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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7 11:22
[기타] 러시아의 동방진출과 조선의 나선정벌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121  

러시아의 영토는 1700만㎢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캐나다가 2위이며, 면적이 엇비슷한 중국과 미국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상당수의 나라가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여전히 1위를 고수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시베리아’라는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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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1582년 예르막(Yermak)이 이끄는 800여명의 코사크인이 우랄산맥 부근을 흐르는 시비르(Sibir)강을 건너 시베리아 진출의 길을 열어젖힌 사건은 러시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오랜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가 드디어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동방 진출’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베리아’라는 이름도 실은 이 ‘시비르’라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정부의 특별한 양해 아래 시베리아 지방과 모피무역에 종사하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독자적인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예르막도 그 아래에서 일하던 일종의 용병대장이었다. 그는 원래 돈강과 볼가강 유역에서 약탈을 하며 지내던 코사크인의 ‘두목(ataman)’이었는데, 1582년 시비르강을 건너 시비르 칸국의 쿠춤 칸(Kuchum Khan)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부터 불과 2~3년 뒤 그는 토볼강가에서 몽골군에 의해 포위되어 피살되고 말았지만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에서 드러나듯이 후일 그는 민담과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1649년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부단히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도 엄청나게 넓어져 갔다. 대략 1300만 ㎢로 추산되는 시베리아는 러시아 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시비르강을 넘어선 뒤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60~70년 동안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반도만한 영토를 하나씩 확보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베리아로 진출했으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속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시베리아로 나간 까닭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피였다. 담비, 수달, 밍크 같은 동물의 모피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러시아인은 물론 유럽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높아 비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후일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으로 진출해 그곳의 모피를 들여올 때까지 러시아는 유럽의 모피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부드러운 금’이라고 불리던 모피를 통한 국가의 재정수입은 1589년 3.75%, 1605년에는 11%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모피 공급의 원천인 동물들은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고 새로운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현지 주민들로부터 모피를 일종의 세금처럼 받았고 이를 ‘야사크(yasak)’라고 불렀다. 원래 ‘야사크’라는 말은 몽골어의‘법령’을 뜻하는 ‘자사크(jasaq)’에서 유래했는데 16세기 이후 시베리아에서는 ‘모피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다.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진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그곳의 독특한 수로체계(水路體系)였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시베리아의 겨울에 사람들의 활동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여름의 시베리아도 이동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평한 시베리아 대평원에는 크고 작은 강줄기가 마치 바둑판처럼 얽혀 있다. 큰 강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북빙양으로 들어가고, 그 사이로 작은 강들이 동서로 흐르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수로를 이용해 여름에는 배를 타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 위로 썰매를 타고 이동했던 것이다.

시베리아 지도를 보면 토볼스크, 톰스크, 예니세이스크, 셀렝긴스크, 이르쿠츠크 등 크고 중요한 도시들이 모두 강의 이름을 딴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대체로 강과 강이 만나는 교차점에 목책(木柵)으로 지어진 성채인 ‘오스트로그(ostrog)’라는 것에서 기원하였다. 당시 러시아 본토에서 가난한 농민, 범법자 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동쪽으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는 여전히 몽골-타타르 계통의 부족이 흩어져 있고 이들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자주 약탈을 자행하였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약탈을 막고 이주민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군대와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보에보다(voevoda)’라 불리던 군관을 파견하여 오스트로그를 거점으로 지배력을 장악해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초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는 군사식민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587년에는 토볼스크가 세워지고, 1604년에는 톰스크, 1619년 예니세이스크, 1652년 이르쿠츠크, 1632년 레나강 유역에 야쿠츠크가 건설되고, 마침내 1649년에는 오호츠크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인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식량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쿠츠크를 일종의 사령부로 삼아 일련의 탐사대를 아무르강 유역으로 파견했다.

1643년에는 포야르코프(V.Poyarkov)가 132명의 대원을 이끌고 탐사에 나섰는데, 1645년 귀환한 뒤 살인을 자행하고 인육을 먹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자신도 그 같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식량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겠지만, 현지인 사이에서는 식인종이 출현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사실 무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셈이다.

