계 씨족으로는 王辰爾의 후예씨족인 船史, 白猪史, 津史가 유명하다.

[106]『日本書紀』 응신천황 15년 추8월조 참조.

[107]文首는 王仁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씨족이다. 『日本書紀』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도래전승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으로 동족으로 馬史, 櫻野首, 高志史 등이 있다. 西文氏는 河內國 古市郡(현재 大阪府 羽曳野市)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행정을 담당했던 문필씨족이었다. 西文氏는 姓이 首로 문필 담당의 史 집단 위에 있었던 존재였다. 천무천황 12년(683) 9월에는 連, 同14년 6월에 忌寸 姓을 받았다. 延曆 10년(791) 4월에는 그 일부가 宿禰로 改姓되었다. 『日本書紀』 민달천황 원년(572) 5월조에서는 西文氏와 東漢氏를 가리켜 ‘東西諸史’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續日本紀』 卷40 延曆 10年(791) 夏四月條에는 西文氏의 후예인 文忌寸最弟가 자신의 조상인 王仁의 출자를 중국 漢高祖의 후예라고 칭하면서 천황에게 宿禰의 姓을 받기를 청하는 기사가 있어, 8세기 후반부터 중국 황제후예씨족임을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新撰姓氏錄』 左京諸番上에도 「文宿禰. 出自漢高皇帝之後鸞王也」라고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이렇게 서문씨가 漢高祖의 후예씨족임을 칭하게 된 것은 前漢시대 王氏가 낙랑지역에 이주하였던 역사적 지식이 반영된 것이지만 씨족들이 조상을 중국황제와 결부시킨 것은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던 시대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倭漢氏가 延曆 4年(785)에 後漢靈帝의 증손인 阿智王을 조상으로 주장한 것과 百濟 왕족에 대한 우대와 같이 왕족 출신에 대한 우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108]阿花王은 阿莘王(재위:392~495)을 말한다. 阿莘王의 사망 시기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阿莘王 14년(405) 9월조와 일치한다.

[109]백제 제18대 왕 腆支王(재위:405~420)을 가리킨다. 전지왕의 귀국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원년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10]『日本書紀』 응신천황 8년 춘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無禮하자 枕彌多禮와 峴南, 支侵, 谷那, 東韓 땅을 빼앗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111]현재 충북 진천지역(『삼국사기』 지리지 今勿奴郡)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112]현재 충북 괴산지역(『삼국사기』 지리지 仍斤內郡)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113]『日本書紀』 응신천황 8년 춘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의 支侵과 같은 것으로 보아 현 전북 任實로 비정하거나, 전북 金堤郡 利城(현재 전북 김제시 靑蝦面), 경기도 臨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마한의 兒林國과 이림의 상관관계를 인정하여 이림을 충남 서천(『삼국사기』 지리지 舌林郡)으로 보거나 충남 예산 대흥(임존성)으로 보는 견해 등도 있다. 그런데 『日本書紀』에서 이림이라는 지명은 현종천황 3년(487) 시세조와 흠명천황 11년(550) 4월조에도 보인다. 여기서 이림은 백제와 가야, 그리고 고구려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로 등장하기 때문에 현재 충북 음성(『삼국사기』 지리지 仍忽縣)이나 괴산일대로 비정하거나 충북 청원의 미호천 일대로 보기도 한다.

[114]『古事記』에서 建內宿禰(武內宿禰)의 아들인 平群都久宿禰로 나오며 平群氏의 조상이다. 『古事記』 履中段에 의하면 住吉仲皇子의 모반사건 때 履中천황을 구출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平群氏는 姓이 臣이었으나 천무천황 13년(684)에 朝臣 姓을 사성받는다. 『日本書紀』에서는 平群木菟宿禰 이후 5세기 중후반 雄略朝부터 仁賢朝에 걸쳐 大臣을 배출하고 있다. 그러나 平群氏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平群谷 고분군의 축조연대는 6세기 중엽 이후이다. 『日本書紀』에서도 推古朝 전후에 平群氏 일족은 蘇我氏와 함께 物部氏討伐軍에 참가하거나 征新羅軍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등 蘇我氏 밑에서 군사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日本書紀』 숭준천황 즉위전기(587)에 物部大連守屋의 모반을 토벌하여 崇峻 즉위에 공을 세운 장군으로 등장하는 平群神手는 平群木菟宿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따라서 平群木菟宿禰는 平群神手를 과거에 투영한 가상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15]的戶田宿禰의 加羅 파견 기사는 『日本書紀』에 보이는 的氏에 관한 최초의 기사인 동시에 的氏의 시조전승에 해당된다. 『日本書紀』 인덕천황 12년 8월조에는 的臣의 조상인 盾人宿禰가 고구려에서 헌상한 철 과녁을 관통시켜서 的戶田宿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的氏는 『古事記』 孝元段에는 葛城長江曾都毘古의 후손으로, 『新撰姓氏錄』 山城國皇別條에 의하면 武內宿禰의 자식인 葛城襲津彦의 후손으로 나온다. 동족으로 葛城氏, 平群氏, 蘇我氏, 許勢氏 등이 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的氏는 任那日本府와 관련하여 河內直과 함께 가야에서 활동하는 등 河內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왜국과 한반도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활약하였다.

