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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5 07:10
[일본] 메이지 유신의 유람 '야마구치현 하기시'-한국과의 악연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727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 
인구 15만명 남짓한 혼슈(本州) 서남단의 작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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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이 메이지유신의 인재들을 길러낸 쇼가손주쿠(松下村塾) .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야마가타 아리토모(山顯有朋·1838~1922),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가쓰라 다로(桂太郞·1848~1913),미우라고로(三浦梧樓·1847~1926)
국사 교과서에서 이름을 한 번은 접했던, 100여 년 전 일제(日帝)의 조선침략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이들 - 하기는 바로 그들이 태어나거나 성장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길러낸 것은 초야에 묻혀 살다가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 이라는 사내였다. 

이들이 있었기에 조슈(長州·야마구치현의 옛 이름)는 메이지유신에 주역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일본의 군부와 정계를 좌우할 수 있었다. 
   
1) 가쓰라 다로의 생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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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유명한 가쓰라 다로 전 일본 총리의 생가

가쓰라 다로의 생가. 을사늑약에 앞서 맺어졌던 가쓰라-태프트밀약의 그 가쓰라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끌었던 조슈 군벌의 핵심인물인 가쓰라는 3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면서 영일동맹 체결, 러일전쟁 승리, 한일합방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구미(歐美)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이 되겠다는 1868년 메이지유신 이래의 꿈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가쓰라 다로다. 물론 일본의 그러한 성취는 우리에겐 재앙이었다.
  
 마당에는 가쓰라 다로의 동상이 서 있다. 무엇인가 두루마리를 읽고 있는 모습이다. ‘가쓰라가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러일전쟁의 개전조서(開戰詔書)?’ 동상 옆에는 ‘영일동맹 100주년 식수’ 기념 표식이 있다. 신이 나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던 할머니는 쇼가손주쿠(松下村塾)와 하기 성하마을(城下町) 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을 듣자 “그럼 문 닫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면서 우리들의 등을 떠밀었다.
   
2) 쇼가손주쿠(松下村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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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가손주쿠 입구에 있는'메이지 유신 태동지지' 휘호석
아베신조 일본 총리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의 글씨다

​인근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생가터를 거쳐 마쓰모토천(松本川) 동쪽에 있는 쇼가손주쿠를 찾아갔다. 쇼가손주쿠는 조슈번의 병학(兵學)사범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열었던 시골 학당이다. 여기서 한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元兇)’으로 꼽는 이토 히로부미, 조슈군벌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도쿠가와막부 타도와 메이지유신으로 가는 길목에서 큰 역할을 했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등이 배출되었다.
  
쇼가손주쿠 입구에는 ‘축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유산-쇼가손주쿠 세계문화유산등록’이라는 깃발이 서 있다. 2015년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는 나가사키, 가고시마, 야마구치 등지에 산재한 23개의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과 함께 쇼가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두 개의 커다란 휘호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에는 ‘메이지유신태동지지(明治維新胎動之地)’라는 글씨가, 다른 하나에는 ‘살장토연합밀의지처(薩長土聯合密議之處)’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의 것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일본 총리, 뒤의 것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의 글씨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는 작은 외할아버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깃발과 두 개의 휘호석은 마치 아베 총리의 집안이 요시다 쇼인에게 바치는 봉헌물 같아 보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3) ‘메이지 지사들의 멘토’ 요시다 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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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가손주쿠의 강의실 다다미 10장 반 크기의 강의실에서 요시다쇼인은 90명 제자를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은 10살 때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인 명륜관(明倫館)의 교단에 섰고, 11살 때에는 번주(藩主·번의 영주=다이묘) 앞에서 병학을 강론해 천재 소리를 들었다. 일찍부터 아이자와 세이이사이(會澤正志齋)의 국수주의적 자강론(自彊論)의 영향을 받았고, 사쿠마 쇼잔(座久間像山)과 교유하면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눈을 떴다.
  
  1853년 6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가 개국을 요구하러 에도 앞바다 우라가(浦賀)에 나타났을 때, 요시다 쇼인도 그 현장에 있었다. 서양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한 쇼인은 서양을 배우기 위해 밀항을 시도했다.


