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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8 01:28
[기타] 병자호란 전투들(1)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196  

동선령 전투

수안군수에 임명된 이완은 청군이 쳐들어와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원수 김자점을 돕기 위해 많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정방산성으로 향하였다. 이완의 군대와 합류한 김자점은 청군이 기병대가 많고 뛰어난 군대라 적은 수의 군사로는 대적할 수 없으므로, 길목이 좁아 기습을 가하기 좋은 지형인 동선령에 진을 쳤다. 이완은 동선령에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를 매복시켰고, 청군이 동선령에 들어오면 일제히 사격을 가하라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이때, 청군 몇백여명이 동선령에 들어오자, 조선군은 맹렬히 조총을 쏘았고, 조선군의 위력적인 조총 공격에 동선령에 들어온 청군은 전멸하였다. 그 후 이완은 군사들을 데리고 정방산성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이완이 정방산성에 올라 토산을 바라보니, 황색 깃발을 단 부대가 보이자 이완은 저 부대가 홍타이지의 부대인 것을 확신하고 토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청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완은 함경 남병사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청의 기병 부대를 함경 남병사의 군대로 오인한 것이였다. 청군은 이완을 도원수 김자점으로 착각하고 10겹으로 이완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조선군은 이완의 지휘 아래에서 싸웠고, 이완에게 군관 윤지륜이 청군을 공격하여 빠져나갈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완은 후퇴하지 않고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이완이 청군의 활을 맞고 쓰러졌고, 하는 수 없이 주인 없는 말을 타고 소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후퇴하였다. 이완의 조선군은 이 싸움에서 청군에게 대부분 격퇴되었다. 이완은 후퇴하던 도중 구사일생으로 도원수 김자점의 어영군을 만나게 되고, 이완은 청군에게 빼앗긴 물자를 다시 되찾기 위해 김자점의 어영군 100명을 거느리고 청군을 타격하였다. 청군은 어영군들의 사기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조선군에게서 탈취한 물자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청군은 다시 조선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시간을 너무 오래 끌 수는 없어 공격을 포기하고 군사를 돌려 남하하였다. 그 후 이완은 군사들을 수습하고 정방산성으로 향한 후 군사와 장수들의 상태를 점검하니 살아남은 군사와 장수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특히 도원수 김자점은 전투 도중에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동선령_전투

남한산성 전투

인조 일행이 성에 들어갔을 때 남한산성에는 미곡 14,300여석, 피·잡곡 9,500석, 장 220여독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1만여 병력이 2개월 이상 버티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으나 이때는 군사뿐 아니라 왕실과 종친, 문무관료, 서리, 노비 등 14,300여명이 들어와 장기 농성시 양곡 부족이 우려되었다. 산성방어를 맡은 조선군 병력은 광주진관 소속군병들과 경군인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군인 등 모두 13,800여명이었다.

12월 15일 2천여명의 청군 병력은 강화도와 통하는 한강 수로를 차단하였으며 다시 4천여명을 이동시켜 신천나루를 장악하고 삼전나루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남한산성 서쪽까지 진출하여 통로를 봉쇄하고 본군 도달시까지 대기하였다. 이어서 12월 19일에 청 좌익군 24,000명이 모두 당도하자 이들은 남한산성의 동편과 남쪽에 분산 배치되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12월 15일부터 청군은 기병 100여기를 서문에 접근시켜 형세를 정탐하였고 조선군은 12월 18일에 원두표가 이끄는 50여 명이 북문을 통해 나가 청군을 공격하여 6명을 사살하는 등 같은 달 21일까지 몇 차례 출성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같이 몇 차례 탐색전이 있었으나 양군이 정면 대결한 것은 아니었다. 청군은 견제공격을 통해 출성 및 연락을 방해하고 본대가 포위망을 완전히 굳히는 동안 지연전을 폈다. 그러나 조선군은 청군의 정세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출성 공격이나 어가의 이동을 도모할 수 없었다.