[116]고령의 대가야를 가리킨다.

[117]위 기사의 『日本書紀』 기년은 285년이지만,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2간지 내리면 405년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 신라왕은 실성왕이다.

[125]5세기 전반 한반도에서 무리를 이끌고 건너간 인물로, 阿智王이라고도 한다. 대화지역을 본거지로 하는 倭漢直은 東漢氏라고도 한다. 東漢氏는 5세기 말에서 6세기에 걸쳐 河內에 본거를 둔 西漢氏와 비교하여 주로 大和國 高市郡 檜前鄕(현재 奈良縣 明日香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東漢氏 혹은 倭漢氏라고 불렸다. 西文氏와 함께 蘇我氏 휘하에서 정치, 군사, 재정, 각종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이다. 『日本書紀』에는 20여 씨에 이르는 倭漢氏 枝氏가 보이고 있다. 東漢氏의 원래 성은 直이었으며, 천무천황 11年(682)에 連 姓을 사성받았다. 同14년에는 천무 8성의 제4위성인 忌寸 姓을 사성받았다. 그런데 이 東漢氏의 출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續日本紀』 延曆 4年(785) 6월조의 동한씨의 有力枝族인 坂上氏 출신 苅田麻呂의 상표문에 의하면 東漢氏는 중국 後漢 皇帝의 후예라고 한다. 『속일본기』 이외에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및 『삼국사기』에 ‘漢’이 보이는데, ‘漢’은 낙랑·대방지역에 이주해서 생활하던 남북조 시대 이전의 중국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 가야제국 가운데 安羅國 사람들이 이주해 갔기 때문에 ‘아야(アヤ)’라고 부르다가, ‘아야’라는 씨명의 음훈에 맞는 ‘漢’자가 대표성을 갖는 문자로 정착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가야제국의 유력국이었던 안라국이 바로 동한씨 선조의 본거지였다는 것이다. 이를 안라지역 출신들이 왜국에서 다른 가야지역의 이주자나 일부 백제계와도 의제적 동족관계를 맺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126]阿知使主의 아들로 『日本書紀』에는 이후 雄略天皇이 사망할 때 大伴室屋과 함께 星川皇子의 난을 진압하여 清寧天皇을 即位시킨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127]많은 무리를 이끌고 왔다는 의미이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14년에 弓月君이 데리고 온 집단을 120縣으로 표현한 것과 유사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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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149>.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150>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대왜(大倭)의 목만치(木滿致)<151>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木滿致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152>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153>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154>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고 한다.].

28년 가을 9월에 고구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155>. 그 표에 “고구려왕은 일본국에 교(敎)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때 태자인 토도치랑자가 그 표를 읽고 노하여 고구려의 사신을 꾸짖고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며 그 표를 파기해 버렸다.

31년 가을 8월에 여러 신하들에게 “관선(官船) 가운데 고야(枯野)<156>라고 하는 것은 이두국(伊豆國)에서 바친 배인데, 이것이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용으로 쓰인 공로를 잊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명을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목재를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5백 광주리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 한꺼번에 5백 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무고수문(武庫水門)<157>에 모아 놓았다. 마침 이때 신라의 조공 사신이 무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정(新羅停)<158>에서 홀연히 불이 나서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불에 탔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을 책망하였다. 신라왕이 그것을 듣고 크게 놀라서 뛰어난 장인을 바쳤으니, 이들이 저명부(猪名部;이나베)<159> 등의 시조이다. 처음 고야선(枯野船;카라노노후네)을 소금 굽는 땔나무로 태운 날, 타다가 남은 재가 있었다. 이에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 헌상하였다. 천황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금(琴;코토)을 만들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맑아서 멀리까지도 들렸다. 이에 천황이 노래하였다.