이듬해 3월, 페리 제독이 수교(修交)를 위해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친구 가네코 주스케와 함께 쪽배를 타고 페리 제독의 기함 포헤탄호를 찾아가 미국으로 가게 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페리 제독은 막 수교한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 일로 요시다 쇼인은 그해 9월부터 조슈의 노야마옥(野山獄)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여기서 쇼인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자신이 읽은 《맹자》 등에 대해 강론했는데, 이것이 재미있다고 소문이 났다. 1855년 12월 쇼인은 마쓰모토촌에 있는 자기 집에 머문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이곳으로도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연금에서 해제된 후인 1857년 11월 쇼인은 본가 마당에 있던 다다미 8장짜리 1칸 방의 작은 건물을 수리해 정식으로 쇼가손주쿠를 열었다. 제자들이 늘어나자 쇼인은 1858년 2월 강의실을 다다미 10장 반 크기로 증축했다.
  
요시다 쇼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덕분에 천민에 가까운 신분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천황절대주의자였던 요시다 쇼인은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원용해 막부 타도를 주장했다. 그는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막부 정권 최고통치자의 정식 칭호. 줄여서 ‘쇼군’이라고 함)이라는 것은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조정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직책인데, (서양 오랑캐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무력(無力)한 쇼군과 막부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쇼인은 막부를 타도하는 동력을 초망(草莽), 즉 민초(民草)들로부터 구했다. 쇼군이나 다이묘(大名·제후), 상급 사무라이들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되니, 초망, 즉 민중을 각성시켜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쇼가손주쿠는 쇼인이 막부의 공안책임자였던 마나베 아키카쓰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1858년 12월 노야마옥에 갇히면서 문을 닫았다. 쇼인은 에도로 이송되었다가 이듬해 10월 26일 처형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도 50년 후 같은 날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  
   
 4) 송문의 쌍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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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가손주쿠에 걸려 있는 쇼인과 그의제자들

​맨  윗줄 왼쪽부터 구사마 게즈이, 다마스기 신사쿠, 요시다 요인 ,둘째줄 맨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  그 왼쪽아 야마가타 아리토모다​

​​다다미 10장 반 크기의 강의실에는 요시다 쇼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고집 세고 강퍅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사내가,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까지도 바꾸었다’고 생각하니 착잡했다.
  
강의실 측면에는 요시다 쇼인과 12제자의 초상이 걸려 있다. 문득 예수와 12사도가 생각난다. 쇼인의 베드로는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1840~1864)였다. 존왕양이 운동의 선봉에 섰던 구사카 겐즈이는 1864년 8월 조슈번 군대가 교토 황궁을 점거하려다가 사쓰마-아이즈번 군사들에 패해 실패한 ‘하마구리문의 변(變)’ 때 자결했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구사카 겐즈이와 함께 ‘송문(松門)의 쌍벽’ 소리를 듣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1839~1867)는 1864년 12월 시모노세키 고잔지(功山寺)에서 기병대(奇兵隊)라는 민병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조슈번의 친막부파 정권을 타도했다.

​이를 계기로 하마터면 유신의 대오에서 탈락할 뻔했던 조슈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을미사변의 주역 미우라 고로 등이 이때 두각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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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가손주쿠 뒤에 있는 쇼인 신사메이지 유신의 멘토였던 소인은 죽어서 신격화되었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서양식 소총으로 무장했던 기병대는 사무라이뿐 아니라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까지도 부대원으로 받아들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기병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기병대는 요시다 쇼인이 말했던 초망굴기론(草莽崛起論)를 실천에 옮긴 부대였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6년 막부가 15만 대군을 일으켜 조슈로 쳐들어오자 도사(土佐)번 출신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1835~1867) 등과 힘을 합쳐 이를 막아 냈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보지는 못했다. 1867년 4월 폐결핵으로 시모노세키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신(晉)’ 자는 바로 다카스기 신사쿠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는 다카스기 신사쿠를 존경해 이 글자를 넣어 아들(아베 신타로 전 일본 외무장관)과 손자의 이름을 지었다. 아마도 아베 총리는 자신을 ‘메이지 지사들의 후예’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카스기 신사쿠가 활동했던 시모노세키가 아베의 지역구다.
  
요시다 쇼인이 정식으로 쇼가손주쿠를 열었던 기간은 1년2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동안 그가 길러낸 제자는 90명. 하지만 그들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메이지유신의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구사카 겐즈이는 24세, 다카스기 신사쿠는 28세에 세상을 떠났다. 쇼인의 제자이자 조카인 요시다 도시마로는 23세의 나이로 신센구미(新選組)의 칼에 죽었다. 요시다 쇼인은 29년을 살았다.
  
‘치열하게 살았던 소수(少數)의 선각자(先覺者)들이 메이지 일본을, 아니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시려 왔다.  
   