12월 22일 청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청군은 아침나절부터 5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각 문에 1천여 명씩 배치하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화포를 동시에 사격하여 돌격부대를 엄호하고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조선군도 화포 사격을 가하고 화살과 돌을 날려 청군을 공격하였으며 정오 무렵 청군은 성과 없이 후퇴하였다. 이튿날에도 청군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세를 폈다. 아침 일찍부터 청군이 성벽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전날과 달리 청군이 공격진영을 갖추기 전에 병력을 내보내어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출성한 조선군과 청군은 성 아래에서 백병전을 벌였고 다시 성벽을 두고 양측의 군대는 정오까지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80여명이 전사하고 청군 200여명을 사살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남한산성을 단기간에 함락하여 항복을 받아내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작전을 바꾸어 성을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키려 하였다. 청군은 성 외곽의 주요 통로에 수십 군데의 목책을 설치하여 통로를 차단하고 복병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방어군과 외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다.

12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청 태종이 4만여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으로 진군하여 청군의 군세가 더욱 강해졌다. 청군의 포위망이 강화되는 반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여 점차 군량이 부족해져갔다. 각 도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근왕군들은 청군에게 각개 격파되거나 진격이 저지되어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11일에 그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던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산성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보다 확고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서문과 북문 앞에 병력을 집중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오랫동안 고립된 조선측의 항복을 촉구하는 행동이었다.

1월 24일 양군은 하루 종일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새벽에 청군은 미라동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검복리 일대로 이동시켜 산성 동문 일대에 대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포격으로 동문 문루 일각과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조선군 역시 천자포를 이용하여 청군 포대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대응포격을 견디지 못한 청군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저녁이 되자 청군은 다시 동문 밖에 진출하여 홍이포 7,8문을 거치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홍이포는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하여 동문과 남문 일대의 성벽 여러 곳이 파손되었고 성내의 사창과 행궁까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도 이에 대응하여 화포 사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청군 포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청군 화약더미에 명중탄을 작렬시키자 청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접근전이나 포격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1월 26일에 청군은 자신들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피난한 비빈과 왕자, 종실, 신료의 가족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조선측에 알리고 출성항복을 촉구하였다. 출성항복 여부를 두고 성안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공성기구를 배치한 채 28일까지 여전히 포격만을 가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조선의 조정은 최후까지 항전하려던 방침을 포기하고 국왕의 출성항복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청군 진영에 통고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45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의 전투는 종식되었다.

남한산성 전투는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외부의 성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처지에 내외 연계작전을 펼 수가 없었고 식량부족과 전의 상실로 말미암아 끝까지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한산성전투(1)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민족 전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검단산 전투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3천여 명의 병력이 모였지만, 식량은 겨우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양만 비축되어 있었다. 농성전을 오래 벌이기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인조는 각 도의 관찰사들에게 근왕군을 이끌고 상경해 남한산성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인조의 지시를 전달받은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는 1월 12일 각 군현들에서 7천여 명의 근왕군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양근(, 지금의 경기도 양평) 일대에 도착한 조정호는 그곳에 군영을 설치해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춘천 방어사 권정길()로 하여금 1천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검단산으로 향하게 했다.

당시 청나라는 본대는 아직 남하하지 않았지만, 후속 부대가 도착해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병력이 증강된 상태였다. 권정길이 이끄는 강원도 근왕군의 선봉대는 1월 19일 검단산으로 진출해 그 지역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를 패퇴시키고 요새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횃불로 남한산성에 연락을 보내 지원군이 도달했음을 알렸다.

하지만 1월 20일 청나라는 별동대를 보내 검단산의 요새를 공격해왔고, 병력과 장비가 모두 열세였던 선봉대는 퇴각해 본대와 합류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기습을 받아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검단산전투 [鈐丹山戰鬪] (두산백과)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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