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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6 19:18
[중국] 의화단의 난과 그 배후 서태후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077  

청나라는 아편전쟁의 패배와 영국,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불평등조약 체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양무운동의 전개로 이러한 내리막길은 일시적으로 저지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몰락을 시작한다. 이런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유럽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유교 등의 동양사상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마음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앞잡이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반외세, 반서양 감정이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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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는데, 이들이 중국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중국인들의 반감이 커졌다. 그리고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횡포를 부렸다. 또 중국인들은 선교사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국이 기독교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 의화단의 봉기 및 만행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이었다. 소규모 지반이던 이들은 무술을 기반으로 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남아있던 백련교 세력과 결합하면서 큰 무리가 된다.  청의 사주를 받아 '청을 돕고 함께 양이들을 물리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세웠고 외국인들이나 공사관에 공격을 가했다.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고 4만 5,000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독교인들마저 살해되었다.

이렇게 의화단의 계속되는 자국인은 물론 외국인 공격에 분개한 서구는 청 조정에 의화단의 진압을 요청했지만, 청 조정은 진압을 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을 옹호하기까지했다.

당시 의화단은 잔혹행위가 심각했는데 학살과 고문 외에도 서양 여성과 기독교를 믿는 자국민 여성을 붙잡으면 곧바로 옷을 벗기고 돌아가면서 윤간을 한 뒤 산 채로 땅에 묻어 죽였다. 

특히 서양인에 대한 증오가 강했던 의화단은 서양 여성의 경우 좌용(锉舂)이라고 하여 무참히 윤간한 후 젖가슴과 음부를 짓뭉개는 등 각종 끔찍한 처벌을 한 후 죽였다. 이후 외국 공관이 의화단에 포위당했을 때 피신해있던 서양 여성들은 이미 의화단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자결을 준비할 정도였다. 

더구나 양인 여자 1명을 죽이면 은 50냥을, 양인 아이 1명을 죽이면 30냥을 상금으로 주었는데 이런 상금을 받기 위해 기존 의화단 단원만이 아니라 중국인들까지 도처에서 살인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서양제 성냥이나 연필을 쓴다는 이유로 일가족을 몰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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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된 의화단의 만행을 정리하자면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개는 좌용(锉舂)과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굽는 소마(烧磨), 물속에 넣고 삶아서 익혀 썰어먹는 포팽(炮烹) 등이 벌어졌으며 그 외에도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고(活埋), 팔과 다리 각을 뜯고(支解),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통째로 싹둑 자르는(腰杀) 등의 살해 방식이 이루어졌다. 의화단 운동에서 8개국 연합군이 벌인 만행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의화단이 벌인 이런 만행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청나라의 선전포고(의화단의 난을 서양세력의 힘으로 진압하려한 서태후의 계략) 

청나라의 태도에 영국 등 열강들은 자체적으로라도 병력을 동원해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시모어를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베이징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러나 청은 군을 동원해 이들이 베이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청의 조정에서는 회의 끝에 서양과 강화하자는 광서제의 의견을 묵살하고 서태후가 의화단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

청 조정은 1900년 6월 21일에 서양과 전쟁상태에 들어갔음을 포고하고, 베이징에 있는 외국인 지역을 포위한 후 이미 의화단의 대규모 무장폭동이 일어난 텐진에서 안전을 위해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권고한다. 독일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는 이에 항의하러 가다 만주족인 엔 하이가 지휘하는 의화단 무리의 공격을 받고 살해당했다. 이에 독일 공사관을 경비하던 독일 해군 육전대원들이 보복이랍시고 청나라 외무아문(외교부)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공무원들을 잡아 팼다고 한다. 또한 일본 공사관의 스기야마 아키라 서기도 의화단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한편 베이징에도 의화단이 일어났고 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외국인 지구로 도망쳐 약 4,000여명이 외국인 지구에 갇히게 된다. 청나라 정부는 자신들의 군대로 호위해서 톈진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안전을 우려한 외국인 지구 측에서 이를 거부했고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해 주었고 공격도 중단하였다.

3. 8개국 연합군 결성과 베이징 함락

이 당시 서구 열강들끼리 경쟁 대립 구도, 혹은 적대 구도가 있었는데 "그레이트 게임"(영국 ↔ 러시아 제국)이라든지 "비스마르크 체제"(프랑스 제3공화국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이탈리아 왕국), 영국 ↔ 프랑스 제3공화국(파쇼다 사건),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의 분쟁이 빈번했다.그러나 이들 모두(+일본 제국)는 의화단에 의해 자신들의 이권이 침탈당하고 자국민이 학살당하자 그에 분노해 연합군을 조직해 청을 공격하기로 결의한다. 그 수는 지상병력만 48,000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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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주력은 일본군(해군육전대 포함 21,000명)과 러시아군(수병연대 포함 13,000명), 그리고 영국군(해병대 포함 12,000명)이었으며, 여기에 프랑스군과 미군이 각각 3,000명, 독일군이 해군 보병과 육군을 포함 900명, 이탈리아군은 해군 함정과 육군의 베르살리에리 연대를, 오스트리아는 해군 함정만 파견하고 각 함정의 육전대원을 모아 중대 이하 규모로 명목상의 지상군을 편성해서 독일군 또는 영국군 지휘 하에 들어갔다.

