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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7 00:32
[한국사] 곡교천에 늘어 선 산성의 비밀 - 아산에만 20개 山城 그 많은 성을 누가 쌓았을까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275  

* 곡교천에 늘어 선 산성의 비밀  - 아산에만 20개 山城 그 많은 성을 누가 쌓았을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산은 산성의 고을이다. 아산에는 무려 20여 개가 넘는 산성이 있다. 특이한 것은 곡교천이라는 하천을 끼고 양쪽 산에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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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온천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단골 신혼여행지였다. 신혼여행은 당연히 외국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믿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이제 온양온천은 1960~70년대 신혼여행을 다녀온 분들이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순천향대학교가 있는 신창까지 연결된 전철이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설레던 신혼여행지를 전철을 타고 내려오면서 그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더구나 아산시 배방면의 KTX 천안아산역은 서울에서 30~40분이면 도착한다. 시간상으로는 서울 시내 웬만한 지역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 된 것이다.온양시는 1995년 아산군과 통합하면서 아산시가 되었다. 

유명한 대천시와 덜 유명한 보령군이 통합하면서 보령시가 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아산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명도(知名度)가 떨어지는 문제 때문에 지금도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침 7시에 서울 마포에서 차량으로 출발하니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아산시청 주차장에 도착했다. 

산성 안내를 맡아줄 아산시청 산림과 이낙원 팀장과 김소형 씨 등을 만나기로 한 장소다. 아산은 조선시대 임금들의 이궁이었던 온궁(溫宮)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아산시를 찾은 이유는 산성답사 때문이다. 아산에는 무려 20개가 넘는 산성이 있다. 

특이한 것은 곡교천(曲橋川)을 끼고 양쪽 산에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곡교천은 서해와 만나는 삽교천에서 시작해 아산시를 거쳐 천안까지 연결되는 하천이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간행한 <조선지지자료>는 곡교천의 길이가 49.2km라고 기록하고 있다. 곡교천을 따라 늘어선 20여 개의 산성은 그 자체로 역사의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산성을 쌓는 데는 막대한 경비와 노동력이 든다. 이 많은 산성을 누가 왜 쌓았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도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으며, 막연히 백제시기부터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다. 아산지역의 산성군(山城群)은 우리 역사에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아산의 역사적 위치

그 수수께끼를 풀려면 먼저 아산의 고대 역사를 훑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역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산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의 하나다.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석관묘 유적이 그것이다. 1976년 과수원 창고 곁에 우물을 파던 중 많은 석재가 발견되고 청동검 9점과 방패형 동기(銅器)와 다뉴세문경, 청동도끼와 토기, 그리고 옥제품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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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면 궁평리에서도 세형 동검과 동과(銅戈:창)·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고, 염치면 백암리, 영인면 신봉리, 인주면 관암리 등에서도 마제석기나 무문토기 같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음봉면 월랑리에서는 고인돌도 보인다. 청동검과 고인돌은 모두 고조선의 표지유물이다. 

따라서 아산지역은 고조선 선조들이 살았던 옛 터전이다. 아산지역은 언제 백제 영역이 되었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사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7년(서기 9년) 기사와 온조왕 34~36년(서기 16~18년) 기사다. 먼저 온조왕 27년의 기사를 보자.

“온조왕 27년 여름 4월에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이 기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두산성이다. 대두산성은 우리가 오늘 오르려는 영인산성으로 비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온조왕 34~36년의 기사를 보자.

“온조왕 34년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하여 배반하므로 온조왕이 직접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자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으므로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들도 베어 죽였다. 온조왕 36년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했다.”

탕정(湯井)은 글자 그대로 끓는 우물, 즉 온천이라는 뜻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충청도 온수현(溫水縣) 조에서 “본래 백제의 탕정군이다”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온양군(溫陽郡) 조도 “본래 백제의 탕정군이었다”고 전한다. 탕정·온수·온양 등은 모두 같은 뜻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허위라고 주장하지만, 김부식이 굳이 없는 사실을 창작해 기록했을 가능성은 없다. <삼국사기>의 위기사는 백제가 마한세력을 구축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온조왕은 재위 27년 아산에 대두산성을 축성했으며 재위 36년에 탕정성을 축성하고 대두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했다는 것이다. 