<고야의 목재를 소금을 구우려고 불태우고, 타고 남은 것으로 금(琴)으로 만들어 줄을 튕기니, 유양(由良;유라) 해협<160>의 바닷속 바위에 붙어 살고 있는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며 상쾌한 소리가 나는구나.>

37년 봄 2월 무오삭(1일)에 아지사주<161>와 도가사주<162>를 오(吳)나라<163>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164>를 구하게 하였다. 이에 아지사주 등이 고구려로 건너가 오나라로 가고자 하여 고구려에 도착하였지만, 가는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 길을 아는 사람을 구하니, 고구려왕이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165> 두 사람을 딸려 보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그래서 오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166>. 오나라 왕<167>은 이에 공녀(工女) 형원(兄媛), 제원(弟媛), 오직(吳織), 혈직(穴織) 등 네 명의 여자를 주었다<168>.

39년 봄 2월에 백제 직지왕<169>은 그 누이동생 신제도원(新齊都媛)<170>을 보내어 조정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때 신제도원은 7인의 부녀를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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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백제 直支王(腆支王)의 사망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腆支王 16년(420)이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25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294년이며, 수정연대로 계산하면 414년이 된다. 『삼국사기』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면 景平 2年(424)에 餘映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424년에도 전지왕은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0]腆支王의 아들로 백제 제19대 왕인 久爾辛王(재위:420~427)이다. 『三國史記』에서는 420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데, 『日本書紀』에서는 414년에 전지왕이 사망하고 구이신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宋書』列傳 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餘映(腆支王)이 416년(義熙 12)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받았고, 또 424년(景平 2)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측 사서에서 전지왕이 424년까지 조공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을 424년에서 427년까지로 보는 견해와 중국 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420~42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151]『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개로왕 21년조(475)에 한성이 멸망할 때 문주왕과 함께 웅진으로 남하한 인물인 木刕滿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조에 인용된 『백제기』에 의하면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목만치를 낳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만치의 출생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 3월 이후의 어느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두 기록을 결합하여 목만치의 생존연대를 헤아려보면 木滿致는 100세 이상이 되어 버린다. 『삼국사기』에서 목협만치가 5세기 후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日本書紀』 신공기의 목라근자와 응신기의 목만치의 활동 연대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그래서 『日本書紀』 신공기 및 응신기의 목씨 부자 관련 기사를 일반적인 간지 조정법인 2간지가 아닌 3간지를 내려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日本書紀』의 목씨 부자 관련기사를 3간지 내리면 『日本書紀』의 목만치 기사와 『삼국사기』의 목협만치 관련 기사 사이에 생기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지만, 목만치는 구이신왕대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한편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명이인으로 활동한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비류왕대의 병관좌평인 解仇와 문주왕대의 병관좌평 解仇 등 백제사에서 동명이인의 경우가 종종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152]『日本書紀』에 나오는 ‘任那’는 가야지역 전체 경우와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료에서는 任那加羅, 任那加良이 보이는데, 가야지역 전체를 ‘任那’로 적은 경우는 없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任那 참조.

[153]『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6년 춘3월조 貴國 참조.

[154]大和정권을 가리킨다.

[155]고구려 광개토왕(재위:392~413)과 장수왕(재위:413~491) 치세에 왜와의 관계는 계속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고구려가 왜에 조공이나 표를 바쳤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한편 표에서는 고구려왕이 왜에 敎를 내렸다고 나오는데, 敎는 「광개토왕비」에도 종종 보이는 표현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156]『日本書紀』 응신천황 5년 동10월조 枯野 참조.

[157]『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원년 2월조 務古水門 참조.

[158]신라사신이 임시로 머물던 곳이라는 의미로 특정 지역명 혹은 건물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59]木工技術을 가진 도래인 집단을 일컫는다. 위 기사에 의하면 신라에서 건너간 목공들은 아마도 猪名川(현재 兵庫縣 尼崎市 북동부) 주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猪名部라고 부명이 붙었을 것이다. 『新撰姓氏録』의 攝津國諸蕃에는 저명부에 백제인들도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160]『延喜式』 신명장에 보이는 淡路國 津名郡 由良溱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兵庫縣 洲本市 由良町에 해당된다. 由良이라는 지명은 근처 해협에서 조류가 흘러갈 때 금(琴)을 탈 때 나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유라’라고 소리가 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61]『日本書紀』 응신천황 20년 추9월조 참조.