원정군 사령관은 병력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국 외교관이 피살된 독일에서 맡아, 총사령관으로는 독일군 참모본부 참모총장을 지낸 독일육군 제3군 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데르제 육군 원수가 임명되었다.

한편 동남지방의 청나라 원로 관료들은 동남자보선언으로 의화단의 세력 확대를 저지했고, 이에 군사력을 집중할수 있게된 열강은 텐진을 공격해 함락했다. 애초에 이홍장, 위안스카이 등의 청의 군벌들이나 지도층 대부분은 의화단을 진압해야 할 토적으로 보았지 손을 잡을 상대로 보지 않았다. 

이후 연합군 내에서 서로간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연합군을 상대로 청, 의화단은 계속해서 패배했다. 청군과 의화단의 무장이나 조직력이 형편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선전포고한지 2달도 채 넘기기 전인 8월 13일에 베이징은 연합군에게 함락당한다(제2차 아편전쟁 이후 두번째). 서태후와 광서제는 간신히 도망치는데, 서태후는 수도에 남아 강화하려는 광서제를 반강제로 대동하고 15일에 베이징을 빠져나와 천춘쉬안의 보좌를 받아 서안(장안=시안)으로 도망쳤다. 

임자 없는 베이징은 혼돈상태가 되었고 연합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파괴행위를 자행하였다. 당연히 의화단은 궤멸되었고, 의화단이 아닌 수많은 중국인들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이화원 등 많은 건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특히 독일군이 제일 심했고, 미일의 군대가 그나마 나았다. 


4. 전쟁의 종결과 결과

결국 청 정부는 전쟁에서 대패하여 화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독일은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이 독일에 가서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 

이후 열강은 신축조약을 체결해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떼어갔다. 그리고 서태후는 자기가 일 다 저질러놓고도 의화단에게 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워 숙청하였다. 프랑스군은 이 당시 죽인 의화단 반군 머리가죽을 뜯어 장식했다고 한다.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계속되는 잡음이 있었다. 

a)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내내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계속되었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격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만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고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흑룡강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b)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복건성을 식민지화하려고 하문 침공 사태를 일으켰지만 서양 열강들이 단칼에 거절함으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는 실패했고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멸칭을 얻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는다.

5. 의의

청은 이 전쟁의 패전으로 사실상 반 식민지 상태가 된다. 

게다가 '주술로 총을 막으려는 의화단'의 이미지는 중국의 후진성을 상징하며 서양 열강의 조롱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이 '덩치만 크고 열등하고 미개한 나라'로 업신여겨지던 풍조가 이때 완전히 고착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열강은 중국을 다른 나라처럼 힘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식민지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의 세력확장을 멈추고 청에게서 이권만 뜯어내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이 덕분에 중국은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영토가 사분오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의화단 전쟁의 패배로 사실상 서구의 바지사장으로 전락해버린 청 정부에 대한 회의와 실망감이 늘면서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대두되었고 결국 이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는 밑바탕이 된다.

ps) 사실 의화단의 난은 서태후가 무리수를 처음부터 둔 것 임. 즉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청조는 한편으로는 이게 태평천국의 재림이 아닐가 불안해 했고, 아무리 부청멸양의 기치를 외친다 해도 청조는 그들을 믿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청 조정의 역량으론, 대 놓고 의화단을 진압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결국 교활한 서태후는 그들을 서양의 힘을 빌어 격멸하려 한다.
 
그들을 앞세워 서양국 공사관을 공격하게 하고 청군은 그들을 엄호하는 척 하지만 정작 대포 한방 제대로 쏴 주지도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심지어는 앞에서 서양국 군대가 총화를 퍼부어대는 가운데 뒤에서 청군이 총질을 해서 의화단을 섬멸해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서양열강의 개입을 통한 의화단의 진압의 계략은, 서양이 연합군을 결성해서 쳐들어와서는 의화단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과 살육 그리고, 방화를 저질러 버리는 결과를 만든다.
 
의화단 사건의 성격이 통설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즉 이렇게 되니 만주족 정권을 향한 증오가 하늘을 찌르게 되고, 결국 신해혁명은 의화단을 통해 잉태된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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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2 18-06-06 19:31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중 러시아 제국이 고종에게 참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 설사 참전했더라도 당시 대한제국 군사력으로는 국경을 넘어오는 의화단을 막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에 큰 활약을 펼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한국의 침략으로 중국인들이 반한감정을 가지면 이후 독립운동에서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차후엔 시간이 흘러 연합군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고종이 직접 뒤늦게 일본 공사를 통해 참전 의사를 피력했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부족한 전력을 핑계로 참전하지 말라고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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