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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4 06:51
[한국사]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홍종우와 조선의 길 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991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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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 이 사람에 대한 평가 역시 史料(사료)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사료가 빈약 할 경우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기 어 렵다.「3일천하」의 주인공 金玉均(김 옥균)을 살해한 자객 供1字(홍종우) 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사료는 극히 제한돼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김옥균 살해범」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홍종우는 조선국의 여권을 소지하고 최초로 프랑스에 유학한 卓異(탁이)한 인물이었다. 홍종우는 1890년 12월 프랑스에 도착해 2년 반 가량 파리에 체류했다. 기메 박물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여행가들의 모임>등에 참석, 조선의 실정과 역 사 • 문화 등을 소개하는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그는 소설가 로니의 도움을 얻어「춘향전」을 불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그는 조선의 고전소설「姑木生花(고목생화)」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기메 박물관 연보」26호에는 동양학자 앙리 슈발리에와 함께 한국인의 점성술을 다룬「直星行年便覽(직성행년편람)」의 번역본이 실려 있다.

홍종우와 교분이 있던 동양학자 펠릭스 레가메는, 홍종우의 파리 생활을 소개한 「어떤 정치적 자객」이라는 글을 동양학 학술지「통파오」(通報• 통보)에 발표했다.

 △하급문관 출신,잔반의 아들이었을 듯

이처럼 탁이한 인물이 어떤 이유로 김옥균을 살해하고, .皇國協會(황국협회)를 이끌면서 獨立協會(독립협회)를 견제하고, 마지막으로 제주목사를 지낸 후 행적이 묘연해졌는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이 합병되면서 일제가 김옥균을 높이 기리자, 홍종우가 스스로 자취를 감췄을 공산이 크다.

 일본인 작가 아오야기 미도리는 홍종우의 일생을 다룬 역사소설「季王의 刺客(이왕의 자객)」에서 홍종우가 한일합방 이후 제주목사 시절에 사귄 애첩과 함께 프랑스로 도주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홍종우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사료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일제 때 만들어진 「고종실록」과 국사편찬위원회가 2001년에 펴낸 「한불관계자료」, 아오야기 미도리의 역사소설「이왕의 자객」이다.
 
「고종실록」에 실려 있는 홍종우에 관한 기록은 모두 김옥균 저격 이후 과거에 급제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다가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될 때까지의 관력에 관한 것 뿐이다. 홍종우에 관한 기록은 모두 25건이다,  

아오야기의 ‘이왕의 자객’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해서 복원해 놓은 것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가 일본 유수 일간지 ‘마이니찌 신문’의 오사카 본사에 입사한 후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한 경력에 비춰 나름대로 열심히 취재한 자료를 토대로 복원해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종우의 일본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일독할 필요가 있다.



홍종우의 파리 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한불관계자료’에 실려 있는 사료를 참조해야만 한다. 특히 레가메가 동양학 학술지 ‘통파오’에 게재한 ‘어떤 정치적 자객’ 모음집은 홍종우의 사상과 행보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홍종우가 어떤 가문 출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왕의 자객’에서는 홍종우의 부친을 효창원 능묘지기로 기술해 놓았으나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료는 레가메의 ‘어느 정치적 자객’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이다.



<홍종우, 철종5년(1854) 서울에서 태어남. 기혼. 1녀를 둠. 문관의 독자로 2년동안 일본에 있었음>
레가메의 기록에 비춰 그의 부친은 하급문관 출신의 잔반이었을 공산이 크다. 아오야기는 홍종우가 관례를 행하고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고종8년(1871)에 부친상을 당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당시 홍종우는 17세였다.

