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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26 18:44
[기타] 여진은 조선을 대함에 있어 '타민족'이 아닌 동일 민족으로 보았다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5,331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8799&C_CC=AH
필자: 김관웅(연변대학 교수, 문학박사)

개요: 북한함경북도와 간도두만강연안에서 조선민족들가운데서 만주와 관련된 고기와 형태의 전설이 가장 많다. 고고학자료에 따르면 청조의 누르하지부족의 발상지는 북한함경북도의 3진과 간도지역으로 이씨조선왕실의 조상과 누르하지의 조상은 매우 밀접한 혈육관계가 있다고한다. 그러나 조선전설은 중화(대중국)사상으로 여진(麗地고려-고구려-부여의 준말여땅의 발음그대로 부른것의 변화라한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편견으로 인한 분열임을 알수 있다.
  
  
   1) 여진과 두만강연안 및 조선왕실과의 조상혈통
  
   처음에 여진은 당조시기 예맥(貊貉-黑水靺鞨이라고도 하는데 濊貊의 한갈래)에서 발전하여 나온것이며 발해가 거란에 망하면서 송화강 흑룡강(중-러북부변경의 강)과 러씨아 연해주에서 생활하면서 남자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위주로하고 여자들은 돼지(도야지)를 기르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고구려시기에는 고구려에 최하층으로 “15만의 군을 동원하여 고연수의 영도하에 당나라에 대항하여 안시성에서 싸웠다.) 발해당시 왕족은 고구려귀족이듯(원성은 고씨인데 대진국을 세워 대씨성을 가졌다는 설이 있듯이 아버지는 고고중상으로 사서에 기록)이 여진이 금나라를 세울때 왕실은 고려인 김한보(함포, 조상은 신라인)와 형 아구시(김한구씨-씨는 형이므로 존경해서 부른것 아닌가 생각한다) 동생 아고내(김한곤)는 모두 왕고려에서 왔으며 여진인백성들은 대부분이 왕고려에 귀속되여 살았다[1].。
  
   (12세기초),김한보의 후손 아구다(김구가 이름이고 다는 우리말 맺음말 이다의 다가 아닌가)는 여진인부락을 통일하여 금나라(1115—1234)를 건립하였다。금나라는 강성할때 중원을 정복하고 장강이북의 지역을 100년정도 통치하였다. 그들은 문자를 창제하여 중국인과의 융합을 방지하였다. 후에 몽골의 원나라가 통치할 때 合兰部、水达达等의 관할을 받았다。
  
   중국의 명조시기 여진은 건주여진(두만강) 해서여진(송화강) 야인여진(흑수에서 북극부근의 캄챠카반도까지)등으로 나뉘였다.건주여진은 조선왕조와 관계가 밀접하였으며 建州란말도 간도州에서 기원하였다한다. 후에 명나라(중국)는 만주에 눌간도를 설립하였고 1403년에 두만강을 눌간도 건주위에 편입시켰으며 아합출(李합죽-우리말로 합죽은 어떤사람을 지칭한는것 다알지요)을 지휘사로 임명한다.
  
   1410년에서1412년사이 또 오늘의 중국길림성 훈춘과 오늘의 조선함경북도경원 회녕일대에 건주좌위를 설립하고 멍구태물을 지휘사로 임명한다.。 건주여진(일명 간도여진)이 두만강에 대한 통치는 고려공민왕시기(1356년)부터이며 후에 이씨조선왕조의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지춘이 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있으면서 시작된다.
  
   이성계도 공훈을 세웠는바 조선왕조를 건국한 초기 조선의 관할범위는 두만강하류지역까지 달하였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우디하 우량하 어내물세개의 큰부락이 대치상태에 있었는데 세종대왕시기에 적극적인 북진정책으로 1432년부터 1449년까지17년간 간도6진(6개의 도시를 지칭)을 설립하였다。후에 건주좌위(建州左卫)의 여진인은 간도6진의 압박을 피하여 백두산 남쪽푸주강(오늘 중국혼강 고구려발상지)에 거주하는 이만주(이합죽의 후손1407-1467)의 요청으로 대부분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연변의 훈춘지역에서 생활하는 만주인들은 그때 당시 따라나서지 않고 여전히 남아서 생활한 사람들의 후손(진짜 이성계가문?)이다.。두만강지역에서 이주한 건주와위의 여진인들 중에서 후날 청왕실의 왕족이 나타났으며 두만강지역에서 현재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한 건주좌위여진인들은 만주족을 형성하였다。
  