뒤이어 1648년에는 하바로프(E.Khabarov)의 탐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는 아무르강 상류에 있던 현지민을 공격하여 약탈과 방화와 살해를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극동의 도시 하바로프스크는 바로 이 잔혹한 탐험대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53년에는 스테파노프(O.Stepanov) 탐험대가 파견되어 숭가리, 우수리 등의 강을 오가면서 모피세와 식량을 거두어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의 갑작스런 출현은 아무르 지방의 현지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그들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는 왕조 교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막 종료되었다. 1644년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건설한 ‘대청(大淸·Daicing)’이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고 중원에 들어온 만주족은 중국을 정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저 멀리 아무르강 유역까지 많은 군대를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에 대한 원병 요청은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서 원정군을 파견하게 된다. 1654년에는 변급(邊)을 사령으로 한 150명, 그리고 1658년에는 신유(申瀏)가 이끄는 262명 소총수의 파견이 있었다. 특히 1658년 6월 10일(음력) 조선과 만주 연합군은 아무르강의 지류인 숭가리강(松花江)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록 잠시 동안이나마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의 경과는 신유가 남긴 ‘북정일기(北征日記)’라는 글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사건은 당시 ‘나선정벌’이라 불렸고 지금도 이런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나찰(羅刹)’, 조선에서는 ‘나선(羅禪)’이라는 글자로 표기된 단어는 ‘루스(Rus)’라는 말을 옮긴 것으로 ‘나선정벌’은 ‘러시아 정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파병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러시아 본토가 아니라 분쟁지역인 아무르강 유역에 일종의 원군으로 파견된 것인데, 이를 두고 ‘러시아 정벌’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냥 조선시대의 ‘아무르 파병’ 정도로 부르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러시아인의 아무르 진출은 수십 년 뒤에 재개되었고, 1680년대 초에는 알바진(Albazin)이라는 곳에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동안 아무르강 유역에서 러시아인의 활동이 종래 약탈적 탐험과 조사에서 이제 본격적인 식민적 지배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농경지 1000헥타르가 개간되고, 20여개의 부락이 만들어졌으며, 성인남자만 800여명에 수많은 부녀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알바진에 관한 보고를 받은 강희제(康熙帝·재위 1661~1722)는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만주족의 발원지인 동북지역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군사적 대응책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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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진출의 거점 도시 토볼스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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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볼스크의 모습

1685년 그는 만주족 출신의 장군인 펑춘(朋春)과 랑탄(郞坦)의 지휘하에 기병 1000명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여기에 노무자 1200명, 대형포 30문, 소형포 15문, 소총 100정의 화력을 동원하여 알바진 공격을 감행하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군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특별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만주군은 알바진 부근에 있던 경작지를 파괴하지 않은 채 승리에 도취해 그냥 귀환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이 귀한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들이 그것을 그냥 둘 리는 만무였다. 가을이 되어 곡식이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다시 알바진으로 돌아와 폐허가 된 성채를 보수하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희제는 할 수 없이 2차 원정을 지시했고 1686년 알바진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던 러시아인을 몰아낼 수는 없었고,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당시 중앙유라시아의 국제 정세는 강희제로 하여금 알바진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한 상황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몽골에서 청나라가 두려워할 만한 새로운 유목세력, 즉 ‘준가르(Junghar)’가 출현한 것이다. 이들은 파미르고원 북방에서부터 알타이산맥에 걸치는 지역, 다시 말해 몽골고원의 가장 서쪽에 거주하던 유목집단이었는데 동부 지역의 몽골인과는 방언상의 차이가 있을 뿐 언어는 동일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심각한 대립관계였다.

양측의 관계는 1688년 준가르의 새로운 지도자 갈단(Galdan)이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하면서 파탄을 맞게 되었다. 갈단의 침공에 속수무책이 된 동몽골 사람들은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제 고비사막 북방의 초원 전체는 갈단이라는 인물의 수중에 들어갔고 청나라는 이 막강한 신흥 유목제국을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후반 중앙유라시아의 정세는 청제국, 러시아, 준가르(몽골)라는 3자 구도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청은 러시아와 알바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준가르와 러시아는 사신들을 파견하면서 외교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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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0년대에 몽골계 칸국들을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시작한 이반 4세(1530~1584)의 초상화. 

강희제는 이런 상황이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만약 러시아와 준가르가 연합할 경우 청나라는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버리고,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갖고 있던 한족까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왕조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 러시아로서는 청나라에 등을 돌리고 선뜻 준가르와 동맹을 맺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서 이미 명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접촉을 시도해왔다. 청이 들어선 뒤에도 1656년 바이코프(F.Baikov)를 파견했는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670년에는 밀로바노프(Milovanov)가 사신으로 와서 강희제를 직접 만나 교역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들이 ‘아라사(俄羅斯)’라는 나라에서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말은 ‘오로스(Oros)’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인의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이 ‘로스(Ros)’라는 단어의 처음에 있는 r발음을 잘 못했기 때문에 모음을 하나 더 추가해서 지어낸 것이었다. 강희제는 이때 비로소 알바진에 있는 ‘나찰(나선)’과 북경에 온 ‘아라사’가 같은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일석삼조의 외교적 방책을 생각해내었다. 즉 러시아 측에 교역을 허가해주는 대신, 아무르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인을 귀환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와 준가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양측이 체결한 조약이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었다. 이로써 강희제는 러시아를 중립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고, 북방의 강적인 준가르와 제국의 명운을 건 싸움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대결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신유의 ‘북정일기’에 묘사된 전투 장면

‘10일 아침 일찍 열벌마을을 출발해 흑룡강 어귀를 지나 20여리를 내려갔을 때 드디어 적의 선단과 맞닥뜨렸다. 우리는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선들은 곧 돛대를 세우고 10여리를 후퇴하여 강가에 배를 모아 포진한 후 적병들은 판옥에 올라서서 아군의 동정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전선이 번갈아 들락거리면서 적선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이나 접근했을 때 일제히 대포를 쏘며 공격을 개시하자 적선들도 대포로 응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했다. 이때 후영ㆍ전위ㆍ중군의 모든 전선이 한꺼번에 쳐들어가 활과 총포를 무수히 쏘았다.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서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아틀라스 유목사 인용, 편집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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