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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4 12:28
[한국사] 역사와 한의 땅! 강화도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882  

역사와 한의 고장 강화

광주의 서쪽은 수리산이며 안산 동쪽에 있는데 안산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독수리처럼 보인다고 한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정맥이 한남정맥이다. 인천, 부평, 김포를 지난 다음에는 움푹 꺼진 돌줄기가 되어 강을 건너고 다시 솟아나서 마니산이 되었는데, 여기가 강화부(江華府), 즉 강화도다. 강화부 동북쪽은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부 전체가 큰 섬이며,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역할을 하고 있다.

한강은 통진의 서남쪽에서 굽어져 갑곶나루가 되고, 또 남쪽으로 마니산 뒤로 움푹 꺼진 곳으로 흐른다. 돌맥이 물속에 가로 뻗쳐 문턱 같고 복판이 조금 오목하게 되었는데 여기가 손돌목(손석항(孫石項))이고 그 남쪽은 서해다. 삼남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실은 배가 손돌목 밖에 와서 만조를 기다려 목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돌무더기에 걸려서 배가 난파하게 된다. 정서 쪽으로 흐르는 한강은 양화도의 북쪽 언덕을 돌아 뒤쪽의 서강과 합쳐지고, 또 문수산 북쪽의 조강나루를 돌아 바다로 들어간다.

강화도의 변천.jpg


『택리지』에는 “강화부는 남북 길이가 100여 리이고 동서 길이는 50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의 강화도는 남북 길이가 약 28킬로미터(약 71리), 동서 길이는 약 16킬로미터(약 40리)이고, 면적은 405.2제곱킬로미터다. 북쪽으로 풍덕의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으며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이다. 석벽 밑은 곧바로 진흙 수렁이어서 배를 댈 곳이 없었다. 오직 승천포 맞은편 한 곳에서만 배를 댈 만하였다. 그러나 만조 때가 아니면 배를 댈 수가 없으므로 위험한 나루라고 일컬었다.

강화부의 좌우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좌우편 산기슭의 강가에 쌓아 마치 성 위에 쌓은 작은 담처럼 돈대(墩臺, 조금 높직하게 만든 평지)만 쌓았다. 거기다 병기를 보관하고 군사를 두어 외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승천포와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을 만큼 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갑곶 양쪽을 지키면 섬 바깥에서 강과 바다가 지켜주는 천연의 요새가 된다. 그런 연유로 고려 때는 원나라 군사를 피해 이곳에다 10년 동안이나 도읍을 옮겨 고려의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로 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지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도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안해루.jpg
안해루


강화도는 동북쪽이 강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은 바다로 둘러싸여 부 전체가 큰 섬으로, 한양을 지키는 나성(羅星) 역할을 하였다. 안해루(按海樓)는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담긴 성문이다.

강화도 관창리에는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곳으로 옮겨온 고려 왕실이 39년간 머물렀던 고려 궁터가 있다. 그러나 왕족과 지배 계급은 백성의 고통과 절망에는 아랑곳없이 이곳에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를 꼬박꼬박 치렀다. 그 호화로움이 개경에서 벌이던 것에 못지않았다는데, 그중 한 예를 육당 최남선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고종 32년에 집권자 최우가 고종에게 진상한 음식상은 여섯 개였고 상마다 귀한 음식이 담긴 그릇이 일곱 개씩 놓여 있었다. 최우는 음식에 풍성함과 사치스러움을 다하고는 스스로 자랑하기를 “다시 오늘과 같이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한다.

