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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1:34
[한국사] 류큐분할론과 미국의 역할2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216  

1.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의 류큐 분할 제안 - “일본은 중국을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은 천진에서 이홍장과 회담 후 미국 군함을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향했다. 그랜트의 방일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정부는 거국적인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그랜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유럽으로 갔었다. 그때 이와쿠라는 그랜트 대통령으로부터 큰 환대와 함께 물심양면 도움을 받았다. 지난날의 은혜를 갚기 위해, 또 신흥 강대국 미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메이지 천황은 고위관료를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나가사키에 파견했다.

비록 그랜트가 현직 대통령이 아님에도 그에 준하는 국빈으로 예우한 것이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랜트는 접반사로부터 메이지의 환영 서한을 받았고,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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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는 퇴임 후 가족들과 함께 세계 여행 중이었다.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보낸 그랜트는 도쿄로 가서 메이지를 예방했다. 그랜트의 부인과 자녀도 함께했다. 메이지 역시 황후를 대동하고 그랜트 가족을 만났다. 메이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그랜트는 류큐 문제를 중재하겠다고 이홍장에게 약속하고 일본으로 갔다. 하지만 메이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그랜트와 메이지의 처음 만남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랜트의 수행원 중 핵심 참모는 영(J.R.Young)이라는 인물이었다. 영은 천진에서 그랜트가 이홍장과 회담할 때도 배석한 참모였다. 이를 간파한 이홍장은 영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획득했다. 일본에 간 영은 그랜트의 일정은 물론 그랜트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도 자세하게 기록해 이홍장에게 알렸다.

일본에 도착한 그랜트와 영은 최고 실세가 이토 히로부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랜트와 영은 일본에 손님으로 온 마당에 일본정부에서 불편해하는 류큐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그랜트는 영으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에게 류큐 문제를 넌지시 언급하게 했다.

이후 그랜트는 가족과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유명한 관광지 닛코(日光)로 떠났다. 그곳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위패를 모신 도쇼궁(東照宮)이 있었다.

영의 언질을 받은 이토는 어떤 상황인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랜트는 그냥 여행차 일본에 들른 것이 아니었다. 이홍장의 부탁을 받고 류큐 문제를 중재하겠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이홍장이 류큐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했을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류큐는 500년 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친 속국인데 일본이 갑자기 무력으로 병탄(竝呑)했다고 주장했을 것이 뻔했다. 일방적으로 이홍장의 말만 듣고 온 그랜트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 역시 확실했다.

2. 이토 히로부미 “그 문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이토는 담판에 앞서 우선 그랜트의 선입견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토는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역사 자료를 정리해 하나의 책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준비한 류큐 책자는 이토가 준비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 무기를 가지고 이토는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 등과 함께 그랜트를 뒤따라 잇코로 갔다. 류큐 문제를 담판하기 위해서였다.

담판에 앞서 이토는 자신이 정리한 류큐 책자를 영에게 주고 일독(一讀)을 권했다. 읽은 후에는 그랜트에게 전달해줄 것도 부탁했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마친 이토는 1879년 6월 6일(음력, 이하 동일) 정오에 그랜트와 만나 류큐 문제를 논의했다.