   누르하지의 선조인 멍구태물(?—1433)은 명나라에 의하여 현재의 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지역의 건주좌위도지휘사로 임명되였었다。멍구태물은 명나라와 조선왕조의 변경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434년 우디하부락의 습격으로 사살되였고 조선회녕에서28키로되는 현재 북한 양강도풍산군에 다가“화장하고 골회는 땅에 묻었다”.[2](P329)。
  
   풍산군은 자고로 여진족이 생활한 지역으로 풍산개는 영리하고 사냥하기로 소문높다.。멍구태물이 소속된 어들이부락의 주력이 푸주강일대로 이주하게된시기는 멍구태물이 죽은후 얼마되지 않은 때이며 멍구태물의 6세손 누르하지는 오늘의 요녕성신빈지역으로 이주한후 태여났다.
   아신제로는 만청 건국자 누르하지의 가족성씨이며 “아신”은 황금(그래서 신라도 김씨성 택한가?)이란 뜻이고 “제로”는 성씨이다.
  
   만주황실의 아신제로 성씨유래는 시조 부구리(북고려)옹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사람(옹순)은 몽골 원나라 시기 설립한 어두린만호(들판의 만호)의 제1임만호이다고 인정한다.。즉 누르하지의 선조는 두만강지역에서 생활한 어두리(들판의)부족임을 알수 있다.。
  
   일부학자들은 어두린은 원나라가 오늘의 흑룡강의란현일대에 설립한 5개여진부락”군민만호부”로서 후에 남으로 이주하여 오늘의 길림성훈춘과 조선 함경북도 회녕일대에 왔다고 주장한다。[3](P89) 그러나 많은 역사기록은 만청왕실의 누르하지의 시조부족의 발상지는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간도)지역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하기에 조선함경북도와 중국연변(간도)지역의 조선족들속에는 누르하지와 그의 사적과 연관된 전설이 많이 전해져내려오고있다。뿐만아니라 이러한 전설중에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이성계의 조상이 함께 등장한 다.。실례를 들면 두만강하류 함경북도 경원군에 전해지는 전설《赤池 (적지)》에서 이성계의 5세조인 목조와 6세조는 몽골원나라시기에 따루하지 (达鲁花赤-달로화적)로 되였다.
  
   이는《룡비어천가(龙'134;御天歌)》 제4장의 기록에 어울린다.。이는 이러한 전설의 대부분이 역사사실을 시본적으로 반영하며 결코 민간의 어느사람이 임의로 지은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경원군에서 생활한 이성계의 고조 안사(安社)는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떄 쌈지대왕(散吉大王)에게 투항하여 중국남경을 통치하는 오동(斡东)5000가구의 따루하지로 되여 수천가구의 여진인을 통솔하였다。
  
   안사(安社)의 아들 행리는 비록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기로 되여있었으나 전란으로 인하여 오늘의 함경북도경흥지역에서 함흥 영흥지역으로 피난하였다。1335년 영흥에서 출생한 이성계는 고려공민왕5년(1356)부터 종군하여 해마다군공을 세우고 고려신우8년(1382)고려동북방명의 지휘사로 되였다.이성계는 날로 성장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씨조선왕조를 건국하기위하여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때그의 신변에 동두란이라는 용장이 있었는데 그가 누르하지의 조상으로 조선왕실의 조기역사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중국의 일부학자는 이성계가 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만주의 기원전설과 함경북도의 연관성
  
   만주인의 기원설에 따르면 만주인의 발상지는 백두산의 동부지역이다. 《장백산(백두산)동남에 부꾸리(북고려)산아래어 못이 있었으니 이름을 부래호(발해호)라 한다.전설에 따르면 세선녀가 이못에서 미역을 감고있는데 하늘까치가 날아와서장백산의 동북쪽폭포아래에 선녀가 셋이 내려와 모욕하게 되였는데 큰언니는 이름이 은실이(恩石倫 은시리) 둘째언니는 정실이(正石倫정시리) 셋째는 분실이(佛石倫 분시리?) 이다.
  
