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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30 22:50
[대만] 정씨왕조의 대만경략3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76  

 강희제는 시랑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고, 우선 요계성은 성 전체의 병마를 통괄하고, 제독 시랑과 더불어 팽호와 대만을 정벌하라는 식으로 답했다.

1682년 3월, 시랑은 군대와 선박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보고하면서 진군하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 그리고 요계성에 대해서는 병력을 관리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사졸을 격려하는데 전혀 허술함이 없다고 그의 과단성을 칭찬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요계성이 북방에서 성장하여, 비록 재주가 뛰어나지만 바다의 풍랑에 직면하면 부족함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총독은 하문에 주둔하여 군량 운반을 도와주고, 자신이 싸움은 다 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자 요계성은 또다시 분노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반박 상소했다.

 "신이 비록 북방에서 자라 지금 바다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또한 편안하여 조그만 허물도 없었는데, 어찌 신에게 잘하느 바가 없다고 합니까! 차라리 해상에서 전사할지언정, 하문으로 돌아와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우선 시랑의 요청을 재고하면서 둘이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시랑과 요계성의 파워 게임과 서로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1681년부터 1682년까지 몇번의 출정 계획이 있었으나, 시랑이 뜻을 바꾸어 실행되진 않았다. 그리하여 1682년 여름에 팽호로 출발하자고 정하였는데, 여기서 시랑과 요계성이 계획을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또 연기되었다.

시랑은 여름의 남풍을 타고 가야 보름 동안 선박은 뱃머리를 이어 일제히 움직일 수 있고, 장수와 병사는 또한 뱃멀미를 겪지 않으며, 교전 시 바람에 불어오즌 쪽 상류에 있게 되고, 적은 도리어 바람이 불어 가는 쪽 하류에 있게 된다는 전문적인 의견을 내었다. 

여기에 대해 요계성은 겨울과 봄 사이의 북풍을 이용하여 진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팽호와 대만은 북풍이 불면 정박할 곳이 많다는것을 이유로 들었다. 남풍이 불면 정박할 수 있는곳이 한곳밖에 없으므로, 적이 그곳에 있다면 정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7,8,9월에 태풍이 연속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보급도 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열흘 가량 최고 지휘관들이 이렇게 싸움만 벌이고 있자, 결국 원정도 시작하기전에 파토가 되어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랑은 오기가 생겨 정찰선을 보내 남풍을 타고 유국헌이 있는 팽호까지 정찰을 시키고 다시 귀환시켰다. 정찰선은 아무 문제도 없이 남풍을 타고 진군했고, 이는 시랑의 자신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요계성의 경우에는 회유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요계성의 회유 전략과 첩자들의 공작은 대만 내에서 각종 분쟁과 반란의 씨앗을 뿌렸고 투항군을 받아들여 이득을 보았다. 다만 요계성은 중국 수군의 역량에는 크게 자신감이 없었다. 일전에도 그는 정경의 세력을 모조리 대륙에서 일소하는 일에, 반드시 네덜란드 선박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 바가 있다. 그는 강희에게 시랑이 빨리 싸우려는것은 시랑의 애국심이 매우 강하고, 또 피를 흘리는 전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이 강할뿐, '본래 기회가 적당하다거나, 적을 토벌할 수 있는 상황; 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다보니, 요계성은 실질적인 군사 작전보다도 회유와 반락 책동, 경제적 봉쇄와 압박을 주요 전략으로 내걸었다. 이와는 달리, 시랑은 결코 유국헌등이 순순히 항복을 할 인물들이 아니며, 정씨가 회유를 받아들일것이라고 여기는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씨와 결판을 내려는 마음이 매우 강해, 정씨의 사자가 하문에 와서 서신을 보여주려고 해도 아예 처음부터 면담을 거부했다. 요계성이 시랑을 돌려서 비난한것과 마찬가지로, 시랑 역시 요계성이 바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돌려서 비난했다. 

시랑의 요청은 명확했다. 바다에 대한 일은 모두 자신에게 일임하라는 것 이다. 또한 정예병 2만, 크고 작은 전선 300여 척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만 적을 모두 파멸할 수 있고, 만약 잘못되면 자신에게 처벌을 내려주라는 것 이다.