저녁 때까지 지속된 논의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 대화를 영이 기록해 이홍장에게 알렸다. 그중에 중요한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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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일전에 중국에서 공친왕과 이홍장이 나에게 류큐 문제를 조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가 중국 쪽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본이 류큐를 처리한 것이 아주 불공정했습니다. 나는 별다른 의견은 없지만 혹시라도 아시아 각국이 실화(失和)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다년간 화친했으니 다시 실화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류큐에 관한 일은 내가 이미 주일 미국 공사와 논의했고 그와 의견이 같습니다(이어서 그랜트 전 대통령은 류큐가 중국 속국이라는 이홍장과 공친왕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중국은 일본의 이번 처사가 중국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국에서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쟁 피해가 가장 끔찍하고,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 역시 원한을 품습니다. 일본이 강함을 믿고 있지만, 중국은 아주 평화롭습니다. 현재 일본의 군사력이 중국보다 강한 것 같지만, 중국의 인구와 물산은 천하제일입니다. 만약 중국이 제대로 자강(自强)한다면 인재를 다 쓰지 못 할 것이고 물산도 다 쓰지 못 할 것입니다. 나는 일본이 중국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이 일은 관계하는 것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도 만약 누군가가 중간에서 사주해 일본과 중국으로 하여금 실화하게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간사한 술책일 것입니다. 일본에 현재 이런 외국인이 있는데, 그 마음과 행동이 진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분하고 원통하게 합니다. 비유하자면 중국이 아편의 피해를 입은 것이 모두 이런 사람들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같은 황인종이고 근본 정의가 한 집안 같습니다. 만약 양국 사이에 틈이 생기면 분명 구경꾼들이 선동하고 사주하고자 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일본도 알 것이라 봅니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영국 공사가 견제하고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북경에서 공친왕을 만나거나 아니면 천진에서 이홍장을 만나 타협해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할 수밖에 없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일본은 중국과 실화할 뜻이 없는데, 일이 이렇게 돼 아주 난처합니다. 류큐 문제는 이미 끝난 상황입니다. 명령이 이미 선포돼 취소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중국을 설득할 무슨 묘안이 있으신지요? 있으시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랜트: 중일 양국이 어떻게든 서로 양보해서 타협안을 도출해야 합니다. 내가 미리 말하기는 불편합니다. 타협안을 내고 별도로 조약을 맺어 중국의 중요한 문호(門戶)인 대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 일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토: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집정대신에게 보고하고 다시 대통령께 알려드리겠습니다.[역미국부장양월한내함(譯美國副將楊越翰來函) 1879년 6월 30일 도착] 

위 대화를 보면 당시 그랜트는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그랜트가 공친왕과 이홍장의 말만 들었을 때는 류큐가 청나라의 완벽한 속국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에 와서 들은 애기는 또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류큐는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은 왕국이기도 했다. 류큐 문제가 결코 간단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랜트와 만난 주일 미국 공사는 그랜트의 일방적인 친중 태도에 우려를 표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일 미국 공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랜트는 동북아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세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홍장과 공친왕의 말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으로 비쳤을 듯하다.

3. 아무도 만족 못 한 삼분지계(三分之計)

만약 그랜트가 이홍장의 말만 신뢰하고 일본에 류큐 처분을 취소하라고 요구할 경우, 일본이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럴 경우 청나라와의 우호는 증진될지 모르지만 일본과의 우호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 역시 분명했다. 노련한 외교관의 입장에서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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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일 미국 공사는 그랜트에게 중립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조언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어느 한쪽만의 요구가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류큐 모두의 요구를 수용해 절충하는 방안이었다.

그것은 곧 류큐를 세 부분으로 분할해 대만 가까운 곳은 청나라가 갖고, 규슈 가까운 곳은 일본이 가지며, 중간 부분은 류큐 국왕이 갖는 것이었다. 즉 류큐를 삼분하는 분할 방안이 바로 주일 미국 공사와 그랜트가 생각하는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었다.

그랜트가 이토와의 회담에서 “류큐에 관한 일은 내가 이미 주일 미국 공사와 논의했고 그와 의견이 같습니다”라고 한 발언은 바로 류큐 삼분 방안을 지칭했다. 그 같은 분할 방안이 성사되려면 일단 청나라와 일본이 수용해야 가능했다.

그래서 그랜트는 이토와의 회담에서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먼저 제시했던 것이다. 이어서 그랜트는 이홍장에게도 편지를 써서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랜트의 편지는 6월 14일 도쿄에서 쓰였다. 이토와 회담하고 며칠 지나서였다. 이홍장은 그랜트의 편지를 7월 5일 받았다. 이로 보면 당시 일본 도쿄에서 천진까지 우편물이 도착하는 데 대략 20일 정도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랜트는 편지에서 이토와의 회담을 소개한 후 ‘양보를 통합 타협안’을 권유했다. 물론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언급만으로도 류큐 전체를 원래대로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현 상황에서는 류큐를 분할하는 것이 최선임을 암시했다.