   그들이 미역을 마치고 떠나려는데 하늘까치(神鵲) 날아와서 입에 물고있던 붉은 과일(朱果-혹은 주몽의 후손을 암시한걸가?)를 셋째 분실이의 옷에 떨어뜨리였다. 분실이는色彩鲜妍한 과일을 손에서 떼려 하지 않다가 입에 물었는데 그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모두들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분실이만 돌아갈수 없게 되였는데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분실이의 몸을 검사해보고 “이는 하늘이 너에게 임신하도록 하였으니 아이를 낳은후 몸이 가벼워져 가히 돌아갈수 있다.这是天授妊娠于你,等你生产以后,身子轻了再回去罢。”고 하였다.
  
   그리하 분실이는 출산하게 되였는데 체격이 괴상한 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선녀는 朱果에 깃든 사연을 알려주고 성씨를 아신제로라 하고 이름을 부구리(북고려)옹순이라 지어주고는 하늘로 날아버렸다. [4]이렇게 되여 남자아기는 배를 얻어타고 강물살따라 하류의 나루터에 도착하였고 언던에 올라가서 버들나무와 갈때로 걸상을 결어 앉아 있었다.
  
   당시3성(三姓)지역의 사람들은 왕위를 쟁탈하기위하여 싸움이 끊이지 않았는데 한사람이 강에 물길으러 왔다가 남자아기를 보고 이상히 여기여 많은 사람들을 불러왔다. 모두들 보니 남자애는 과연 비범한지라 “천지신의 아들이네. 어떻게 여기까지 온거요?”하니 남자애가 “천지신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여 3성(三姓)지역의 전란을 평정하라고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말에 사람들은 남자애를 가마에 태워3성(三姓)지역으로 모셨다.북구려 옹순은 장백산(백두산)의 동부오무해평원(오목해—분지라는말인가?) 오두리성(들의城-벌판의 도시)에서 전란을 평정하고 국호를 만주(曼珠혹은滿珠-만조선의 의미가 아닐가)라고 하였다.》
  
       이전설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이는 흑룡강성이북이라는 설이 있고 어떤이는 흑룡강의 애훈현(러씨아)이라고 하고 어떤이는 연변(간도)의 돈화시 오동성이라고 한다.《흠정만주원류(钦定满洲源流)》卷8권《강역(疆域)》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만주인의 조상은 장백산 동부의 오무해(오목해) 평원오두리성에서 생활하였다. 이도시는 흥경에서 동으로 1500리되는곳으로 녕고탑성 서남330리의 리뿌싼강 서쪽 연안에 있다. 》  
  
   그위에 얘기한 건주좌위 여진족은 원나라말기에 흑룡강 의란현의 五个“军民万户侯”의 하나인 오두리부(鳌朵里部)이며 원나라 말기에 남하하여 목단강동안으로 이주하였다.。명나라시기에 또 돈화로 이주하여 누르하지의 6세조멍구태물이 돈화에서 출생한것이다。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오두리성이 연변의 돈화시오동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돈화시는 백두산 북쪽이며 북구려옹순의 전설에는 “백두산동쪽”이라고 한것과 틀리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없고 三姓地区를 찾을 수도 없다。중국의 근대 청나라 역사학의 정초자인 맹삼(孟森1868—1937)은《明清史论著集刊正续编》에서: “북구려 영웅은 타국의 왕으로 되여 대조(청제국)의 판도내에 있으나 천자를 배알하지 않으니 부하들을 다스릴수 있겠는가。그들이 차지한 지역은 오목해의 오두리성이다. 오목해는 후에 어묵해로 개명하고 오목한곳이라고 하며 오두리는 후에 어두리라고 개명하고 오다리鄂多里라고도 불리우는 데 백두산동남쪽이다”。
  
   《实录》에는 또경조이후 헤투알라에 거주하였는데 오두리성에서西천오백리(1500리)된다고하였고《东华录》에서는 西자가四자로(4500리)되였는데 어느것이 틀리는지 알수 없다. 청제국의 여러황제들은 조상의 뿌리를 찾기위하여 요동과 송화강유역에서 임의로 장소를 선택하여 어목해어두리로 지정하고 실제지역이라 하였다.
  