△생애 초반- 불우한 인생

홍종우는 홍재원(洪在源)[2] 의 외아들로 경기도 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홍종우는 어린시절에 고금도에서 불우하게 지내왔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때 그는 '고금도에서 쑥물을 버리는 것도 아까워했을 만큼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왔다.'라고 대한제국 비서원일기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또, 제주도에서 화전민과 함께 살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기 - 프랑스 유학

그는 언제 무슨 연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인해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오야기는 홍종우가 이런 사건을 지켜 보면서 입신출세를 위해 34세 때인 고종25년(1888) 5월에 일본 화물선을 타고 도일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1886년 모친상을 당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거기서 프랑스어와 일본어 등을 익히면서 국제신문 등을 접하게 되고 해외에 대한 식견을 넓혀가게 된다. 그의 도일은 입신양명 보다는 개화를 통한 구국의 일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레가메의 기록 등에 비춰 볼 때 당시 홍종우는 부인과 10여 세의 딸을 조선에 두고 도일했다. 홍종우는 2년여 간 일본에서 배 삯을 모으게 된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최초로 유학한 조선인이다.

일본에서 자금을 모은 그는 자기 스스로 비용 부담하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1890년). 1890년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당시 40세의 중년 유학생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기간동안 열강 제국주의 세력들의 본질에 대해 알기 시작하였고, 기메박물관(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에서 일하면서 《춘향전》 《심청전》 《직성행년편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
또한 그 박물관에서 처음 설립된 한국 문화 전시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4](→한불 관계)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

△아시아의 프랑스 꿈 꿔
레가메의 기록에 따르면, 홍종우가 유럽으로 간 것은 고종27년(1890) 12월이었다. 그렇다면 홍종우는 왜 프랑스행을 선택한 것일까?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홍종우는 일본의 개화된 모습을 볼 때마다 이 나라에 이토록 혜택을 입힌 유럽 본고장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별입시가 되어도 일본에 관한 화제만으로는 이미 국왕이 진기하게 여기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레가메의 기록과 배치된다. 레가메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홍종우는 배움에 목말라했다. 매우 야심적인 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유럽문명을 이해하기를 갈망했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현 일본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움직임을 이끌기 위해 몇 년 내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원했다.”

홍종우의 삶의 궤적에 비춰볼 때 레가메의 기록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 설령 홍종우가 별입시 등의 벼슬을 얻기 위해 도일했다고 해도 최소한 그는 이타가키와 같은 인물 등과 교유하며 이내 조선의 개화에 대해 깊이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레가메의 다음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홍종우는 교양 있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이다. 공정한 목적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프랑스에 온 최초의 한국인의 생활비를 대주었다.”
그렇다면 홍종우는 홰 프랑스를 택한 것일까? 대략 일본 내의 대표적인 친불파이자 민권운동가인 이타가키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레가메의 다음 기록을 보면 홍종우가 왜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고자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홍종우는 영국을 몹시 싫어한다. 이는 단지 영국이 2년 전부터 홍콩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평소 러시아와 미국에 흩어져 있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다음 두 가지 계획을 실천코자 했다.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세계로부터 한국을 격리하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다.“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과 공포를 그로부터 발견했다



이는 김옥균과 유사한 생각이었다. 홍종우는 파리에 머물 당시 프랑스 언론들로부터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인 [르 피가로]지는 홍종우를 ‘모든 애국주의자들을 감동시키는 헌신적이고 숭고한 영웅’으로 칭하면서 ‘그날그날’이라는 코너에 그에 관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홍종우의 애국심은 대단했다. 그는 파리 시내를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채 활보했다. 레가메의 기록이다.
“홍종우가 내 사무실로 처음 왔을 때, 그는 파리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었고 불어는 한 마디도 몰랐다. 한 일본인 통역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내가 그 한국인을 보자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는 최대한 몸을 쫙 펴고서는 긴장된 얼굴에 번쩍이는 눈으로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옛날 싱가포르에서 보았던 커다란 호랑이가 나에게 주었던 감탄과 공포를 그로부터 발견했다.”
유럽문명 수용만이 우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길

아오야기는 홍종우가 프랑스 외무성을 찾아가 통사정을 한 끝에 루브르 박물관의 잡역부로 일하다가 1년 뒤 루브르 박물관에 동양 미술부가 신설되면서 사무촉탁으로 일한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레가메의 기록에는 루브르가 아닌 기메 박물관으로 나온다. 레가메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홍종우의 파리 생활은 기메 박물관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 체류하던 동양인 중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것은 한문서적을 자유자재로 접할 수 있는 그의 뛰어난 어문 실력 덕이었다. 