이홍장은 일본 측의 공작에 그랜트가 생각을 바꿨음을 눈치챘다. 이홍장은 편지를 받은 다음날 그랜트에게 답장을 썼다. 그 답장에서 이홍장은 중일 양국의 화친을 위해 노력하는 그랜트의 노고에 감사하면서도 ‘양보를 통한 타협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홍장은 지난번 일본의 대만 침공 때도 중국이 양보했는데, 이번에 또 양보한다면 “국가체제와 성명(聲名)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이 언급에 이홍장의 고민이 압축돼 있었다.

류큐를 세 부분으로 분할해 중국·일본 그리고 류큐가 각각 하나씩 갖자는 방안은 언뜻 생각하면 관련 3국의 이해관계를 잘 절충한 방안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3국 모두가 불만을 가질 방안이기도 했다.

국권을 강탈 당한 류큐 입장에서는 또 다시 자신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국토가 삼분되기에 당연히 불만이었다. 일본은 이미 병탄한 류큐를 3분의 2나 다시 내놓아야만 하므로 불만이었다. 청나라 역시 불만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일본이 전부 병탄한 류큐를 3분의 1이라도 받아 낸다면 청나라에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랜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정도 양보라도 일본에서 받아내기 위해 그랜트는 노력했고 그래서 이홍장이 순순히 수용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그렇지 않았다. 청나라의 ‘국가체제와 성명’ 때문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수많은 조공국가를 거느린 국가였다. 류큐는 수많은 조공국가 중의 하나였다. 이홍장은 그 같은 청나라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분투 중이었다.

일본에 류큐 문제를 제기하고 항의한 이유도 류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국가체제가 유지되기 유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조공국가의 이탈을 막아야 했다. 

4. “이분(二分)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1896년 영국 방문 중 솔즈베리 총리(왼쪽)와 함께한 73세의 이홍장. 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외교사절로 서구열강을 순방했다
그런데 만약 청나라가 일본과 타협해 류큐의 3분의 1 또는 절반 정도를 갖는다면 당장은 이익으로 보일 수 있지만 국가체제 전체로 봤을 때 장기적으로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다른 조공국가들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명실상부하게 조공국가를 거느리려면, 조공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줘야 했다. 그런데 구해주기는커녕 그 조공국가를 분할해서 병탄해버린다면 나머지 조공국가 모두가 청나라를 의심하며 이탈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곧 류큐의 3분의 1을 얻는 대신 나머지 조공국가 전부의 신뢰를 잃는 것이나 같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섬나라 오랑캐라 무시하던 일본과 협상해서 류큐의 일부분을 갖는다는 것은 중국의 체면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아무리 기울었다고 해도 이홍장은 여전히 대국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조공 국가를 거느리는 청나라의 국가체제와 국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홍장은 그랜트의 타협안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답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홍장에게 달리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랜트가 중재 역할을 해줬기에 류큐의 3분의 1이라도 돌려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홍장은 양면작전을 구사했다. 자신은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장했지만, 총리아문의 공친왕으로 하여금 양보를 통한 타협안을 수용할 수도 있다고 답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타협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랜트와 미국으로 하여금 계속 중국을 위해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심산일 뿐이었다. 만약 이홍장과 공친왕이 이구동성으로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랜트는 포기하고 그대로 귀국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실리도 챙기지 못하고 그랜트와의 관계만 악화될 것 역시 분명했다.