   또 3성(三姓)에 따라 송화강이북을 3성지역이라고 억지로 갖다맞추었다.。그러나 억지로 지어낼수로 더욱 부합되지않는법이다.사실은 처음에 전설을 기록한《实录》은 수정을 하지 않은 원본으로 “어목해지역의 어두리성은 백두산동남임”이 확실하다.그러나 후에 남(南)자 한 글자를 빼버리였는데 사실은 고려경내이지 송화강지역이 아니다.(중국측주장)
  
   “일본고고학은 조선종성의 오목해(斡木河)가 실제 《청실록(清实录)》에서 말하는 어목해이다고 하였는데 가장 정확하다.”[5](P65-66) “청나라가 중원에 진출하기전에 여진본인들은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시조의 고향인 오두리가 백두산동쪽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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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8-06-26 19:11
   
“일본고고학은 조선종성의 오목해(斡木河)가 실제 《청실록(清实录)》에서 말하는 어목해이다고 하였는데 가장 정확하다.”[5](P65-66) “청나라가 중원에 진출하기전에 여진본인들은 조선에서 갈라져나온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시조의 고향인 오두리가 백두산동쪽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중원으로 진출(入关)이후 순치황제나 강희황제시기에 이미 원로들은 모두 없어지고 문자고증은 모두 중국한족손으로 하였기에 명나라사람들의 안광으로 조선과의 변계를 보았기에 함경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믿고 자기들의 조상의 지역을 버리고 백두산이서라고 주장하면서 흥경을 뿌리고 삼았다.[5](P73)
 
     두만강지역과 건주좌위 여진 즉 누르하지의 조상과 밀접한관계가 있다고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두만강지역의 조선함경북도와 연변(간도) 조선민족의 전설과 지리명칭에서 단서를 찾아본다.
 
  3) 두만강지역의 조선민족 전설속에서 누르하지
 
  두만강지역의 조선민족전설중에서 함경북도 회녕군과 경원군에서 전해지는《청태조전설(清太祖传说)》[6](P34-40) 중에서 누르하지의 이미지와 연변용정에서 전해지는《누르하지출생전설(努尔哈赤诞生传说)》및《한왕산전설(汗王山传说)》비교[7]
 
  《청태조(清太祖传说)》과《누르하지(努尔哈赤诞生传说)》전설은 모두 후백제의 견훤전설과 일본의 《三轮山传说》과 유사한바 모두 “夜来者型传说”이다。중국의 민간문학연구학 ㄱ종경문이 수집한 조선족의《清太祖》传说:  
 
  조선회녕의 두만강변에 이좌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결혼나이를 넘은 딸이 있었는데 결혼하기전에 임신하였다.이일을 알고 부모들은 매우 노여워서 딸을 고문하였더니 밤마다 어떤남자가 자기방에와서 자고는 새벽이면 떠나간단다.。부모님은 이 괴한의 정체를 알기위하여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서 딸보고 남자의 옷에 꽂으라고 하였다.。
 
  이튿날아침 날이 밝자 실따라 찾아가니 명주실은 강을 건너 산속에 들어갔다. 알고보니 명주실은 산속의 고성(古城)의 못에 들어갔다。못의 물을 다 퍼내자 몸에 바늘이 꽂힌 수달(水獭)한마리가 못속에 엎디여 있었다. 이좌수의 딸은 남자아기를 낳았으니 이아기는 머리카락과 눈 및 피부가 모두 누르스름하였다.그래서 누르하지(누르스레와 누르하지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중국은 주장)라고도 불리웠다.
 
  이아기가 후에 어떤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은 3형제낳으니 그가운데 셋째가 청태조 황태극이다.
 
  조선회녕군과 경원군에서 전하는《청태조(清太祖)》전설은 상기의 소재외에 또”풍수선생”소재와 “천자의검”소재 “이적夷狄”소재가 더 첨가되여 있다.
 