아산지역은 백제 건국 초기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아산지역에서는 역사의 격변기마다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고구려의 남하에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구려와 대치하던 최전선이었다. 또한 동맹국이던 신라가 맹약을 깨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553년 신주(新州)를 설치한 이후에는 신라와 대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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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산시는 조선시대의 아산·온양·신창 3개 군·현이 통합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아산현 조에는 “(아산현이) 신라 때 탕정군(湯井郡)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인주(仁州)로 고쳤다”고 전한다. 인주라는 지명은 한국고대사의 위치 비정에 대단히 중요하다. 비류백제의 도읍지인 미추홀이 어디인가를 가릴 수 있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서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비류백제에 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온 유리를 태자로 삼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하했다. 

비류는 열 명의 신하가 한산(漢山)가의 하남(河南)을 도읍지로 삼자는 청을 거부하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의 사정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류가 도읍한 미추홀은 아산인가? 

“비류는 미추홀의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온조는 도읍을 막 정했으며 백성들이 편히 살므로 마침내 부끄러워 뉘우쳐 죽으니 그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이것이 바로 수수께끼 왕조인 비류백제에 관한 사적(史籍)이다.

비류가 도읍으로 삼았던 미추홀은 어디일까? 현재 인천 문학산성이라는 견해가 통설처럼 돼 있다. 그 단초를 제공한 인물도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지금의 과천지역인 율진군(栗津郡)에 소속된 소성현(邵城縣:현 인천)을 설명하면서 미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인주(仁州)다. 경원매소라고도 하는데, 일명 미추(彌鄒)라고도 한다(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 一云 慶原買召 一作 彌鄒).”

이 구절의 핵심은 ‘인주(仁州)=미추’라는 것이다. 인주가 훗날 인천으로 바뀌었으므로 현재의 인천이 비류백제의 도읍지인 미추홀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소성현이 언제 인주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는지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종실록지리지> 인천군 조는 인천군이 원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라면서 “(고려) 인종(仁宗) 때 황비(皇?)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승격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인종 때 인주라는 지명이 최초로 생겼다는 기록이다. <동국여지승람> 인천도호부 조도 “인종이 또 순덕왕후 이씨(李氏)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人州事)로 고쳤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현재의 인천을 인주라고 부른 시초는 고려 제17대 인종(재위 1122~1146) 때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했듯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아산현 조는 탕정의 속현이었던 아술현을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현재도 아산시에는 인주면이 있는데 고려 초기에 생긴 지명인 것이다. 반면 현재의 인천을 인주라고 부른 것은 고려 건국 200여 년 후의 일이다. 미추홀을 지금의 인천으로 본 것은 고려 인종 이후에 생긴 시각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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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주라는 지명의 시초에 대한 이런 부분에 주목하지 못하고 ‘인주=인천’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바라본 결과 현재의 ‘인천=미추홀’이라는 인식을 낳았다. 현재 인천을 미추홀이라고 단정할 만한 유적·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것도 의문을 뒷받침한다. <증보문헌비고> ‘군현연혁’ 조도 현재의 인천을 인주로 고친 것은 고려 인종 때라고 기록한 반면 아산을 인주로 고친 것은 고려 초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산=인주’의 명칭이 ‘인천=인주’의 명칭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던 것이다. 역사학자이자 농학자인 김성호 박사는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1982)에서 비류백제의 도읍지 미추홀을 현재의 아산 밀두리 지역이라고 비정했다. ‘미추홀-아산 밀두리설’이 등장한 것이다. 김 박사는 미추홀을 당시의 인주(인천)로 비정한 것은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인종의 모후 순덕왕후의 본관지를 기리기 위해 ‘인주(仁州)’라는 지명을 하사했는데, 고려 초 이미 아산을 인주로 개명했음을 감추고 ‘인주’를 옛 ‘미추홀’이라고 비정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류 사학계는 김성호 박사의 견해에 별다른 이견 제시 없이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이론이 등장하면 기존 이론과 치열한 논쟁을 거쳐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학문권력으로 무시해 버리는 고질적인 비학문적 풍토가 재연된 것이다. 앞으로 ‘미추홀-문학산성설’과 ‘인주=미추홀설’은 치열한 학문적 연구와 논증을 거쳐 재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문헌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고대 도읍지의 위치를 비정하려면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어느 지역이 고대국가 성립에 더 적합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과, 고고학적 유적·유물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인은 도읍지를 선정할 때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데 적합한 자연조건을 갖춘 곳을 우선하게 마련이다. 