파리에서의 그의 행보는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에 가까웠다. 그가 <춘향전> 등을 번역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동호회인 ‘여행자들의 모임’ 등에 참석해 한국의 위기상황을 소개하며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레가메는 ‘어떤 정치적 자객’에 당시 홍종우가 행한 연설 전문을 기록해 놓았다. 

“현재 저의 동포들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일부 사람만이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유럽문명의 수용만이 우리가 구제될 수 있는 길입니다. 일본에서 체류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정치를 깊이 연구하는 와중에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홍종우는 2년 반 동안  프랑스에 머문 뒤,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귀국을 서둘렀다. 아오야기는 홍종우가 보일러 화부를 지원해 영국 배와 일본 배를 바꿔 타고 고베까지 가서 부두 노동으로 여비를 번 뒤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고종30년(1893) 8월로 기술된 귀국시점은 7월 22일에 홍종우와 헤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 레가메의 기록과 적잖은 차이가 있다. 

만일 홍종우가 고베를 거쳐 조선으로 귀국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할 때 홍종우의 귀국시점은 이 해 가을께로 보는 게 타당하다. 홍종우가 고종을 배알했다는 ‘이왕의 자객’의 다음 대목은 허구일 공산이 크다. <홍종우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와 국가의 장래를 우려하고 있음을 가상히 여긴 고종은 그에게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다. 홍종우는 당장 벼슬 이야기를 하는 것도 속이 보이는 것 같아 “나라와 군왕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것만이 소원”이라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귀국 도중 이일직의 사주받아 자객으로 변신

당시 조선 조정은 자객을 밀파해 일본에 망명 중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제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이 지리와 풍습에 어두운 자객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아오야기는 홍종우가 김옥균을 저격한 사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고종의 밀명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아오야기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당시의 상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고종이 홍종우와 독대하는 자리에서 문득 묻기를, “전에 그대는 짐을 위해서라면 분골쇄신할 각오가 있다고 했는데”라고 하자, 홍종우가 “거짓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이 그렇다면 “형가의 고사를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홍종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으나 형용하기 어려운 예감으로 가슴이 고동쳤다>

형가는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유명한 자객이다. 홍종우가 고종을 알현했다면 일본사정에 밝은 홍종우에게 번번이 실패로 끝난 김옥균 제거의 밀명을 내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위의 대화는 어디까지나 아오야기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홍종우가 귀국 도중 일본에 들렀을 때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러 온 이일직 등을 만났고, 그의 사주를 받고 개화파의 일원으로 가장해 김옥균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정황에 비춰 홍종우는 귀국하기 위해 일본에 머물던 중 자객으로 변신했을 공산이 크다.

홍종우가 고종31년(1894) 1월에 새해를 기념해 고베의 한 호텔에서 레가메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들어오랫동안 누워 지냈습니다. 저는 아직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불쌍한 제 아내가 지난해 5월에 세상을 떠나 매우 안타깝습니다’
홍종우가 귀국하기 위해 고베에 머물던 중 문득 병이 들어 적잖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음을 뜻한다. 
△도일과 김옥균 암살


이러했던 홍종우의 성향은 갑신정변으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김옥균에 대한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명성황후의 눈에 띈다. 그는 명성황후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사주와 조종으로 귀국길에 일본으로 갔으며, 이곳에서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오가사오라 제도의 외딴 섬에 은신하고 있던 김옥균을 암살할 계획을 실천한다. 그는 일본제국을 싫어 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 의존적인 성향을 보이는 김옥균과 박영효를 저격한다는 명분도 세워두고 있었다. 일본에 파견된 이일직을 만나 급진 개화파의 일원으로 가장, 김옥균에게 접근했다.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청의 외교부 협조를 받아, 당시 청의 실권자 원세개(위안 스카이)가 ‘동양 평화를 함께 논의하고 싶다’며 김옥균을 청으로 초청한다는 서한을 김옥균에게 띄우게 한다. 그러면서 홍종우를 동반자로 추천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의 호감을 미리 사두고 있었다. 그의 프랑스 요리 솜씨는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김옥균 본인은 물론 그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왔을 만큼 그의 이력은 김옥균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는 김옥균의 중국여행에 동행,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에서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했다


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김옥균을 상하이로 꼬여 냈고 거사를 깨끗이 처리했던 것이다. 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 청국 측 경찰서에 변론하기를, 첫 번째 이유로 공무라고 밝혔다. 김옥균 암살은 첫째로, 공무다. 어명을 받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그는 항변했다. 