  중국 연변(간도)용정시 삼합 등지의 조선족들속에 전해지는 《누르하지전설》은 비록 함경도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갖고 온 전설이지만《한왕산전설(汗王山传说)》부분이 첨가되여 회녕군의 《清太祖》중의 “강을 건너 이전의 3성(三姓)지구에서 누르하지의 부친 수달을 발견하였다는 소재와 연관이 있기에 흥미롭다.
 
  한왕산은 중국용정시 부유향조동촌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회녕과 강을 사이두고 마주있다.。산위에는 산성(山城)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한왕 누르하지가 세운 것이며 한왕산이라고 한다.。일찍 누르하지가 산성에 있을 때에 주변에 두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3형제가 대치하고 있었다.。한왕누르하지는 힘이 장사여 보검과 준마를 갖고있었기에 두장군은 적수가 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满族源流考》에서 말하는“만족의 북구려옹순은 오목해평원의 오두리성에 자리잡고 3성(三姓) 즉 여진인3부락을 평정하였다는 주장과 부합된다. 연변대학 崔羲秀교수는 이러한 전설에 근거하여 누르하지의 선조발상지는 회녕부근이라고 하였다.
 
  언어학으로 고찰하면 이 주장의 정확함을 알수있는 흥미로운 일이다.。
 
      조선의 회녕은 백두산 동쪽이며 만족이 말하는 방위와 일치하다.。특히 전설속의 세 성씨가 생활한지역은 회녕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만주어에서 “삼三”ilan(여진말로도 ilan)。“성姓”은hala이다。그러므로 三姓은 만주어로 “ilanhala”。부분학자들이 만주족의 발상지가 흑룡강 이란현이라는 원인도 만주어의ilan(三)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어“ilanhala”는 합성어로서 만일 앞의 단어 이란ilan을 한족말로 번역하고 뒤의 단어hala를 그대로 발음하면“三hala”즉 삼하라“三哈拉”이다。“삼하라三哈拉”는 변이되여 삼하“三哈”로 또다시 삼합“三合”으로 변하는것은 아주 가능한 것이다。“三合”마침 회녕과 마주하고선 중국의 三合镇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용정시三合镇의 三合가 실제 만주어 절반과 중어 절반으로 된 지명이다.。누르하지의 출생전설은 조선 회녕 중국 삼합에서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한왕산은 삼합의 서쪽에 있다.그러므로 한왕산의 산성이 오두리 산성이다.[7](P12)
 
  그때 조선반도 함경북도에 번호-“성아래 야인”이 살고 있었다.。소위 “성아래 야인”이란 명나라 이전에 이곳에서 생활한 여진인 후예와 명나라 초기에 이곳으로 이주온 오두리 우량하 우디하부락을 지칭하는 데 와르크라고도 한다. 1609 년 누르하지는 명나라에 상서하여” 린국 조선경내의 오르크인은 모두 우리에게 예속되므로 조선에 거주하는 자를 조사하여 돌려달라”고 하였다.[8]
 
  그러나 이들 여진인은 1945년 8.15광복을 맞으며 대부분 조선내지인 이남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은 동부기원설을 부인하고 북부 흑룡강기원설을 주장하는데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 전후(약15세기전후) 조선회녕과 용정시 삼합일대가 누르하지의 조상의 주요 활동지역이였다. 만족의 기원전설도 이지역을 배경으로 산생한것이다.
 
  4) 두만강지역의전설에서이성계의 여진인이미지
 
  두만강연안에서 함경북도 6진(6개군읍)과 간도지역에서 비중이 가장 큰것이 조선왕조 이성계에 대한전설이다. 예를 들면 경원군에서 전하는 《적도赤岛》 《적지赤池》、《명사수善射手》、《천자와 국왕을 출생시키는 풍수명소 能出天子和国王的'118;水宝地》[6], 그리고 허해룡이 함경남도 북청 함경북도 명천에서 전해지는 전설《이성계와동두란李成桂和佟道兰》전설을바탕으로 한《李成桂》[11](P1-107)등에 많은 여진인이 등장한다.
 
