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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3:38
[한국사] 고종 밀사 이동인의 오판과 독단 (2)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876  

1) 내부로 사분오열됐던 조선의 개화파
그 외에도 또 하나의 주장이 더 있었다.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토 문서에 의하면 그런 주장은 오직 이동인에 의한 것이었다.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하자는 이동인 이외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것은 개화파 인사들이 당시 국제 질서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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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답답하기 여긴 이동인은 영국과의 동맹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밀사로 파견된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독단적으로 사토를 만나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던 것이다.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당시 개화파는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다는 대원칙에 대해서만 의견 통일을 이뤘고, 그 뒤 어떤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할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 한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개화파 관료들이 국제 현실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일단 권력부터 쟁취하자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자신들이 국제 상황을 잘 안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에서 각자의 대안을 주장했는데 특히 이동인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이동인은 독단적일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이동인은 당시 조선 사람 중에서는 자신이 국제 현실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다. 당연히 그의 자부심은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방안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이어졌다.그래서 개화파 동지들의 반대를 별것 아니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사토를 만나 영국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이해된다. 아마도 이동인은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낙관하고 그렇게 했을 듯하다.
즉 영국이 자신의 의견에 찬동해 군대를 파병하고, 그 영국군을 배경으로 근대정책이 성공한다면, 결국에는 고종은 물론 반대하던 개화파 인사들도 찬성할 것으로 낙관했다.문제는 이동인의 독단과 낙관이 통할 정도로 당시 국제 현실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토 문서에 의하면 이동인은 다음 번에 자신이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으로 와서 서양 각국 대표와 강화조약을 맺을 구상을 밝힌 듯하다.
2) 그 같은 이동인의 구상은 그야말로 낙관에 낙관을 거듭한 구상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다음 번의 조선 사절을 이동인이 이끌고 올 수 있을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이동인이 그런 구상을 비친 이유는 자신에 대한 고종과 민영익의 신임을 과신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신임이 계속 유지될지 여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나라·일본 그 외의 서구열강이 이동인의 구상대로 움직여줄지 여부였다.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협력관계로 돌아선 이유는 근본적으로 러시아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청·일 양국은 동북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동북아 패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일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이동인은 아주 낙관적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즉 조선이 주도해 ‘연미국’을 완수한 후 그가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으로 와서 서구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한다면 청·일 양국은 물론 서구열강도 적극 협조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때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 수호조약을 맺고, 그 기회를 이용해 영국의 파병을 요청해 성사된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문제없으리라는 것이 이동인의 바람이었다.김동인의 막연한 낙관론, 비극적 결말을 부르다
3) 그러나 국제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일본부터가 조선의 ‘연미국’ 입장에 비협조적이었다. 하여장이 [조선책략]에서 ‘연미국’을 제시한 이유는 당시 미국이 일본보다는 청나라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류큐국을 둘러싼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 활동에서 명확히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책략]의 ‘연미국’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조선이 미국보다는 일본에 더 유리한 국가와 수호조약을 맺을 것을 희망했다.그것은 이동인이 이와쿠라 도모미를 만났을 때 명확히 드러났다. 이동인은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인 10월 14일 저녁 이와쿠라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이와쿠라가 외출 중이어서 만나지 못 했다. 이동인은 다음날 이와쿠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이와쿠라는 조선이 미국 대신 독일과 수호조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이런 권고는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 대신 ‘연독일’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쿠라가 ‘연독일’을 권고한 이유는 물론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이 일본보다는 청나라에 더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 사람들에게 미국은 일본을 무력으로 개방시킨 제국주의적 국가이지만 독일은 그런 일이 없었다. 이와쿠라를 비롯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이동인에게 ‘연미국’ 대신 ‘연독일’을 적극 권장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당시 이동인이 국제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인식했다면 이와쿠라의 ‘연독일’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마땅했다. 