미국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그랜트는 또다시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다. 그때가 6월 23일이었다. 두 번째 예방 자리에서 그랜트는 마침내 류큐 문제를 꺼냈다. 그랜트는 막연하게 ‘양보를 통한 타협안’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류큐 분할 방안을 제시했다. 그랜트의 제안에 메이지는 “류큐 문제를 귀하와 논의하라고 이토에게 명령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토는 잇코 회담 후 그 결과를 이와쿠라에게 보고했었다. 그에 따라 일본의 핵심 실세들 사이에서는 류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다양한 토론이 있었다. 결론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랜트의 제안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하는 것이었다. 무시한다면 청나라에 더해 미국과의 관계악화를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토를 비롯한 일본 정치가들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럴 정도로 류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랜트의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방식이었다. 그랜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류큐를 셋으로 나눠 그중의 하나만 일본이 갖는다는 것이 너무나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가 생각한 것은 그랜트의 삼분 안을 이분 안으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즉 그랜트가 분할한 셋 중에서 하나는 청나라가 갖고 둘은 일본이 갖겠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양분 안을 가지고 청나라와 협상하겠다고 함으로써 그랜트의 요구를 수용했다. 메이지가 “류큐 문제를 귀하와 논의하라고 이토에게 명령했습니다”라고 한 대답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메이지와 면담 후 그랜트는 미국으로 귀국하기에 앞서 또 이홍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랜트는 류큐 문제는 중국에서 듣던 것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고 언급하며 양보를 통한 타협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랜트 귀국 후 이홍장과 이토 사이에 류큐 분할이 협상됐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홍장은 협상에 임하기는 했지만 협상을 진척시키지는 않았다. 만약 협상을 진척시켜 류큐의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갖게 된다면 국가체제가 위험해지고, 그렇다고 협상하지 않으면 그랜트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기에 이홍장은 협상은 하되 진척시키지는 않는다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이홍장은 청나라의 국가체제를 위해 류큐를 버렸던 것이다. 다만 다른 조공국가에 청나라의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협상에 임하기만 할 뿐, 협상을 진척시키지는 않았다. 그 결과 류큐에서 일본의 실효적 지배는 지속됐고 그럴수록 류큐는 오키나와현으로 굳어졌다.

5. 이홍장, 류큐 버리고 시간을 벌다

당시 이홍장이 류큐를 버리면서까지 확보하고자 한 것은 시간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가 서구열강은 물론 일본에까지 몰리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근대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을 만회시키려면 근대 해군을 양성해야 했다.

이홍장은 1875년부터 북양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북양 해군의 기본 목표는 철갑 전함 2척, 대형 화륜 전함 6척, 소형 화륜 전함 10척 등 20척 정도의 근대 군함을 보유하고,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근대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근대 군함을 보유하는 것이나 근대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나 모두 많은 돈과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1879년 당시 북양해군에는 아직 철갑전함도 없었고 대형 화륜전함도 없었다. 겨우 소형 화륜전함 몇 척만 있었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는 서구열강은 물론 일본과의 전쟁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홍장의 판단이었다.

북양해군을 기본 목표만큼 육성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이홍장은 일본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류큐를 버렸다. 그랜트의 노고에 감사하는 답장을 쓴 7월 6일 이후로 이홍장은 근대 군함 구입에 박차를 가하면서 북양해군 양성에 열성을 다했다.

그와 동시에 이홍장은 조선을 서구열강과 통상시키기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일본의 류큐 병탄에 이홍장이 별 대책 없이 당한 이유도 결국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이 청나라의 군사력 열세를 틈타 조선을 침략한다면 류큐 병탄 때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청나라의 군사력을 길러야 했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조선이 일본 또는 러시아의 침략을 당하지 않으려면 서구 열강과 통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이홍장의 판단이었다.

그 같은 판단에서 이홍장은 7월 9일에 조선의 이유원에게 밀서를 보냈다. 7월 9일이면 그랜트에게 답장을 쓴 7월 6일부터 겨우 3일 후였다. 이홍장의 밀서는 [고종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최근의 일을 살펴보면 일본은 처사가 잘못됐고 행동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리 방어해야 하므로 감히 은밀히 그 개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요사이 서양제도를 숭상해 허다한 제도를 새로 만들면서 이미 부강해질 방도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고가 텅 비고 나라 빚이 늘자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켜 널리 땅을 개척해 그 비용을 보상하려 합니다. 일본과 강토를 마주하는 곳은 북쪽으로는 귀국(貴國)이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대만이니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류큐 왕국은 수백 년이나 된 오래된 나라이고 일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올봄에 갑자기 군함을 출동시켜 류큐 국왕을 폐위시키고 강토를 병탄했습니다. 중국과 귀국에 대해서도 장차 틈을 엿봐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병력과 군량이 일본의 10배나 되기에 스스로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국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은밀히 국방을 강화하고 군량도 마련하며 군사도 훈련시키는 동시에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기색을 나타내지 말고 그들을 잘 다뤄야 할 것입니다. (…) 만약 귀국에서 먼저 영국·독일·프랑스·미국과 수호조약을 맺는다면 단지 일본만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엿보는 것까지도 아울러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고종실록), 고종 16년(1879) 7월 9일조]