  《이성계李成桂》에 따르면 이성계가 젊었을때 동두란이라는 여진인 출신의 딱친구가 있어 이성계의 한쪽어깨처럼 도와주었다. 이 작품은 허구가 아니며 전설을 바탕으로 한 야사형식의 역사소설이다.。이소설에서 나오는 동두란은 누구인가(작가가 동佟도랑을 잘못기술한것이 아니고 함경북도명천에서 줄곧 동두란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주해에서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을 동멍구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명실록》에는 “신종만력17년 9월 신미에 건주의 오랑개(獒琅开)추장인 동누르하지를 개원도독감사로 봉한다(童努尔哈赤为开元道督监使)”고 기록 되어 있다. 이로 부터 청태조 누르하지는 성이 동(童)이다.
 
  《동이고략东夷考略》는“누르하지 성은 동씨이다(努尔哈赤姓佟)。”佟씨는 여진인가운데 대가족에 속하며 童과佟은 음이 같으므로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즉 청왕실의 성씨가 동임은 확실하다[10](P156) 사실은 누르하지의 6세조 멍구태물은 명나라 관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로부터 만호로 책봉되였고 세조는 또 그를 상장군으로 승진시켰다.
 
  명나라 선덕8년(1433년), 멍구태물과 그의 아들 아구는 다른 여진인 칠성부락에 의하여 사살되였다. 요행 생존한 다른 한 아들 동창(童仓)과 범철(凡察)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는 누르하지의 조상과 이성계의 관계가 밀접함을 제시해준다. <<이성계>>에서 등장하는 여진인 동두란은 실재인물로 고려말기의 장군이며 조선왕조초기의 개국공신이며 젊은시절에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1331—1402)이다.
 
  이지란의 원래성은 동씨이고 본명은 고려둘한태물(古论豆兰帖木儿-구룬도란테무얼)이다. [12](《李之兰》,P255》태물은 몽골이름으로 대다수 여진인들은 이름뒤에 태물이라고 붙이였다. 이성계의 조부인 이춘의 몽골명은 부연태물孛'068;帖木儿 마찬가지로 태물이라는 말이 뒤에 붙는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몽골이름은 우루사불화吾鲁思不花이다.
 
  그러므로 古論은 고려를 의미하는것이 아닐까 고려의 장수로 있었으니 둘한(두란)은 당연히 이름이며 그래서 그의 고향인 함경남 도북청에서 전하는 전설에는 동두란으로 전해지고 있는것이다.[6] (P70-72) 이지란은 이성계를 따라 남정 북벌하면서 무수한 공을 세웠으며 건국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날로 팽창하는 권세욕에 불만을 품고 은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전하는<<황제와 국왕을 산출하는 풍수지리>>[6](P32-33)라는 전설에는 동해의 가운데 돌섬이 있는데 룡의 기운이 가득하여 황제를 산출하고 국왕도 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 섬을 발견하였으나 수영을 모르기에 동두란을 시켜 건너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누르하지가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신빈현의 압록강변의 평안북도의 전설에는 누르하지와 관련된 전설이 한편도 없다.
 
  이는 두만강 회녕일대가 누르하지의 조상이 발원한곳임을 제시한다. 상기의 전설들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소위의 문명의 편견으로 인한 야이-여진인에대한 잘못된 태도로서 이러한 진정한 원인은 중국의 한족문화에서 기원한것으로 소중화주의 관념으로 인한 누르하지에대한 차별이다. 사실은 여진인과 조선인은 인종적으로 유전적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깊은 혈연적관계를 갖고 있다.
 
  여진인들은 조선인을 대함에 있어서 “非我民族 타민족”이 아니라 동일한 민족으로 보았으며 사실또한 본질적으로 보면 동일한 민족이나 분업으로 인한 문화상 잠시적으로 낙후할뿐이였다. 누르하지는 만주를 통일한 후에도 만주8기 한족8기 몽골8기를 두었으나 유독 조선인을 모두 만주8기에 편입하였다. 이는 현재 신빈일대의 만주인이 사실상 고려말기 이주해 온 조선인이라는 것을 통해 알수 있다.
뚜리뚜바 18-06-27 17:25
   
잘봤습니다. 흥미롭네요
위구르 18-07-05 17:21
   
홍타이지 왈 ''왜 가까운 동족을 멀리하고 먼 이족을 가까이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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