강희제는 처음에는 화를 내었다. 시랑의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자신만만한 태도와 각종 요구도 그렇고, 시랑이 이미 여러차례 공격을 하려다 상황을 보고 연기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왕지사 시랑에게 맡긴 일이기도 하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니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논의하여 이를 승낙했다. 그리고 대학사들의 의견을 묻자 명주는 두 사람이 군을 이끌고 가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사태가 나타날 수 있음으로, 시랑에게 일을 맡기자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강희제의 최종 명령이 내려왔다. 시랑은 이를 절대적인 권위로 삼아 불만스러운 주변 관리들에게서 득의양양하게 병력 2만 1000여명을 얻어내고 큰배 70척을 포함해 200여척에 가까운 전함을 배치하였습니다. 시랑의 공격 시도가 노골화되자 대만에서도 허둥지둥 전투 준비를 했지만, 토착민들을 강제로 징발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식량을 운반하게 한 탓에 불만이 심해졌다. 군사들은 그들에게 매질을 했고, 공방에서 무기를 만드는데 힘을 쓰다보니 농사의 적기를 놓쳐 수확량에 당장 문제가 생겼다. 토착민들은 식량을 탈취했고, 정씨 정권이 이를 진압하자 산으로 숨어버렸다.

시랑은 승리의 기회를 눈치채고 1683년 4월, 최후의 상소를 올렸다.

고집불통이자 자만심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만만하며, 뭇 뱃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랑이 대만 원정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대만쪽에서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실제로 원정이 시행되려고 하자, 대만의 정씨 정권도 각 방면에서 준비를 철저히 하려고 했다. 그들은 정예병을 선발하고, 농촌의 장정을 뽑아 군대에 집어넣고, 무역선을 모두 전투용 함선으로 개조하면서 개인 선박들을 정비했다. 그 숫자를 모두 합치니 200여척이 넘고 병사는 2만여명이 넘었는데, 시랑의 부대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 대부대를 이끈 지휘관은, 삼번의 난 당시 관군을 수차례 격파했던 정씨 정권의 명장 유국헌이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팽호로 진각하여 해안에 낮은 담을 쌓고 총을 배치하면서 팽호에서 한바탕 싸워볼 준비를 끝냈다.

시랑은 6월에 출발을 했다. 그리고 14일 날이 되었을때, 유국헌에게 그 모습이 포착이 되었습니다. 유국헌은 여러 준비를 하였는데 방어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정씨의 다른 장군인 구휘(邱輝)는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며, 저녁에 조류가 낮아지는 틈을 타 신속히 공격하면 시랑을 공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유국헌은 깔보는 말투로 거절했습니다. 무려 정지룡의 때부터 활약한 시랑은 대만의 정씨 세력에게 있어 하나의 전설이었으나, 그는 시랑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시랑은 허명일 뿐이다. 지금 태풍이 불어오는 시기인데, 감히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는가. 만일 밤에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저들은 초류(焦類 : 야간에 경보를 울릴 떄 사용하는 그릇)가 없다. 우리의 정예병을 감추고 적의 공격을 기다린 뒤, 적이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싸우지도 않고 공적을 세울 수 있다. 공들은 우려하지 말라."

16일부터 시랑이 팽호를 공격하지 시작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청나라 군의 유격 남리 등은 정군의 전선 7 ~8여척을 격퇴했는데, 정군은 수군으로 대오를 결성하여 청군을 포위 공격했다. 시랑은 날아오는 포탄 불꽃에 얼굴을 맞아 얼굴 오른쪽이 좀 떨어져 나가는 커다란 부상을 당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리 역시 전투 중에 복부에 포탄을 맞아 복부가 파열되었지만 계속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거친 바다 사나이들 답게 서로 죽고 다치는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미친듯이 싸웠다. 이는 삼번의 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모습들이다. 시랑은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싸웠고, 정군의 수사 총독 임승 역시 세번의 화살을 맞고, 포탄이 날아들어 왼쪽 무릎이 절단되었다. 정군의 여러 장수들은 화염으로 죽었다. 격렬한 싸움 중에 시랑이 물러나기 시작했고, 정군의 구휘 등은 이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유국헌은 저지했다. 야간에 습격을 하겠다는 구휘를 유국헌은 이렇게 말렸다.