고려 왕실과 지배계급의 잔치는 항상 음악과 춤을 곁들여 호화로운 것이었다. 「처용무」나 「가면잡기」 등으로 여흥을 돋우었고, 그때마다 담 밖에는 잔치를 구경하려는 강화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만 20만 명이 넘고 몽골군이 지나간 곳은 모두 불에 타서 재가 되었음에도 지배세력이 그렇게 화려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국의 조세가 안전한 해로(海路)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강화도가 고려의 왕도였던 시대에 황룡사의 9층목탑과 대구 구인사의 대장경이 불타버렸다. 그러자 현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16년간에 걸쳐 다시 만들게 된다. 민중의 절박한 삶과 달리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한 집권 세력은 오늘날에도 또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이 『조선사화(朝鮮史話)』 「고적(古蹟)」편에서 강화를 “역사의 고장, 시의 고장, 재물의 고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강화는 역사 속에서 수난의 땅이었다. 삼별초의 난으로 뻘겋게 피로 물들었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66년 9월 프랑스의 선박 세 척이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영종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강의 언저리 양화진까지 왔고, 뒤를 이어 미국과 여러 나라들이 ‘조선의 문호를 연다’거나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몰려들어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결국 그 조약들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던 지역이 강화도이다.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서적을 약탈한 이후로 아직까지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지난 일을 징계(懲戒) 삼아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말먹이와 식량을 저축하여 비상시에 대비하였다. 그 후 백여 년 동안이나 아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강화에 쌓여 있던 양곡이 백만 섬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말년에 해마다 흉년이 들자 이 양곡을 각 도로 많이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는 밑천으로 사용하였다. 추수 후에는 회수하여 각 고을에 그대로 쌓아두기도 하였고, 서울 각 관청의 경비가 모자라면 미곡을 옮기도록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리가 허술해지면서 군량이 해마다 줄어들어 이중환이 『택리지』를 쓸 무렵에는 10만 섬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 계유년에 이중환은 병자년의 일을 생각하여 왕에게 문수산에 성을 쌓자고 청하였다. 문수산성을 지키지 못하면 강화도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후 묘당과 여러 장수가 통진읍을 성안에 옮겨 따로 진을 만들고, 변란이 생기면 온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산성을 지키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통일된 의견이 나오지 않아서 실행되지 않다가 병인년에 강화 유수(留守) 김시혁이 장계를 올려 강을 따라서 성을 쌓도록 청하므로 조정에서 허가하였다. 그때의 상황이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시혁이 동쪽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북으로는 연미정(燕尾亭)에서 남으로는 손돌목에 이르렀다. 공사를 끝내자 임금은 김시혁을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장맛비에 성이 무너졌으나, 성을 쌓을 때 수렁을 만나면 번번이 흙과 돌로 메워서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강 언덕이 모두 견고해져 사람과 말이 다닐 만하고, 강을 따라 40리나 되는 곳곳에 배를 댈 수 있게 되어 이제는 강화도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1 (2).jpg
철종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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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행렬.jpg

용흥궁과 철종의 행차


그 뒤 강화도에서 살다가 임금이 된 이가 강화도령이라고 일컬어지는 철종이다. ‘강화도령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는 말은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강화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냈듯이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한편 이곳 강화에는 ‘넉살 좋은 광해년(강화년)’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광해란 강화를 강화 사투리로 발음한 것으로 흔히 강화 여자가 부끄럼을 타지 않고 검질기다고 하여 체면과 염치를 모르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암 강화, 숫 통진’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강화 처녀가 김포 땅으로 시집가면 잘살지만 김포 처녀가 강화 땅으로 시집가면 잘 못산다는 말이다. 그만큼 김포 처녀가 억척스럽다는 이야기다. 그런 연유로 한 시절 전만 해도 강화 사람들은 김포에서 행세하는 집안의 처가는 강화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피력했다고 한다.

한편 이곳 강화와 통진 그리고 양천 사람들을 빗댄 ‘강화, 통진, 양천 사람들은 아침에 동풍 안고 저녁에 서풍 안고 밤엔 죽 상 안는다’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연유는 이 길이 조선시대에 9대로의 하나인 강화로였기 때문인데,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나 곡식 등을 이고 진 채 동풍을 가슴에 안고서 서울의 시장까지 가서 내다 팔고, 저녁이면 서풍을 안고 피로에 젖은 채 돌아오지만, 수고한 만큼 벌지 못했기에 죽 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강화 초지진.jpg

북문.jpg

석수문.jpg

강화산성.jpg

강화산성 남문.jpg

강화산성......북문. 석수문. 성벽. 남문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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