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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3:36
[한국사] 고종 밀사 이동인의 오판과 독단(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923  

고종 밀사 이동인의 오판과 독단 - “수구파 제거할 테니 영국군이 도와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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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영국과 일본이 맺은 동맹을 풍자한 그림. 남성과 여성으로 형상화된 영국과 일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당시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의 관점에서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상대적 진보성을 인정받았다

이동인은 1880년 음력 8월 1일(이하 동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으로 밀항한 지 만 1년 만이었다. 뒤이어 8월 4일 제2차 수신사 김홍집도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 둘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따로 출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그런데 도쿄를 떠난 이동인은 한양이 아니라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 포교당에 머물고 있던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에게 귀국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키고 나아가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서 공부할 수 있게 주선해 준 사람이 오쿠무라였기 때문이다.
8월 24일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오쿠무라를 찾아가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밤늦도록 이야기했다. 다음날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이별하고 한양으로 갔다. 이동인이 정확히 언제 한양에 도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원산에서 증기선을 탔다면 늦어도 다음날인 8월 26일쯤에는 도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한양에 도착한 이동인은 우선 김홍집을 찾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 다음으로 유대치·김옥균·박영효·민영익·탁정식 등 개화파 인사들을 만났을 것 역시 확실하다. 아마도 이동인과 개화파 인사들은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밤에 회합했을 듯하다. 조금 더 추론한다면 회합하던 밤에 이동인은 유대치 집에서 유숙하며 자신이 보고 겪은 일본 이야기를 했음직하다.
8월 28일 오후 6시께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했다. 그 자리에서 김홍집은 러시아의 위협과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聯美國)’이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종 역시 동감을 표했다.
하지만 ‘연미국’을 실행하려면 미국과 연락해야 하는데 조선에는 그런 통로가 없었다. 결국 도쿄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 공개적으로 요청할 수도 없었다.고종은 은밀하게 ‘연미국’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하여장에게 밀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김홍집의 귀국 보고가 있고 나흘 후인 9월 3일에 이동인이 밀사로 발탁됐다. 밀사 이동인의 공식 직함은 ‘정탐위원(偵探委員)’이었다. ‘상황을 정탐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위원’이란 뜻이었다.
이동인은 밀사였기에 ‘정탐위원’ 임명장은 비공식적으로 작성, 발급됐다. 그 임명장에는 “지금 엄밀하게 정탐할 일을 위해(今爲嚴密偵探事), 특별히 이동인에게 위임해(特委李東仁), 나아가 항해해(前往航海) 운운”이라고 쓰여 있었고, 큰 도장 세개가 찍혔다. 아울러 이동인의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고종은 나무로 제작한 사발 모양의 밀부(密符)까지 줬다.이동인의 밀사 임명은 민영익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민영익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동인이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개화파 인사들과 회합할 때, 민영익도 참석했을 것이 확실하다.게다가 민영익은 이미 김홍집으로부터 이동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소문에 더해 직접 이동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민영익은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아예 이동인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옮겨 거처하게 했다.
나아가 고종에게 이동인을 직접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고종은 은밀하게 이동인을 만난 후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판단해 ‘정탐위원’에 임명했던 것이다.유대치와 오쿠무라의 ‘은밀한’ 내막


