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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8 01:52
[기타] 병자호란 전투들(3)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389  

쌍령 전투

남한산성이 포위, 고립되자 제도()의 감사나 병사가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이 때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도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쌍령에서 청군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허완은 미처 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일군이 패하여 전사하였으며, 민영은 휘하의 군사를 독전하여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일군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쌍령전투 [雙嶺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교산 전투

1636년 12월 20일, 국왕의 근왕병 소집 명령을 받은 전라감사 이시방()은 6,000여 명의 근왕병을 모집한 다음, 12월 29일에 전라병사 김준룡()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벽암() 각성()이 승병 2,0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전라도 근왕병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1월 2일, 이시방은 양지에 도착하여 전라병사 김준룡이 지휘하는 선봉군 2,000명을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자신은 본대와 함께 그 뒤를 따라 북상하였다.

1637년 1월 4일, 전라병사 김준룡의 선봉군은 광교산()[남한산성 남방 100리 지점]에 당도하였다. 광교산에 포진한 김준룡은 진영 중앙에 군수물자를 비축하고 장기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방에 투입하여 남한산성과의 통로를 차단하고 주력 5,000명으로 광교산의 전라도 근왕병 진영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1월 5일, 청군은 조선군 진영에 집중적인 화포 사격과 함께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라도 근왕병은 진영 제1선에 포수, 제2선과 제3선에는 궁병과 창검병을 각각 배치한 후 청군이 전진하면 총포 사격을 집중하고, 후퇴하면 궁병과 창검병이 배후를 엄습함으로써 청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1월 6일, 청나라 장수 양굴리는 전 병력을 투입하여 광교산에 대한 또 한 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였다. 근왕병들은 끝까지 진지를 지키기 위하여 선전 분투하였으나 유시() 무렵에 광교산 동남방에 있던 광양현감 최택()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청군이 진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전라병사 김준룡이 광교산 북방에서 동방으로 급거 이동하여 청군과 혼전을 벌였다. 이러한 혼전 가운데 청군의 주장 양굴리가 근왕병 포수의 총탄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청나라 진영은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지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틈을 타 조선군은 일제히 반격을 가하였다.

광교산 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는 반수 이상의 병력을 잃고, 광교산 동방 10리 지점까지 퇴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교산 전투 [光敎山戰鬪]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화도 전투

청군이 도하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청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침공을 막으려 하였다. 먼저 주사대장 장신 휘하의 강화수군을 광성진 부근에 배치하고 충청수사 강진흔이 이끄는 충청수군을 연미정 일대에 포진시켜 통진나루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강화해안에 3,000여 병력을 포진시켜 상륙을 저지하려 하였으며 강화부성에도 700여명을 두어 각 문루를 지키도록 하였다.

1637년 1월 22일 새벽 강화도 공략준비를 완료한 청군은 염하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먼저 홍이포를 발사하여 조선수군과 해안의 육군부대를 공격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포탄이 떨어지자 원거리 사격에 놀란 조선군은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포격 후 청군은 대소 선박과 뗏목에 병력을 분승시켜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벌이려 하였다. 조선군은 청군 선박을 요격하기 위해 갑곶 부근의 충청수군이 출동하여 청군 선박 10여척을 격침시키는 등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광성진에 포진해 있다가 갑곶으로 이동 중이던 강화수군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보강되었고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화수군을 이끌던 주사대장 장신은 청군 선단의 기세에 눌려 자기 휘하 선단에게 퇴각을 명하고 원배치지인 광성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고립된 채 분전하던 충청수군은 궤멸되었으며 염하에서 청군의 상륙부대를 저지하려던 계획은 실패하였다.

염하에서의 해전에서 패배하고 청군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연안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해안에 포진하였던 병력을 강화성으로 후퇴시켰으며 자신은 광성진으로 달아나 주사대장 황신과 함께 육지로 피신하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은 대부분의 병력은 강화성으로 철수하거나 산간으로 분산 도주하였다. 해안에는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자리를 고수한 중군 황선신 이하 100여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청군은 해안에 조선군 복병이 배치되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먼저 정찰병을 갑곶에 상륙시켜 상황을 확인하였으며 홍이포를 이용하여 재차 원거리 제압사격을 가한 후 일제히 해안에 상륙하였다. 청군이 상륙하자 해안에 남아 있던 소수의 조선군은 지근거리까지 청군을 유인한 후 일제 사격을 가하여 다수의 청군을 살상하였으나 대오를 정비한 청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말았다.