"저들 수군이 정박하고 있는 곳은 오른쪽에 얕은 암초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불면 싸우지 않고도 자멸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6월 한 달 동안에는 36폭(暴)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16일이고, 다가오는 17일, 18일, 19일은 곧 관음폭, 세징롱폭이다. 폭풍이 없는 날이 없지 않은가. 저들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유국헌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의외로 폭풍은 불지 않았고, 바다는 괴이할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예상이 완전히 벗어나자 군대의 사기는 동요되기 시작했다. 그때, 시랑은 자신이 정군을 너무 애송이처럼 여겼음을 반성했고, 열심히 싸운 남리 등에게는 2천냥의 보상을 주고 도망치던 사람들은 처형을 내리면서, 우선은 살려두고 싸움에서 공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좀 더 차분하게 형세를 살펴보고, 탄탄하게 진영을 갖추어서 다시 한번 싸움에 나섰습니다. 22일의 일이었다.

시랑은 수군의 배치를 끝내고 자신은 1대를 이끌고 한가운데에서 친히 전선을 독려하였습니다. 유국헌은 청군이 나타나자 즉각 발포에 들어갔다. 치열한 싸움끝에 청군의 총병 주천귀가 포탄을 맞고 사망했고, 유국헌은 구휘 등을 독려하여 10여척을 이끌고 청군을 포위 공격했다. 화약 항아리, 볼화살, 돌화살, 포화가 팽호 앞바다에서 굉음을 내며 발사 되었다.

유국헌등에게 포위 당한 선박을 구하려 청군의 유격 허영이라는 인물이 6척의 선박으로 외부에서 공격했고, 이러자 유국헌은 역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청군의 기세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느낀 유국헌은 모든 함대에 총공격력을 내렸고, 시랑도 이에 대응해서 모든 함대가 진군하게 했다. 곧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청군의 총병 오영은 오른쪽 귀가 화기를 맞고 파열되었고, 부영기 탕명은 화살 여러 대를 맞았습니다. 정군은 구휘 등이 많은 선박을 이끌고 예리하게 기습했다.

그런데 이때, 시랑은 이미 한 가지 대비를 해놓은 뒤였다. 그는 전함을 5척씩 대오를 형성하여 함께 움직이도록 했고, 이를 오매화(五梅花)라고 명명했다. 시랑의 오매화 전술에 따라 전함 한두척이 포위를 당하더라도, 바로 뒤에서 다른 아군이 도와주어 포위에서 벗어나게 술수를 부린것 이다. 이에 오히려 정군의 함선들이 청군에 포위가 되어, 양쪽에서 화포들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역으로 이제는 시랑의 오매화가 1척의 함선을 포위하여 부셔뜨렸다. 어떤 것은 불 항아리에 불탔고, 어떤 것은 포탄으로 침몰되었다.

구휘는 죽을 힘을 다해 공격을 했고, 가지고 있는 화염병, 불화살, 돌화살들을 마구 퍼부으면서 저항했다. 그는 왼발과 오른발 모두 큰 부상을 당했지만 위축되지 않고 싸우다가, 결국 중과부적임을 느끼자 화약통을 일제히 던지고 불에 타서 죽었다.

유국헌이 판세를 보자 이미 정군의 수군은 7, 8할이 모두 괴멸되었습니다. 그는 전멸을 맡기 위해 청군을 돌파하고 탈주하였습니다. 탈주하는 길에 암초가 매우 많은 지대에 이르자, 그는 투구를 벗어던지고 무릎을 꿇은 뒤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는, 조타수에게 계속 갈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돌연 풍랑이 일어나고, 바람이 순조롭게 돌면서 아무런 막힘 없이 갈 수가 있었다. 유국헌의 인도에 따라 도망쳐 나온 정군의 선박들은 모두 대만을 향해 탈출했다. 시랑은 추격을 하려고 했으나, 청나라 병사들이 대만으로의 물길에 익숙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추격하지 않고, 잔존한 병력을 투항시키고 물에 빠졌으나 아직 익사하지 않은 정군 병사들을 건져내었다. 시랑은 이들 모두에게 변발을 시켰다.
팽호의 싸움은 아편전쟁 이전까지 청군이 겪은 가장 거대한 바다에서의 대격전이다. 이 싸움으로 정군의 장군 급 인물만 47명이 몰살당했고, 자잘한 지휘관들은 모두 300여명이 죽었다. 병사의 사망자는 2만 명 중 1만 2,000여명에 달했으며, 전함도 150여척이 깨져버렸다. 반면에 시랑의 부대는 사상자 2,000여명 정도 밖에 나지 않았다.