<이왕의 자객>은 홍종우가 유락쿠초에서 가까운 간다의 고급하숙에 머물며 기회를 노리던 중 자신을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동포로 소개하면서 김옥균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소개해 놓았다. 이 소설에서는 김옥균이 홍종우에 관한 소식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반가이 맞이한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1984년에 나온 ‘일본 외교문서’에는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자신을 개화당 홍영식의 지친으로 소개하면서 모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 망명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접근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일본 군함을 이끌고 가 권기를 진멸하고 국기를 바로 세워 갑신정변 실패의 한을 푸는 8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홍종우는 김옥균 앞에서 자신의 굳은 결의를 이같이 밝혔다. “이 8조는 대장부 필세의 쾌사로 바다를 건널 때 이미 명심한 바가 있소.” 대략 이 기록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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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된 후 효수된 김옥균의 사체


△홍종우의 정치활동

홍문관 부수찬으로 발탁

홍종우가 고종31년(1894) 3월에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저격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곧 청나라 관원 경찰에 체포, 구금되는 형식적인 모양새를 취한 후, 미리 홍종우의 신상 처리를 청과 조율하고 있던 조선의 석방교섭으로 풀려 나, 조선으로 귀국했다. 레가메의 기록에 나오는 ‘중국전신’ 5월 21일자 기사는 이 사건에 대한 청나라의 기본입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텐진의 한국영사가 상해에 4월 16일에 도착해 중국인 판사에게 갔다. 그의 방문 목적은 김옥균의 사체와 암살범 홍종우를 동시에 서울로 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긴 협상 후에 그의 요구가 수락되었고, 중국 선박을 이튿날 제물포를 향해 출발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내 김옥균의 사체가 가마를 탄 채 배로 옮겨졌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에 크게 환영하며 기뻐했다. ‘고종실록’ 31년 3월 9일자의 다음 기록은 당시 조선 조정이 홍종우의 거사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뒷받침하고 있다. 


<홍종우가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하고 청나라에서 그 시체를 경강(서울의 서강)으로 보내오자 의정부에서 보고하기를, ”중국 병선이 월미도 앞바다에 와 정박하였는데 역적 김옥균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으로 오는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경강으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검시는 한성부와 형조에서 법에 따라 당일로 거행하게 하고, 검험한 사정을 즉시 보고토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윤허하였다>


홍종우는 삼일제에 합격해 이 해 5월 28일에 홍문관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부수찬이 된 지 10일 만에 사헌부 
헌납으로 승진했다.


당시 영의정 심순택과 판중추부사 김홍집, 좌의정 조병세 등 시임 및 원임 대신들은 연명으로 올린 차자에서 김옥균의 시체를 즉시 능지처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고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같이 비답했다. “지금 경들이 피를 뿌리고 눈물을 머금은 의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귀신과 사람이 공분하고 여론이 더욱 격화해 있어 그만둘 수 없다. 아뢴대로 윤허한다.”

홍종우의 출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고종은 이 해 4월 20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특별과거시험인 삼일제의 시 부문에서 유학(벼슬하지 않은 선비) 홍종우를 직부전시(곧바로 최종시험에 응시함)토록 조치했다. 

홍종우는 여기에 합격해 이 해 5월 28일에 홍문관 부수찬(조선시대 홍문관의 종6품 관직:왕의 문서를 관리하고 역사기술에 관여하며 왕의 측근에서 왕과 함께 학문을 의논했다.)에 제수되었다. 과거급제자의 첫 관직으로는 파격적인 처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고종이 직접 시험지를 채점하여 낙점한 데 따른 것이었다. 홍종우는 부수찬이 된 지 10일 만에 사헌부 헌납으로 승진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 승지 역임

‘고종실록’은 이후 홍종우가 어떤 관직을 거쳤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에 관한 기록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2년째가 되는 고종35년(1898) 1월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홍종우는 고종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승지를 역임한 것이 확실하다. 