1. 고종 황제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이동인​


이동인은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달려갔다. 그에게 부탁해 일본 증기선을 타고 밀항하기 위해서였다. 9월 9일 이동인은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도착했다. ‘정탐위원’에 임명된 9월 3일부터 6일 이후였다.
그런데 이동인이 ‘정탐위원’에 임명되기 이틀 전인 9월 1일 이미 유대치가 오쿠무라에게 가 있었다. 당시 유대치는 개화파 인사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런 유대치가 이동인에 앞서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간 이유는 뭔가 은밀한 내막이 있었음을 암시한다.유대치가 9월 1일에 원산에 도착했다면 늦어도 2~3일 전에는 한양을 떠났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대치는 8월 27일나 28일쯤 한양을 떠났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8월 27일이나 28일은 이동인이 한양에 도착한 지 1~2일 후였다. 즉 유대치는 이동인을 만난 직후 한양을 떠나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갔다는 말이 된다.오쿠무라 일기에 의하면 유대치는 김옥균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며, 우국퇴교(憂國頹敎)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김옥균의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정부가 개화정책을 잘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유대치가 오쿠무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우국퇴교’는 ‘걱정스런 국가와 퇴락한 불교’라는 뜻이다. 유교국가 조선의 문제점과 퇴락한 불교의 중흥 등을 놓고 토론했다는 뜻일 듯하다.이런 사실들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추론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8월 27일쯤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회합한 개화파 인사들은 이동인의 귀국 보고를 듣고 난 후 조선의 개화정책에 필요한 방안들을 토론했을 듯하다.
다양한 의견이 교환됐을 것이고, 일단 이동인을 밀사로 추천해 일본에 파견하자는 방안이 결정됐을 듯하다. 물론 이동인을 밀사로 추천하는 일은 민영익이 담당하기로 합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다음으로 개화파 인사들을 대표해 김옥균이 오쿠무라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은 원산의 오쿠무라를 통해야 하므로 유대치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원산을 방문할 필요성이 제기됐음 직하다.
그 결과 유대치는 이동인을 만난 직후 한양을 떠나 오쿠무라에게 갔을 것이다. 9월 1일 원산에 도착한 유대치는 9월 9일 이동인이 도착하기까지 8일 동안 오쿠무라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조선의 근대화 및 불교중흥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종이었을 듯하다.그런데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곧바로 일본을 향해 출항하지 않았다. 무려 25일이나 더 원산에 머물다가 10월 3일이 돼서야 일본 군함 천성함(天城艦)을 타고 출항했다. 그 이유는 조선 내부에서 ‘연미국’에 필요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서였다.
고종은 일단 이동인을 ‘정탐위원’으로 삼아 원산으로 밀파한 후 대신들에게 [조선책략]을 검토하게 했다.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연미국’을 추진하려면 독단으로는 벅차므로 최소한 대신들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고종은 영의정 이최응, 좌의정 김병국, 영부사 이유원, 영돈녕 홍순목, 판부사 한계원, 봉조하 강로 등 원로대신 6명에게 [조선책략]을 검토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원로대신 6명은 김병국 집에 모여 [조선책략]을 검토했다.
원로 대신들의 의견은 갈렸다.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대신도 있었지만 시기상조임을 들어 반대하는 대신도 있었다. 그런 의견들을 조율한 결과가 ‘제대신헌의(諸大臣獻議)’라는 이름으로 고종에게 보고됐다.
​헌의에 의하면 원로대신들은 전반적으로 [조선책략]에 공감을 표시했다. 다만 ‘친중국·결일본·연미국’에 대해 약간의 이견을 표시했다. 예컨대 ‘친중국’에 대해서는 ‘이미 중국과 친한데 더 친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의문을 표시했다.
‘결일본’에 대해서는 ‘우리의 성신(誠信)이 부족했습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연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배가 와서 국서를 보낸다면, 좋은 말로 답해야 합니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이동인이 하여장보다 사토 먼저 만난 이유
요컨대 제대신헌의는 ‘친중국’에 대해서는 더 보탤 것이 없고, ‘결일본’에 대해서는 우리의 성신을 더 보여야 하며, ‘연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청이 있으면 적극 화답하자는 취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고종은 9월 8일 영의정 이최응과 ‘연미국’에 대해 밀담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이에 고종은 ‘제대신헌의’와 ‘영의정과의 밀담’을 문서로 작성해 이동인에게 보냈다. 그 두 문서를 근거로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의미였다. 이동인은 그 두 문서를 9월 26일 받았다. 뒤이어 9월 30일 탁정식이 도착했다.
그는 이동인과 마찬가지로 승려 출신의 개화파 인사였다. 당시 탁정식은 이동인의 수행비서 자격으로 일본에 밀파됐다. 이동인과 탁정식은 10월 3일 천성함을 타고 일본으로 출항했다. 그날 유대치 역시 원산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갔다.이동인과 탁정식은 1880년 10월 13일 저녁 도쿄에 도착했다. 탁정식과 헤어진 이동인은 곧바로 영국공사관의 이등서기관 어니스트 M. 사토를 찾아갔다. 이동인은 예전 도쿄에 체류할 때 사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인연이 있었다. 당시 이동인은 영국과의 수호조약을 염두에 두고 사토를 찾았고, 그 인연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게까지 됐다.사토를 처음 만났을 때 이동인은 자신을 조선 한양 출신의 ‘아사노(朝野)’라고 소개하면서 그 뜻을 ‘조선 야만’이라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동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조선 자체도 ‘야만’이므로 그 ‘야만’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에서 자기 이름을 ‘아사노’라 한 듯하다. 사토는 오랜만에 재회한 이동인을 위해 작은 방 하나를 내줬다. 이동인은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에서 거처했다.사토 문서에는 당시 이동인이 왜 사토를 제일 먼저 찾았는지, 또 사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등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먼저 이동인은 사토에게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조만간 외국과 수호 통상할 예정임을 알렸다.
이런 언급은 조선이 영국과도 수호 통상할 수 있다는 언질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동인은 몇 주 이내에 개화파 인사들이 현재의 수구파 관료들을 몰아낼 예정이라는 언급도 했다.이 언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동인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이 필요하고,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수구파 관료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결의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는 방법이 중요한데, 그 방법은 평화적일 수도 있고 폭력적일 수도 있다.평화적인 방법은 고종을 설득해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럴 경우에는 부득이 폭력적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무력정변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권력 장악을 위해 무력정변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수구파 관료 축출을 언급하면서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고 한다.개화파가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고 근대화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위정척사파 양반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 예상됐다. 조선 병력만으로는 그들의 반발을 제압할 자신이 없기에, 이동인은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 것이다.그런데 이동인이 언급한 수구파 관료 축출 및 영국군 파병 요청 등은 그의 임무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들이었다. 고종이 이동인을 밀파한 이유는 ‘연미국’을 실현하기 위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이었을 뿐 수구파 관료 축출이나 영국군 파병 요청 등은 명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동인은 도쿄에 도착하는 즉시 하여장을 찾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동인은 하여장을 찾지 않고 대신 사토를 찾았다. 그것은 순전히 이동인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사토 문서에 의하면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정책을 놓고 심각하게 분열했다고 한다. 즉 개화정책에 필요한 핵심 동맹국을 어느 국가로 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각자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일부 인사는 [조선책략]에 언급된 대로 미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청나라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개화파 내에서도 청나라에 적대감을 가진 급진적인 인사들이 주도했다.반면 일부 인사는 미국 대신 청나라를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가 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여전히 동북아의 대국이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주장은 이른바 온건 개화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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