요계성은 청군의 대승에 기뻐하는 한편, 승리의 기세를 이어 바로 대만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자신만만한 시랑은 요계성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정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팽호에서 머물며 준비기간을 갖추었다. 요계성과 시랑의 의견이 모두 강희에게 올라갔는데, 강희는 "장수와 병사가 피로하고, 백성이 상해를 입는다." 라는 이유로 시랑의 의견에 동의했다. 동시에 정극상에 대한 회유 작전이 벌어졌다.

시랑은 이미 정군의 군사적 역량은 완전히 요절이 나버렸다고 여겼고, 대만 정복 후의 작업에 벌써 착수하여 포로를 관대하고 우대하여 대접했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전쟁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면서 단 한명의 포로라도 죽이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부상한 포로들은 의원들을 총 동원하여 구하고 약을 제공했으며, 일부 포로는 아예 대만으로 보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게 조취했다. 시랑은 귀환하는 포로들에게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조정은 부득이하여 무력을 사용한 것 뿐이다. 너희는 이미 투항했으므로, 모든 죄는 사면되었다. 너희는 돌아간 뒤 대만 백성들에게 신속히 투항할 것을 알려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팽호의 연속이 될 것이다."

시랑이 노골적으로 회유 작업에 들어가자, 대만에서는 앞으로의 방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투항을 주장하는 사람은, 팽호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시랑의 무서움을 맛본 유국헌이었습니다. 이미 대만의 민심은 흉흉해졌고, 오직 투항밖에 답이 없다고 여긴 유국헌은 만사를 제쳐두고 어서 투항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아예 필리핀으로 가자고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정성공이 필리핀 정복 계획을 세우다가 사망한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필리핀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이 곳을 취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는데, 정극상과 풍석범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유국헌은 반대했습니다.

"지금 이미 팽호를 빼앗겼으며, 민심은 의심을 품고 있다. 적어도 군수품은 선박에 있다. 만약 병사들이 이를 이용하여 등을 돌리면, 이후의 결과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할 수 없이 필리핀 공격 계획을 포기한 풍석범은 병력을 나누어서 사수하자고 주장했지만, 유국헌은 이미 군중의 뜻이 와해되어 방어가 여의치 않다며, 청나라의 관대함에 기대는 편이 더 낫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정극상에게 말했다.

"민심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방어한다고 해도 변한다. 그리고 장수와 병사는 피로에 지쳐 싸워도 예측하기 어렵다. 마땅히 투항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랑이 보낸 사람이 와서 투항을 권유했는데, 공교롭게도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 일전에 유국헌의 부하로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자 유국헌은 더욱 투항을 주장했고, 풍석범이 계속 반대하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전에 두 명의 사신이 섬에 와서 회유를 의논했을 때, 신하로 칭하지 않겠다고 하여 결국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올해 봄에 다시 대만에 사람이 와서 회유를 의논했지만, 변발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팽호를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모두 그대의 뜻이 정해지지 않아서가 아닌가? 그런데 이에 이르러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으니, 만일 하루아침에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면 어찌하겠는가. 이전부터 사태를 명확히 인식하는 자를 호걸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대사가 이미 정해지면 빨리 하늘에 순응해야 한다."