당시 법무대신 서리 조병식은 홍종우에게 경무사의 책임을 맡길 것을 적극 건의해 윤허를 받았다. 경무사는 지금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조정의 신료들 사이에서 홍종우에 대한 신망이 매우 높았음을 뒷받침한다.



홍종우는 고종35년(1898) 3월에 서정쇄신을 요구하는 관료 및 유생들의 연합 상소를 주도하는 소두(연명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올리는 사람-편집자 주)가 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이 해 4월16일자에 나오는 ‘전 비서 승 홍종우’라는 기록에 비춰 그는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을 공산이 크다. 당시 그가 올린 상소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세계 판도를 놓고 볼 때 러시아가 제일 강대하여 각국이 의심하고 꺼리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위치하여 천하의 요충지가 되고 있습니다. 외국의 상인들이 수도 안에 영업소를 벌여 놓거나 국내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일이 천하만국 어디에도 없는데 어째서 우리만 특별히 승인합니까?


속히 의정부에 명하여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의 공동 회의를 열어서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수도 안에 영업소를 벌여 놓은 국내의 행상을 항구로 내보낸 다음 다시 규정들을 약정하소서. 하나같이 공법을 따르도록 한다면 우리의 자주권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정세와 조선의 현실을 통찰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종은 “말은 비록 쉽게 하지만 일의 핵심은 깊이 헤아려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종우는 이 해 8월10일에 다시 상소를 올려 이같이 간했다. 


“현재 흉서가 마구 나돌고 있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헤아릴 수 없는 화가 조석에 문득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를 막아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속히 법부로 하여금 잡아 내서 끝까지 치죄하여 난적의 소굴을 제가해서 세상의 의혹을 제거토록 하소서”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수도 안에 영업소를 벌여 놓은 국내의 
행상을 항구로 내보낸 다음 다시 규정들을 약정하소서. 하나같이 공법을 따르도록 한다면 우리의
자주권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홍종우)

△독립협회를 간사한 무리로 간주

여기의 ‘간사한 무리’는 바로 독립협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1898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중추원 관제 개편과 입헌군주제 개혁을 주장하자, 그는 이기동 길영수 등과 함께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했다. 또한 역모죄로 체포한 개화파 인사들을 재판했는데 그 중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홍종우는 감리사로 이승만 사건의 재판을 맡는다. 처음에 그는 이승만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나 형을 감하여 태형100대를 선고했다. 


유럽의 중심에서 유학한 홍종우는 군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홍종우는 근왕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며 황제권을 절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계획을 사전에 차단했으며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활동을 감시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주요 법규들을 모아 ‘법규류편 속일’을 편찬, 발간했다. 이는 주요 법규에 대한 안내와 법규 해설집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황국협회의 주요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에 수구파인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외세 의존적인 개화파와는 달리 근황주의를 강조하는 자주적 개화파 인사였다. 그는 수차례 ‘외국군대 철수’와 ‘방곡령 실시’, ‘상공업 육성책’, ‘외국공사의 내정간섭 반대’ 등을 주장했고, 대한제국 황제 고종한테 이런 주장의 내용인 상소를 열 한 차례 올리곤 했다.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그 배경을 이같이 기술해 놓았다. 


<근래 독립협회는 연설이나 상소를 통해 조병식 이하 네 명의 대신을 5흉으로 지목해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정치에 각성한 것은 좋으나 그것이 친일단체임을 알고 있는 홍종우는 증오를 느꼈다>

김옥균은 19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10년 동안의 일본 망명 생활 끝에 1894년 3월 중국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고종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이는 사실에 가깝다. 최근의 연구결과 독립협회의 ‘의회개설 운동’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독립협회와 고종은 의회 개설 문제로 팽팽히 맞서 있었다.