이 중 중요한 것은 관방(關防:방어)과 풍부한 생산물, 그리고 유통망이다. 아산에는 곡교천을 중심으로 20여 개가 넘는 산성이 집중돼 있다. 웬만한 대부대가 아니고는 곡교천으로 진입했다 사방으로 포위되기 십상인 것이다. 관방 측면에서 아산만한 지역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철기의 제작과 사용 여부다. 

백제는 토착세력이 조금씩 발전해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북방 부여계 유이민집단이 남하해 빠른 시일 안에 건국한 국가다. 유이민집단이 토착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막강한 전투력이다. 고대 전투력의 핵심은 철제 무기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 등을 제작할 수 있는 야철기술과 제철기술이 고대국가 건국의 결정적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고대국가의 도읍지는 대부분 철 산지와 야철 및 제철 유적이 존재한다. 여러 지역에 야철지가 존재하는 아산은 이런 조건에 적합하다. 또한 바닷물과 민물의 교차지역은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다. 온양으로 향하는 곡교천과 도고로 향하는 무한천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넓게 분포한다. 

그리고 이런 생산물을 활발하게 유통할 수 있는 강과 바다가 존재했다. 아산은 고대국가 성립의 이런 조건들에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역이다.

‘조운의 거점’ 아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아산은 조운의 거점이라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 역시 아산지역이 갖는 지리적 특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조운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징수한 미곡(米穀)을 선편을 통해 개성이나 한양으로 운반하던 제도다.전국에 산재한 각 고을은 징수한 세곡을 인근의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한 창고에 모았다 일정한 시기에 배로 수송한다. 

충주의 덕흥창, 원주의 흥원창 등은 강변에 설치한 조창(漕倉)이고, 마산의 석두창이나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의 공진창은 해안에 설치한 조창이다. 이 가운데 인주면의 공진창은 충남지역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운반했는데, 중종 때는 80칸 규모의 창고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의 세곡 비중은 전국 대비 17% 이상으로, 전국 최대의 조운창이었다. 

인주면 밀두리 주변 아산만 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8.5m에 이르나 배가 왕래하기가 쉬워 깊은 내륙까지 수운이 용이했다. 현재는 방조제가 놓이고 상류에 저수지가 설치되어 포구로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광복 전까지도 수십 척의 중선(中船)이 드나들던 이 일대 최대의 파시(波市)였다고 한다.

곡교천으로 수많은 배가 내륙까지 왕래하고, 파시의 불빛이 흥청거리는 장면을 상상하면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다시 그 시절의 자연환경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이번 산성답사에서는 20여 개의 많은 산성 가운데 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곡교천 내륙의 배방읍(排芳邑) 신도리코 뒤편 배방산성도 올라가야 했으나 이전에 몇 차례 가보았기에 생략하고, 물한산성과 꾀꼴산성을 둘러보고 영인산성을 올라가기로 했다. 물한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아산시 대동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홍가신(洪可臣·1541~1615) 묘역에서부터 시작한다. 

홍가신은 임진왜란 때 이몽학(李夢鶴)의 봉기를 토벌한 공으로 청난(淸難) 1등공신에 책록되고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홍가신 기념관과 생가지는 최근 단장을 마쳤다. 망덕산 자락 남향받이에 있는 묘역은 아늑하고 양지바른 곳이었다. 묘역을 돌아 경사진 산길을 오른다. 낙엽이 소복이 쌓인 운치 있는 산책길이다. 

햇살도 따사롭고 길 또한 편안하다. 아산시에서는 물한산성과 꾀꼴산성을 발굴 복원하고 산성까지 산책길을 조성해 이 일대를 역사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몇 차례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니 멀리 석축이 흐트러진 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물한산성은 물앙성이라고도 불리는데, 한자로는 수한산성(水漢山城)이라고 쓴다.