위에 의하면 이홍장은 당시 일본의 현실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유신을 추진하면서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개발 자금뿐만 아니라 사무라이의 불평을 완화시킬 정치 자금이 필요했고, 그 규모는 천문학적이었다. 그 자금은 궁극적으로 농민층의 세금으로 충당돼야 하지만 함부로 세금을 올리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일본정부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켜 널리 땅을 개척해 그 비용을 보상하자”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수많은 실업자 사무라이가 취업할 수 있어 좋았고, “널리 땅을 개척하면” 그곳을 수탈할 수 있어 좋았던 것이다.

6. “서구열강과 통상하시오” 공(球)은 고종에게

따지고 보면 1873년의 정한 논쟁 역시 이 같은 발상을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1873년의 정한 논쟁은 메이지 천황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에 의해 수그러들었지만, 1876년을 전후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정한 논쟁 때 전쟁에 반대했던 이와쿠라·기도·오쿠보 등이 입장을 바꿔 대외 팽창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1876년 무력을 동원해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뒤이어 1879년 봄에 류큐를 병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로 일본이 대만과 조선을 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홍장은 그 점을 우려해 조선에 서구열강과의 통상을 권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이 이홍장의 권고를 수용할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은 서구열강을 오랑캐라 멸시하며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일본과 통상하라는 이홍장의 권고도 겨우 수용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런 조선이 서구 열강과 순순히 통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끝까지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가능성에 대한 이홍장의 대책은 ‘논권도조선통상(論勸導朝鮮通商)’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이홍장이 7월 12일 총리아문의 공친왕에게 보낸 것으로 지난 7월 9일 이유원에게 밀서를 보낸 후 보고차 작성됐다. 제목 그대로 조선에 통상을 권고하고 지도하는 일에 관한 논의였다.

이 글에서 이홍장은 ‘류큐가 이미 멸망했으니, 조선은 쌓인 섶나무에 불을 붙이는 형세가 있습니다. 서양 각국이 또한 빙 둘러서서 보다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조선은 위기일발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쌓인 섶나무에 불을 붙이는 주체로 지목된 국가는 물론 일본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만 통상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일본이 류큐에 뒤이어 조선을 침략한다면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도 기회를 노리다가 이권을 찾아 우르르 몰려들리라는 것이 이홍장의 예상이었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알아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조선은 전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홍장은 ‘차저대주(借箸代籌)’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차저대주’란 ‘남의 산가지를 빌려 대신 계획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차저대주’는 조선에 서구 열강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게 하자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애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연장이었다. 이홍장의 ‘차저대주’ 언급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외교 간섭이 점차 거세질 것임을 예고했다. 처음에는 이유원에게 밀서로 권고하는 형태였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강력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공은 조선의 고종에게 넘어갔다.

이홍장의 권고대로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고 근대화를 추구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쇄국정책을 추구할지는 궁극적으로 고종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아울러 점차 강력해질 이홍장의 ‘차저대주’에 대응하며 조선의 국권을 어떻게 지켜 나갈지 역시 고종에게 달려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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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4 [한국사] 친일명부와 뉴라이트의 역사왜곡 꼬꼼둥 03-24 1302
2963 [한국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어렵나요? (5) 웋호홓 08-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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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9 [중국] 중국 한나라 가옥 토기 (한나라 시대) (1) 예왕지인 10-1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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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0 [한국사] 소위 대륙 고구려 및 삼국설에 인용되는 요사 지리지… (14) 고이왕 03-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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