이때 공교롭게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온갖 전횡을 자행하다가 해임된 뒤 흑산도로 유배 간 통역관 김홍륙이 궁중요리사를 사주해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넣어 궁중이 발칵 뒤집히 는 소위 ‘毒茶事件(독다사건)’이 일어났다. 독립협회는 이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와중에 경무사 민영기가 죄인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중추원이 갑오경장 때 폐지된 연좌법의 부활을 정부에 요청했다. 독립협회는 죄형법정주의 등을 내걸고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중추원 의장 겸 법부대신으로 있는 신기선이 이를 묵살하자 독립협회는 곧바로 의회 설립과 민권 신장 등을 내세우며 개혁 성향의 새 내각 구성을 촉구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이해 10월1일부터 12일간 궁궐을 에워싸고 연일 수구파 일곱 대신의 파면을 요구하는 철야시위를 벌여 마침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에 박정양을 정부 수반으로 하여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민영환은 군부대신에 임명되는 등 새 내각이 들어섰다.


독립협회는 곧 새로 들어선 정부에 공문을 보내 의회설립을 위한 협의를 제청하고 나섰다. 황권의 약화를 두려워한 고종이 이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협회가 이에 반발해 철야시위를 계속하던 중 마침내 양측의 합의로 종로에서 시민과 정부 관원을 합석시킨 가운데 국정의 전반적 개혁과 의회 설립을 다짐하는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이 해 10월30일에 6개조의 獻議(헌의)가 결의되자 고종이 다음날 조칙을 내려 이를 승인하였다. 상원으로 개편된 중추원 의관을 선출하기 하루 전날인 이 해 11월4일 밤에 이를 반대하는 벽보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조선 왕조가 이미 쇠퇴했으므로 온 백성이 공동으로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정부와 서민이 모두 승복하고 국민이 각성하여 개명진보를 이룰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흑색선전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이날 밤에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빚어졌다. 이상재와 정교, 남궁억, 이건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전격 체포됐고,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는 체포되기 직전에 도주했다.

독립협회는 곧 새로 들어선 정부에 공문을 보내 의회설립을 위한 협의를 제청하고 나섰다. 황권의 
약화를 두려워한 고종이 이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금지하는 조칙을 내렸다.
독립협회가 이에 반발해 철야시위를 계속하던 중 마침내 양측의 합의로 종로에서 시민과 정부 
관원을 합석시킨 가운데 국정의 전반적 개혁과 의회 설립을 다짐하는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보부상 동원해 독립협회 탄압


이 일로 인해 이날 오후에 수천의 군중이 모여 석방을 요구하는 소위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이에 놀란 고종이 닷새 뒤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벌금형으로 감형해 석방했다. 

그러나 독 립협회는 종로로 장소를 옮겨 군중집회를 계속했다. 크게 진노한 고종이 마침내 황국협회를 동원했다. 아오야기는 이때 고종이 홍종우에게 밀명을 내린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전국에서 몰려온 2000여 보부상들의 무차별 공격으로 시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에 격분한 서울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 보부상들을 공격해 돈화문 밖으로 쫓아냈다. 

이때 조병식과 함께 민원의 대상이 된 홍종우와 길영수, 박유진 등의 집이 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었다. 당황한 고종이 이 해 11월22일에 조병식 등을 재판에 회부하고 두 개의 독립협회를 승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령을 내렸다.


 
고종36년(1899) 2월7일에 고종은 중추원 의관으로 있던 홍종우를 의정부 총무국장에 임용 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했다. 이 해 5월에 보부상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는 ‘상무사규칙’이 반포된 
것은 흥리를 통한 재정 자립을 주장한 홍종우의 건의를 수용한 데 따른 것이 었다.

「홍종우와 길영수, 박유진 등은 제 마음대로 소동을 피운 만큼 그대로 놓아 둘 수 없다. 모두 법부로 하여금 법조문을 적용하여 유배하도록 하라」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조치에 불과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홍종우 등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4일 뒤에 내려진 다음과 같은 조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의 刺論(칙유)로 이미 상하가 서로 믿게 되었고 나라의 형편이 안정되었으니 죄질이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고 중범은 각각 1등을 감하도록 하라. 홍종우와 길영수, 박유진 3인은 유배령을 특별히 환수토록 하라」

만민공동회가 이같은 조치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조병식을 비롯해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을 포함해 홍종우와 길영수, 박유진 등을 소위 ‘8역도‘로 규정하고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이 경무사 등을 보내 해산을 촉구했다.