이와쿠라의 ‘연독일’ 권고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이 이와쿠라의 ‘연독일’ 권고를 무시하고 ‘연미국’을 추구한다면 일본은 외교 역량을 동원해 이를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4) 그런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위해 ‘연미국’을 지지하게 만들려면 외교적인 설득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동인은 그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으면서 단지 이와쿠라를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이 ‘연미국’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뿐만 아니라 다음 번에 이동인 자신이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에 와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도 일본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 이동인은 청나라 역시 당연히 조선의 ‘연미국’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더구나 조선이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도 적극적인 지지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조선책략]의 ‘연미국’을 청나라에서 권고했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하지만 이동인의 그런 기대는 청나라가 왜 ‘연미국’을 권고했는지 그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이동인은 10월 17일 오후에 주일 청국공사관을 찾았다. 그때 참찬관 황준헌이 그를 맞았다. 이동인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정탐위원’ 임명장과 더불어 고종이 하사한 ‘밀부’를 꺼내 보였다. 이어서 이동인은 황준헌과 필담을 나눴다. 이동인은 “조선의 조정 논의가 지금 일변했습니다”라고 해 ‘연미국’ 추진 계획을 알렸다.다음날 오전 일찍 이동인은 다시 주일 청국공사관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하여장이 직접 나서서 이동인과 필담을 나눴다. 이동인은 하여장에게 조선에서 가져온 ‘제대신헌의’와 ‘영의정과의 밀담’을 증거물로 보였다. 그 두 문서를 본 하여장은 조선이 ‘연미국’을 추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이동인과 하여장의 ‘동상이몽’그런데 이동인은 하여장과의 필담에서 “이제 조선은 외국과 스스로 수호조약을 맺으려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동인의 입장에서 그 언급은 당연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하여장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하여장이 ‘연미국’을 권고한 이유는 조선으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서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계속 묶어두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그런 상황에서 이동인이 “이제 조선은 외국과 스스로 수호조약을 맺으려 합니다”고 언급하자 하여장은 크게 놀랐다. 이동인의 언급과 태도로 볼 때 조선은 청나라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서의 청나라 영향력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여장이 조선에 ‘연미국’을 권고한 원래 목표와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크게 놀란 하여장은 이동인이 돌아간 후 ‘연미국’을 추진하는 조선을 어떻게 하면 계속 청나라 영향력 아래 묶어둘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 하여장은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라는 제목의 대책을 마련해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제목 그대로 ‘청나라가 조선의 외교를 주도하기 위한 논의’였다.
5) 이 ‘주지조선외교의’에서 하여장은 “조선은 아시아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서북 국경이 청나라의 길림성, 봉천성과 연접해 중국의 왼팔이 되므로(…) 조선이 망하면 청나라의 왼팔이 끊어지는 것과 같이 되고, 또 청나라의 울타리가 모조리 철거되는 것과 같이 돼 그 후환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조선의 존망이 곧 청나라의 국가안보에 직결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청나라의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조선의 외교 문제에 적극 개입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하여장의 결론이었다. 하여장은 청나라가 조선의 외교를 주도하기 위한 방안 두 가지를 제안했다.첫째는 청나라의 대신을 조선에 파견해 외교 문제를 주도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외교 주권을 탈취하자는 방안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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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청나라 황제가 고종에게 명령해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조선이 서구열강과 체결하는 조약문 중에 ‘이에 조선은 중국 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OO국가와 수호조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는 구절을 삽입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는 조선 스스로가 청나라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영향력을 유지하자는 방안이었다.이동인은 하여장이 이런 구상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지 그의 권고대로 ‘연미국’을 추진하는 조선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 기대했을 뿐이다. 이동인은 일본 역시 ‘연미국’을 적극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동북아시아 국가이기에 당연히 도울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6) 이처럼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연미국’을 적극 지지하면, 다음 번 자신이 일본에 조선사절을 이끌고 올 때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수호조약을 맺고, 나아가 영국의 조선 파병까지 성사시킨다면 조선 근대화는 무난히 성취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하지만 청나라 하여장은 조선 주도의 ‘연미국’을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본 역시 조선 주도의 ‘연미국’을 지지할 의사가 없었다. 영국 또한 아무런 보장 없이 조선에 파병할 뜻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동인은 스스로의 확신과 낙관으로 청나라·일본·영국이 자신의 구상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믿고 기대했다.

7) 그런 기대와 확신을 안고 이동인은 10월 30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하여장의 ‘주지조선외교의’에서 보듯 이동인의 기대는 국제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이동인이 귀국한 이후 조선이 추구하는 ‘연미국’은 이동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출처: 월간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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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지 18-06-05 23:46
   
이거 재미있네요. 혹시 여기서 끝인가요?
만약 다음편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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