[162]『日本書紀』 응신천황 20년 추9월조 참조.

[163]여기서 吳는 중국 남조를 가리킨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37년의 『日本書紀』 기년은 306년이지만 백제왕력기사를 참고하여 120년 내리면 426년이 된다. 이 시기 중국은 남조 宋 文帝의 원가 3년에 해당한다. 『송서』 왜국전에서는 왜왕 讚이 司馬曹達 등을 보내 표와 방물을 바쳤다고 적고 있지만, 『日本書紀』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164]『日本書紀』 응신천황 14년 춘2월조 縫衣工女 참조.

[165]두 사람 모두 여기에서만 보인다.

[166]왜가 중국 남조로 가기 위해 고구려를 경유했다는 것, 고구려왕의 지원을 받아 오나라에 다녀왔다는 설정은 경로로 보나 왜와 고구려의 관계로 보나 어색하다. 남조를 가는 데는 백제를 경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시 왜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167]여기서는 중국 남조 宋 文帝를 가리킨다. 위의 주 참조.

[168]『日本書紀』 응신천황 41년 2월조에 그 후일담이 나오며, 同 웅략천황 14년 정월조와 내용이 비슷하다. 『日本書紀』의 오나라 工女 도래기사는 아지사주와 도가사주의 후예인 동한씨의 씨족전승을 바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기사들은 5세기대 동한씨가 도래계 이주민을 거느리는 유력한 씨족으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동한씨는 뒤에 중국 後漢 皇帝의 후예라고 주장하게 된다. 단 위 기사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169]『日本書紀』 응신천황 25년조에서 직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한 것과 모순된다. 응신천황 39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308년으로, 수정연대를 적용하면 428년이 된다. 428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毗有王 2년에 해당된다. 『삼국사기』에서는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자로서 427년에 즉위하여 455년에 개로왕이 왕위를 이을 때까지 29년간 재위한 것으로 나온다. 중국사서인 『宋書』 百濟傳에 의하면 餘毘(비유왕)가 元嘉 7년(430)과 27년(450) 두 차례에 걸쳐 조공하였다고 한다. 그 이전인 元嘉 2년(425)에 餘映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에 餘毘의 즉위는 425~430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즉 비유왕의 즉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중국 측 사서가 비슷하게 전하고 있다.그런데 『日本書紀』에서는 『삼국사기』 및 중국 측 사서와 달리 毗有王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참고로 『日本書紀』에 보이는 백제왕은 12대 근초고왕부터 18대 구이신왕까지, 20대 개로왕부터 27대 혜왕까지, 그리고 30대 의자왕이다. 1대부터 11대까지의 계왕과 19대 비유왕, 28대 법왕과 29대 무왕은 『日本書紀』에 보이지 않는다). 비유왕의 재위기간인 427~455년 사이 『日本書紀』에 등장하는 백제왕은 직지왕(전지왕)과 개로왕이다. 개로왕의 경우 『日本書紀』 웅략천황 2년 추7월조에 인용된 『백제신찬』에서 己巳年(429년으로 추정)에 즉위한 것으로 적고 있다. 이에 『日本書紀』 편찬자가 120년 인상된 『日本書紀』의 기년을 조절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비유왕대를 소거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蘇我氏의 조상인 木羅斤資 관계가 원래 비유왕대의 기사였는데, 이를 간지 3운(180년)을 올려 신공황후 섭정기에 놓음으로써 비유왕대의 기사를 말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日本書紀』 웅신천황 25년조와 同 39년 춘2월조의 모순된 백제왕력 기록과 웅략천황 2년 추7월조에 기사년이라는 기년을 기록한 『日本書紀』 편찬자의 의도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웅신천황 39년 춘2월조의 경우는 백제왕명의 단순한 오기로 볼 수도 있으며, 웅략천황 2년 추7월조의 경우 『日本書紀』 편찬자가 실제 비유왕대의 것을 말소하고자 했다면 기사년이라는 간지를 생략해도 되는데 굳이 쓴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170]直支王의 누이라는 기록만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日本書紀』 웅략천황 2년 7월조에도 천황이 백제에 女郞을 요구하여 蓋鹵王이 適稽女郞을 보냈다는 유사한 기록이 있어 新齊都媛과 適稽女郞을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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