영인산성을 찾아서
 
해발 280m의 야트막한 물한산 상부에 사다리꼴로 펼쳐진 성터는 둘레가 약 690m라고 한다. 성벽의 대부분은 이미 무너져버렸는데, 함께한 원로 고고학자 안춘배 교수는 자연적 붕괴라기보다 점령군이 성을 인위적으로 헐어버린 것으로 추측했다. 

적의 재기를 막기 위해 일부러 성벽을 허물어버린 경우라는 것이다. 성을 허물 정도의 사연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만, 아무런 문적(文蹟)이 없으니 그냥 상상의 나래를 펼 뿐이다. 

허물어진 돌더미 사이로 자연할석으로 쌓은 성벽의 온전한 모습이 간간이 남아있다. 이를 원형으로 삼아 복원한다면 아름다운 성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물한산성은 일찍이 이기백 교수가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 조에 나오는 대두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두산성을 영인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더 많다. 

앞서 인용했듯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와 전쟁에서 전사한 후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이 재위 2년(476)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고 전하는데,현재 물한산성은 그 규모로 보아 백성을 옮겨 살게 할 정도로 큰 성은 아닌 듯하다. 흩어진 성벽돌을 주워 모아 누군가가 돌탑을 쌓아 놓았다. 무속신앙일 것이다.

물한산성에서 꾀꼴산성으로 향하는 능선은 편안하고 완만했다. 꾀꼴산성은 한자로 앵리산성(鶯里山城)이라고 쓰는데, 안내판에는 성의 모양이 꾀꼬리 둥지를 닮았기에 꾀꼴산성으로 불렀다고 적고 있다. 낭만적인 유래를 상상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꾀꼴산의 높이는 271m인데 성의 둘레는 340m라고 하니 물한산성보다 더 작은 규모다. 

서쪽으로 물한산성, 북쪽으로는 멀리 연암산 봉수대가 건너다 보인다. 백제 토기 편부터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산성은 백제 때 만들어져 그 후에도 계속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는 돌출부인 ‘치(雉)’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고 하는데,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렵다. 

산 정상부에 보이는 웅덩이는 저장시설이나 집수시설로 추정하는데, 산 정상인 만큼 집수시설로 보기는 어렵다. 이곳에도 무너진 성돌을 정성스럽게 쌓아 탑을 세 개나 만들어 놓았다. 일행은 산림도로를 따라 청계사 방향으로 내려왔다. 오후 영인산성 등정은 산 중턱의 헬기장부터 시작된다. 영인산성 정상에는 외지인에게는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조형물이 하나 있다.

‘민족의 시련과 영광을 기리는 탑’이라고 한다. 영인산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지만, 해발 363m로 산 자체가 높지는 않다. 그러나 영인·인주·염치면의 경계인 영인산에 오르면 천지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영인산성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영인면과 인주면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아산만과 안성천, 그리고 평택까지 조망된다. 

남서쪽으로는 삽교천과 아산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아산만에서 삽교천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감시할 수 있다. 또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동남에서 서북으로 흐르는 곡교천과 그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며, 곡교천 너머로 신창면 읍내리에 있는 학성산성을 비롯한 산성들이 먼 발치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신성산성(薪城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연려실기술> ‘변어전고(邊퀩典故)’의 폐지된 산성 조에는 물한산성과 꾀꼴산성, 그리고 이 신성산성(薪城山城)을 모두 폐지된 산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신성산성은 “옛날 평택(平澤) 사람이 피란하여 살았으므로 평택성이라고 부른다”고도 적고 있는데, 고구려나 신라가 평택을 점령할 때 그 지역의 백제인이 이주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동국여지승람>은 영인산성, 즉 신성산성을 대두산성으로 비정했다. 앞에서 인용했듯 “온조왕 27년 가을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이 재위 2년(476)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는 기록도 있고, 삼근왕 2년(478)에는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무리를 모아 대두산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도 있다.
 