오전 8시경 갑곶 일대의 해안을 장악한 청군은 별다른 저지를 받지 않고 전진하여 오전 10시경 강화성에 도착하였다. 주장이 도주한 강화성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이 해안에서 후퇴한 병력 등 3,000여의 인원을 각 성첩에 배치하여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강화성을 완전히 포위한 청군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김상용 등은 이를 거부하자 정오경 청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청군은 먼저 화포로 집중사격을 가한 후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도 총포와 화살로 대항하여 오후 내내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청군의 포격에 성벽이 무너지고 문루가 파손되었다. 북문 방어망이 먼저 붕괴되어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이어서 동·서·남문의 수비도 무너지자 청군이 일제히 성내에 돌입하였다. 남문을 방어하던 김상용은 형세가 기울자 부근의 화약궤에 불을 던져 자폭하고 말았다. 성 안 각지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청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청군의 학살과 약탈로 강화부민과 이곳에 피난와 있던 종실과 대신의 가족 중 상당수가 피살되거나 청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자결한 이들도 많았다.

강화성을 점령한 청군은 성 안에 있던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의 항복을 받은 후 약탈과 살육행위를 중지하였다. 이들은 비빈과 왕자·종실·대신 및 그 가족을 포로로 잡은 채 철수하여 남한산성 부근에 자리한 청태종의 본진에 합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화도전투 [江華島-]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김화 전투

쌍령 전투, 험천 전투 등에서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러 오는 군사들이 청군에게 격파되자, 순안 현령 허노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평안도 병마사 유림은 남한산성으로 가서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강원도 김화에 이르렀을 때 약탈을 벌이는 청군을 발견,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637년 2월 20일 조선군은 약탈을 벌이는 청군을 보고 기병들을 보내 청군을 공격하였다. 청군은 갑작스러운 조선군의 공격으로 군사 태반을 잃고 패퇴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월 21일, 용골대와 마부대는 다시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화 10리 밖에서 진지를 구축하며 조선군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홍명구는 평지에서 진을 치고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유림은 산에 진을 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의견을 맞추지 못하였고, 결국 허노와 홍명구는 평지인 탑동에서 정규군 2000명과 의병 300명을 이끌고 진을 치고, 유림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지인 백동에서 진을 치게 되었다.

1637년 2월 22일, 조선군이 내분으로 분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청군은 탑동에 있는 홍명구의 진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청군은 먼저 대포를 발사하여 조선군 진지의 목책을 파괴하고, 조선군의 진지에 진입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청군과 조선군은 서로 백병전을 벌였으나, 조선군평야전백병전에 능한 청군의 군세에 밀리기 시작하였고, 패전의 조짐이 보이자 홍명구는 `능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살 것이오, 죽더라도 이름은 죽지 않을것이다.'라고 말하며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홍명구는 늙은 어머니에게 남기는 글을 하인에게 준 뒤 수많은 청군을 살상한 끝에 전사하였고, 순안현령 허노도 필사적으로 청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1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탑동 전투는 조선의 패배로 끝났고, 백동에 주둔하고 있던 유림의 군대는 홍명구의 군대를 구원하지 않았다. 홍명구의 조선군을 궤멸한 청군은 그 기세를 몰아 유림이 주둔한 백동으로 달려들었다.

청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장수 구현준이 전사하여 병사들이 동요하자, 유림은 `내가 여기에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외쳤다. 유림이 독려하자,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청군에 맞서 싸웠다. 유림은 1선에 배치한 창검병들로 하여금 청군을 공격하게 하였고, 청군은 조선군의 거센 반격에 당황하여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청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고 병력을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2선에 배치된 조선군 궁병과 어영 출신의 조총병들은 일제사격으로 위력적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조총병들이 발포하는 탄환은 청군 2~3명을 단숨에 관통하였다. 해질 무렵까지 청군은 계속해서 조선군을 공격하였으나, 사상자와 손실만 늘어날 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때 백마를 타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청군 장수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청군은 퇴각하였다. 청군은 다시 야간에 조선군을 재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유림은 군사를 이끌고 본래 목적지였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조선 조정과 청 사이에 강화가 체결된 뒤였고, 유림은 군사를 거두어 서울로 회군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김화_전투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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