풍석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극상은 이미 투항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는 시랑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항복의 의사를 표시했고, 이에 시랑은 시위 오계작을 대만에 보냈다. 오계작은 시랑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에게 즉각 변발을 하라고 권유했는데, 유국헌은 대만이 청나라에 투항하는것에 민심이 동요하여, 누가 변란이라도 일으키면 책임이 커질것을 우려, 시랑에게 어서 대만으로 와서 치안을 유지하라고 권유했다. 이에 시랑은 스스로 출발하여 8월 13일 대만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정극상은 유국헌, 풍석범 등 문무관원을 대동하고 나와 시랑을 공손하게 영접했고, 모두 변발을 했습니다. 시랑은 대만 백성들이 놀라지 않게 주의하면서, 추수철이 멀지 않았으니 농사 일에 즐겁게 힘쓰라고 다독이고는, 자신을 쫒아낸 정성공의 묘에서 제사를 올리고 정지룡, 정성공, 정경이 대만을 개발한 공적을 치하하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희는 승리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 시랑을 정해후(靖海侯)로 봉하여 세습하도록 했고, 병사들에게도 모두 상을 내려주었습니다. 1683년, 정극상, 유국헌 풍석범은 북경에 도착했고, 강희는 정극상에게는 공작, 유국헌과 풍석범에게는 백작의 지위를 주어 토지를 내려주었다. 시랑은 유국헌이 사람이 뛰어나고, 또 대만의 평화적으로 항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면서 추천했다. 이에 강희는 유국헌을 직접 만나서 말했다.

"대만과 교류가 막힌지 60여 년, 그대는 충성심을 가지고 시랑이 군대를 이끌고 무력 토벌한다는 이유로 먼저 투항하였으니, 이에 특별히 총병관을 제수하여 그대를 우대하겠다. 마땅히 방어에 힘써서 병민을 편안히 하고 도적을 막도록 하라."

그리고 토지와 저택을 내려주었고, 3대에 걸쳐 관직을 그대로 세습할 수 있게 허락했습니다. 문제는 이제 대만의 향후 처후였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두가지로 나뉘었는데, 대만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해외에 고립되어 도적의 소굴이 되기 쉬우므로 포기하고, 오로지 팽호를 방어해야 한다. 그곳 사람들을 옮기고 땅을 포기하자."

이 말을 들은 시랑과 요계성등은 깜짝 놀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비난하였다. 무엇보다 대만을 점령하고 탐색한 시랑은 노련한 정치적 감각으로 장기적인 안목의 상소를 올려 강희제 에게 보고했다. "첫째, 대만은 인구 밀도가 높고 호구가 많으며, 농민과 상인이 각기 그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을 모두 이주시키고 토지를 옮기게 되면 생업을 잃고 떠돌아 다니게 될 것이다. 둘째, 해당 지역은 심산유곡으로 은둔자가 많다. 이들이 토착민들과 결탁해 무리를 모으고, 긴급할 때 내지의 도주한 군민과 당을 결성하여 피해를 입히며, 선박과 무기를 제조하여 해안을 약탈하면 좋지가 못하다. 셋쩨, 대만은 동남의 해안 방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대만은 비록 해상의 한 섬이지만, 강소, 절강, 복건, 광동 4성의 왼편 보호막이다. "넷째, 네덜란드가 대만을 정탐하면, 반드시 변방을 노리고 우리의"넷째, 네덜란드가 대만을 정탐하면, 반드시 변방을 노리고 우리의 문전에 가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환이 훗날 연해의 여러 성에서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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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대만을 포기하고 팽호를 지킨다. 이는 틀린 말로 팽호와 대만은 하나이고 대만이 없으면 팽호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대만을 지키면 팽호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대만과 팽호는 같이 지켜야 합니다." 

 강희는 의정왕대신회의에서 이를 논의하게 하였고, 명주등은 시랑의 말이 지극히 옳다고 보고했다. 이리하여 대만에 1부 3현이 설치되었고, 총병관 1명, 부장 2명, 병력 8,000여명을 두고 수비하게 하는 한편 팽호에도 2,000여명을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강희는 대만에 파견되는 관원들에게 극히 주의할 것을 명령했고, 이익을 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청나라 문무 관원들이 계속하여 대만으로 파견되어, 마침내 대만이 중국에 예속되게 된 것이다. 


[출처]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강건성세(康乾盛世)의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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