만민공동회는 조병식과 홍종우 등 ‘8역도‘를 즉시 체포하여 의법 조치하는 등의 3개 조건을 내걸었다. 국정 개혁을 요 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고종은 마침내 12월22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킨 후 새 내각을 발족시켰다. 홍종우에 대한 고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 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홍종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의회개설 등을 둘러싸고 고종과 대립할 때 시종 고종의 편에 서 있었다.

△평리원재판장

이듬해인 고종36년(1899) 2월7일에 고종은 중추원 의관으로 있던 홍종우를 의정부 총무국장에 임용 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했다. 이 해 5월에 보부상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주는 ‘상무사규칙’이 반포된 것은 흥리를 통한 재정 자립을 주장한 홍종우의 건의를 수용한 데 따른 것이 었다.


고종은 이 해 6월17일에 홍종우를 지금의 고등법원 판사에 해당하는 평리원 판사에 임명했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법관으로서 새 출발을 한 셈이다. 그는 고종37년(1900) 3월에는 법부 사리국장, 두 달 후에는 다시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홍종우는 사실상 법조의 총책이 되었다.


그러나 홍종우는 두 달 뒤 죄수들이 많아지게 했다는 이유로 고종의 질책을 받게 되었다.「고종실록」37년 7월28일 조에 실려 있는 고종의 조령은 그 이유를 이같이 설명해 놓고 있다.


〈형법은 성왕들이 부득이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므로 내버려 두고 쓰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주나라에서 감옥이 텅 비었다든지 , 당나라에서 사형 죄수를 놓아 보낸 것은 모두 이런 의리를 취한 것이었다.
근래 감옥 안에 죄수가 차고 넘쳐 울부짖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재판장 홍종우는 왕명을 펴나가야 할 처지에 있는데도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지 않아 죄수들이 많아지게 하였으니 경계시키지 않을 수 없다. 중하게 견책토록 하라〉


당시 홍종우는 법부대신 대리로 있던 민씨 척족 민종묵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고종은 엉뚱한 이유를 들어 이를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견책을 받은 홍종우가 곧바로 올린 상소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의정부에서 민종묵에 대한 규탄이 있어야 하는데도 마치 입을 봉한 듯이 잠잠하니 이것이 어찌 폐하의 뜻에 대답하고 조칙을 받드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신들로 하여금 민종묵의 소행을 경계하게 하지 않아 민종묵이 하는 대로 하게 한다면 재능과 덕행을 보고 인재를 등용하는 날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야흐로 허물을 반성하고 있으니 속히 유사로 하여금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신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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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토지측량 모습. 홍종우는 제주목사로 제주지역의 토지측량 책임을 맡았다.

얼마 후 법부대신이 권재형으로 교체되었다. 홍종우와 함께 책임을 물어 교체한 것이다. 홍종우에 대한 기록은 이듬해인 고종38년(1901) 12월에 다시 나온다. 이때 홍종우는 평리원 재판장에서 면직된 뒤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고종39년(1902) 4월12일에 홍종우가 의관 겸 칙임관2등에 다시 서임된 기록이 나온다.

△일제 침략 본격화하자 제주목사로 부임

「고종실록」은 고종40년(1903) 2월9일에 나오는 다음 기록을 끝으로 홍종우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 짓고 있다.

〈地契衝門(지계아문•토지정리국) 총재서리 민영선이 아뢰기를, “지계아문에서 토지를 측량하는 일을 현재 제주목에서 시행하려고 합니다. 제주는 전라남도의 관할 하에 있기는 하나 바다 가운데 섬에 위치해 있어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일체 감독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주목사 홍종우를 제주지역의 지계감독으로 특별히 임명해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이 일을 맡도록 해 속히 일을 끝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는 홍종우가 고종39년 말에 지방관인 제주목사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 사건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조병식의 권유를 받아 제주목사가 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고종실록’의 기록과 배치된다.