5)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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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이토의아버지는 원래 부사관급인 주겐의 시중을 들던 천한 신분이었다

쇼가손주쿠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다. 생가 옆 공터에는 색을 입힌 동상이, 생가 옆에는 후일 이토 히로부미가 증축한 별장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는 원래 사무라이 아래의 부사관급인 주겐(中間)의 시중을 들던 천민이었다. 아버지 하야시 주조가 자기가 모시던 이토 가문의 양자가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도 주겐으로 올라서고, ‘이토’라는 성(姓)을 쓰게 되었다. 그래도 사무라이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운명은 이웃에 사는 친구 요시다 도시마로 덕분에 쇼가손주쿠에 들어가게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주선가’로 평한 걸로 보아 요시다 쇼인은 그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말단에 서서 칼에 피를 묻히면서 싸웠고, 서구 문물을 배우겠다고 영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영국 유학을 갔던 사람 중 하나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강화도조약 때 일본 측 부사(副使)였고, 주한 일본공사를 지내면서 미우라 고로를 불러들여 을미사변을 기획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메이지유신은 사무라이와 다른 계급 간의 차별을 철폐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1~1873년 이와쿠라사절단의 일원으로 구미를 순방하면서 메이지 정권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 등의 눈에 들었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 등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을 때에는 대외침략보다 부국강병이 우선이라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의 편에 서서 정한론을 좌절시키는 데 일조했다. 1877~1878년 ‘유신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가 열렸다.

​실무능 력을 바탕으로 일본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浮上)한 그는 이후 초대 총리대신 등을 지내면서 내각제도 설립, 국회 개설, 일본 제국헌법 제정 등의 업적을 남겼다. 우리에게는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유신의 원훈(元勳)이다.  
   
6) 일본 총리 4명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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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성하마을 , 에도 막부 시대에는 조슈의 상급 사무라이들이 살던 곳이다

​하기는 모리(毛利)씨가 다스리던 조슈번의 수도였다. 일본의 5분의 1을 장악하고 있던 서일본의 패자(覇者) 모리씨의 근거지는 원래 히로시마였다. 그런 모리씨가 궁벽진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도요토미파)에 가담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리씨의 영토 가운데 3분의 2를 빼앗은 후 시골 구석인 하기로 추방했다.
  
모리씨의 거성(居城)이었던 하기성은 메이지유신 후 헐려 버렸지만, 성하마을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얀 색으로 칠한 담장이 이어지는 예쁜 마을이다.
  
성하마을에는 다카스기 신사쿠나 기도 다카요시의 생가가 남아 있다. 그들은 조슈에서 손꼽히는 상급 사무라이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의 생가와 하기시 동쪽 끝자락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 간의 거리는 그들의 신분상의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메이지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의 집도 인근에 있다.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그는 조슈와 사쓰마 간의 동맹을 성사시키고, 메이지유신 후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영주들이 다스리던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한 중앙집권정책) 등 굵직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근처에는 조슈군벌의 마지막 세대로 1920년대에 총리를 지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1864~1929)의 생가 터가 있다. 지금도 인구 15만명밖에 안 되는 작은 시골 도시에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다나카 기이치 등 4명의 총리를 배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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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를 이끌고 조슈의친막부파 정권을 타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동상(외쪽)과 그의 생가

조카마치 근처 중앙공원에는 구사카 겐즈이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이 서 있다. 다카스기 신사쿠나 구사카 겐즈이의 동상이 젊은 사무라이의 모습이라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은 서양식 군복을 입고 말을 탄 노년의 모습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동상은 1868년 이후 반세기 동안 메이지 일본이 이룩한 근대화 노선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유신 이후 문민정치인·관료그룹을 대표한다면, ‘육군의 교황’ 소리를 들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군벌을 대표한다. 가쓰라 다로(육군대신, 총리 역임), 데라우치 마사다케(조선총독, 총리 역임), 하세가와 요시미치(조선군사령관, 조선총독 역임) 등 조선과 악연을 맺은 이들이 모두 그의 슬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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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미구치 유다온센역 앞 거리에는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들이 있다

중앙공원 옆에는 명륜소학교가 있다. 요시다 쇼인이 강단에 섰던 조슈의 옛 번교 명륜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선에도 비슷한 이름의 건물이 있었다. 성균관의 명륜당이 그것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건물이지만, 조선의 명륜당에서는 망국(亡國)의 썩은 선비들이 나왔고, 조슈의 명륜당에서는 근대화의 기수들이 나왔다. 하기를 돌아본 후 야마구치시 유다(湯田)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는 빨갛고 하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야마구치시에서 내건, 내년이 메이지유신 150주년임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그 깃발 위로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150여 년 전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를 본받아 다시 한 번 회천(回天)과 유신을 꿈꾸는 아베 신조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출처]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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