그동안 훼손 우려 때문에 논란이 일었던 영인산성 탐방로가 최근 목제 계단으로 산뜻하게 단장을 마쳤다. 오랜 동안 성벽 위의 등산로로 등산객이 오가면서 성벽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뿐 아니라 등산객에게도 위험했던 길이었다. 성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목제 계단을 설치해 자연도 보호하면서 성벽도 보호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깎아지른 듯한 서남쪽 탐방로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절경이다. 파르스름하게 이끼가 끼어 있는 성돌, 성벽을 비집고 자란 소나무, 원형대로 보존된 성벽뿐 아니라 간간이 무너져내린 성벽마저 운치가 있다. 앞으로 최고의 등산로이자 탐방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안춘배 교수는 이런 성벽이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은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빨리 사적 지적 신청을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서남쪽 성벽을 타고 정상에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옛날에는 미군 통신부대가 있던 곳이다. 정상에서 사방이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 절로 ‘호연지기’가 생기는 듯하다. 깃대봉을 돌아 영인산성 정상부 가까이 다다르자 여러 곳에서 깨어진 기와편과 도기편을 수습할 수 있었다. 기와편과 도기편은 그 자리에 건축물이 있었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많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날이 어둑해지면서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진다. 산성을 내려가는 길 또한 구불구불하다. 마치 1500년 혹은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그 옛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있었을 장수와 옛 병사, 힘겹게 성돌을 지어 날랐을 백성이 보이는 듯하다. 그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성벽만 남았다. 이 성벽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답사의 뒤끝은 항상 깊은 여운과 또 다른 숙제를 남긴다.

[출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의 산성기행>  / 월간 중앙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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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2 18-05-27 00:59
   
미추홀이 개인적으로는 아산이라고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다만 아산의 여러 산성을 보며, 그리고 청동기 문화를 포함하요 이 지역의 역사가 좀 더 연구되기를 하는 바람으로 글을 적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류백제를 요서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도배시러 18-05-27 03:13
   
옛 조선선비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역사진실을 찾지 않았습니다.
깊게 들어가면 딱 부러지는 진실이 없기에 적당히 타협을 하며 역사를 남긴 겁니다.
그 사람들은 사학만 하는게 아니라 현실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이기에
실익이 없는 역사논쟁은 적당한 선에서 권력으로 깔아뭉개면서 기록을 남긴거죠.

정치하는 사람이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정치와 무관한 후손들이 역사진실을 찾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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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7 [한국사] 역사학자의 위치비정 논문 일부 (5) 하이시윤 04-17 120
19966 [한국사] [역사지리 #4] Quiz의 답안 - 내가 생각하는 열국의 위… (12) 윈도우폰 04-08 397
19965 [한국사] [역사지리 #3] 부여의 위치 추정 (4) 윈도우폰 04-07 534
19964 [한국사] [역사지리 #2] 고조선 시대의 열국의 위치 추정 (2) 윈도우폰 04-07 345
19963 [한국사] [역사지리 #1] 한반도와 만주의 지형 (소국 들의 위치 … 윈도우폰 04-07 386
19962 [기타] 민족의 친연성에 대해 (1) 관심병자 04-07 246
19961 [한국사] 가설을 세우는데는 출처가 필요없죠 (16) 하이시윤 04-07 315
19960 [기타] 출처를 다는 건, 남녀노소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입… (11) 아비바스 04-05 277
19959 [한국사] 소위 말하는 시민사학자들이 가생이 동아게에 계시… (7) 하이시윤 04-02 566
19958 [기타] 무식한 사람은 역사나 학문을 말하기 전에 기본을 갖… (2) 윈도우폰 04-02 294
19957 [한국사] 역사를 학문으로 받아드린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 (9) 아비바스 04-02 401
19956 [한국사] "정보" 를 다루는 사람들은 "출처" 를 달아야 맞습니… (11) 아비바스 04-01 361
19955 [한국사] 역사에 있어 사료나 증거라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3) 윈도우폰 04-01 399
19954 [한국사] 사이비 역사유튜버 거르는 꿀팁 (3) 아비바스 04-01 370
19953 [한국사] 요즘 역사 컨텐츠를 많이 보면서 깨닭는 것 ( 사이비 … (3) 아비바스 04-01 385
19952 [한국사] 동아게에서 역사글 관련 글 볼때마다 느낀 것 (5) 아비바스 04-01 301
19951 [한국사] 묘제로 본 고대 우리 민족과 이웃 민족 (5) 윈도우폰 03-31 527
19950 [한국사] 역사학자 돌려까기^^ 윈도우폰 03-30 352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595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515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473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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