홍종우는 왜 이때 한직인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된 것일까? 관련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신변의 위협 등을 느껴 자진해 제주 목사로 내려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홍종우가 제주목사로 내려간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언제 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다. 아오야기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왕의 자객’의 맨 마지막 구절을 이같이 끝맺고 있다.
“홍종우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발효를 기다리지 않고 관기 출신 애첩과 함께 시베리아를 경유해 파리로 떠났다.”

아오야기는 ‘이왕의 자객’에서 보부상들의 만민공동회 습격 사건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조병식의 권유를 받아 제주목사가 된 것으로 묘사해 놓았으나 이는‘고종실록’의 기록과 배치된다.

그러나 무명 시절에도 파리에서 크게 활약한 홍종우와 같은 인물이 한일합방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면 그의 이름이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되지 않을 리 없다. 일각에서는 홍종우의 사 망 시점을 한일합방 3년 뒤인 1913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 또한 무슨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홍종우가 과연 한일합방 때까지 제주목사로 재직해 있었던 것인지, 사직은 자발적으로 이뤄진 것인지 여부 등에 관해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홍종우가 을사조약이 이뤄지는 고종42년(1905) 전후로 사직서를 내고 은신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김옥균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일제가 김옥균 저격범인 홍종우를 그냥 놓아 둘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홍종우의 제주목사 이후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아오야기는 나름대로 사실에 토대해 홍종우의 삶을 복원코자 노력했으나 상당부분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한일합방 직후 제주목사를 그만둔 홍종우가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을 만나 고종의 칙서를 홈쳐 달아난 대목 등이 그 실례다.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그렇듯이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은 부분에 상상력을 동원해 가장 그럴듯한 내용으로 채워 넣는 것은 전적으로 문학가의 특권이다.

△홍종우와 김옥균의 공통점

홍종우는 여러 면에서 김옥균과 대비 된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반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김옥균과 관련해 그의 외세동원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자주적인 근대화 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통설로 굳어져 가고 있다.

반면 홍종우의 경우는 개화당의 당수인 김옥균을 살해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하던 황국협회를 이끈 까닭에 부정적인 견해가 압도적이다. 최근에 발표된 일부 논문조차 그를 ‘정치적 암살자’ 내지 ‘난동자’ 등으로 규정하면서 보수반동 성향이 강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과연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일까?

당대 최고의 벌문 출신인 김옥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외세를 끌어들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하급관원을 지낸 가난한 집안 출신인 홍종우는 30대의 나이에 처자식을 조선에 남겨 둔 채 조국의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도일했다. 김옥균이 젊은 나이에 비 ‘3일천하’에 그치기는 했으나 일시 천하를 호령할 당시 홍종우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적잖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두 사람의 나이가 거의 같다. 김옥균은 철종2년(1851)에 태어났다. 홍종우는 그보다 세 살 아래이다. 두 사람 공히 ‘서양문명을 조속히 받아들여 조국을 근대화하는 길만이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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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벌문 출신인 김옥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외세를 끌어들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이에 반해 하급관원을 지낸 가난한 집안 출신인 홍종우는 30대의 
나이에 처자식을 조선에 남겨 둔 채 조국의 근대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도일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자주적인 개화론자였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아시아의 영국’으로 불린 일본과 달리 프랑스를 모델로 하여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고자 했다.

많은 연구자들은 홍종우의 도일 및 도불의 배경을 프랑스의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을 보고 흥미를 느낀 데서 찾고 있다. 10년간에 걸쳐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자신의 주변에 매우 민감했던 김옥균이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종우를 만나 별다른 의심없이 곧바로 막우처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군권강화를 바탕으로 자주적 근대화 꿈꿔

두 사람의 근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전혀 달랐다. 김옥균은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급속히 조선을 개화하고자 한 데 반해, 홍종우는 왕권을 강화한 가운데 열강의 세력균형 정책 을 이용한 등거리 자주외교를 통해 독립하고자 했다.

당초 개화당은 전래의 성리학 전통에 입각해 신권우위의 통치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옥균 등이 시종 서구의 통치제도를 조속히 도입할 것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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