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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3 07:35
[한국사] 신라의 요동정벌(오골성) ......고구려 평양 요동설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461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670년 3월, 2만 병력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목표는 오골성(烏骨城). 옛 고구려의 군사 요충지로서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城) 봉성진(鳳城鎭)이다. 요동은 신라가 건국된 이래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이었다. 신라의 설오유(薛烏儒) 장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高延武) 장군이 각각 1만 명씩 거느리고 요동을 선제공격했다.  


슬라이드7-kwonsanha.jpg
요동의 고려문 


이 전격작전으로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시작되었다. 앞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상황에서 당은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믿고 있던 당에게는 충격이었다. 약소국 신라는 왜 최강대국 당에게 덤벼들었던 것일까?

신라가 나당전쟁의 포문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부터 669년까지 집중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다. 대사면(大赦免)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고, 전국 170여 곳의 목장을 재분배해 기병을 강화했다.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고,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을 모색했다. 요동 공격군의 장수는 비진골 출신의 설오유가 임명되었으며, 주력 병력은 고구려 멸망 당시 포로로 삼았던 고구려 군사들로 채워졌다. 요동 공격을 위해 이 지역의 지리와 정세를 잘 아는 특수부대가 편성되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해 나가면서 당의 지배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670년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현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에 말갈(靺鞨) 군사들과 싸워 크게 이겼으며 목벤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의 군사들이 계속 도착하자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했다. 2만 병력이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들이 건넌 강은 압록강이 아니라 대동강이라고 보았다. 

당시 설오유 장군과 고연무 장군이 건넌 강은 분명 '압록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2만 병력이 향한 '옥골(屋骨)'은 바로 오골성(烏骨城)이다. 일본학자들은 신라군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축소ㆍ왜곡하였고,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신라는 요동의 오골성(봉황성)을 선제공격하여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당의 이목은 모두 요동으로 쏠렸다. 이 때 남쪽에서는 진골 귀족이 이끄는 신라 주력군이 움직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옛 백제 지역이었다. 670년 7월, 신라는 일시에 웅진도독부의 82성을 함락시켜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듬해에는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영역화했다. 이제 옛 백제지역은 신라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신의 한수였다. 당은 북쪽 옛 고구려지역에 신경 쓰느라 남쪽 옛 백제지역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신라는 이 틈을 노려 전격적으로 웅진도독부를 차지했다. 

원래 신라가 당과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북쪽의 안동도호부, 서쪽의 웅진도독부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특수부대로 요동을 공격하여 당의 이목을 돌린 후, 주력부대로 웅진도독부를 전격적으로 장악했다. 이제 신라 서쪽의 방어전면이 사라져 버렸다. 신라는 서쪽 방어전면을 지키던 병력까지 북쪽으로 전환시켜, 당군의 남하에 대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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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신라는 오골성까지 군대를 움직였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차피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국경선의 한게는 대동강~원산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고, 또한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안동도호부를 넘어서 고구려 부흥세력과 함께 요동의 오골성으로 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안동도호부가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라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웅진도독부도 당시 완전히 병합하지 못했던 신라가 안동도호부를 지나가기엔 무리가 아니지 않았을까? 보급이나 후면의 반격을 생각을 해도 말이다. 
즉, 안동도호부는 현 평양이 아닌, 다른 곳 즉 요동(구체적으론 요양시)에 위치했다는 강한 생각이 든다. 
그랬기에 고구려 부흥세력도 목숨을 다하여 강하게, 신라와 동맹을 맺고 요동을 공략하려 했을 것이다.
만약,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재했다면 신라와 고구려 부흥세력은 일단 대동강 지역 공략에 더욱 신경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재했다면, 보급이나 후방의 공격을 생각한다면, 도무지 신라의 요동공격은 말이 안되는 작전이다(신라가 갑자기 징기스칸 군대가 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고구려 유민이 신라의 봉황성 공격에 협조를 한 까닭은, 요동에 고구려의 평양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고 개인적으론 생각을 한다.     


  
동국지도 요동부분.png
건안성 (1)낙랑동주. (2)안시성. (3)고 요동.(4)압록강.(5) 윤몰된 고 요동(古遼東)평원(지도 구산님 블로그 인용... 압록강의 위치 참고) 



한글지도.jpg
이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보이지 않는 동국지도에서만 보이는 요동지역을 그리고 있다.
(지도 구산님 블로그 인용)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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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5-23 07:47
   
현대의 혼하~요양 35km, 요하~요양 50km  대릉하~요양 150km
사서기록 압록수~평양 450리, 살수~평양 30리... 압록수-살수-평양

40km = 100리

그런데 사서기록에서 하천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비중 60~70% ?
강수량 변화, 지면 융기나 해안선의 변화로 물길이 다르게 표현될수도 있습니다.

추가로 하천은 길기 때문에 측정위치(상/중/하류)에 따라 거리가 심하게 변하죠
칼리S 18-05-23 12:15
   
일단 삼국사기의 압록강이 현 압록강인지 님이 주장하는 요하인지가 먼저 아닌가요?

만약 삼국사기의 압록강이 현 압록강이면, 평양은 현 평양이 맞죠.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간 부대는 신라군 1만과 고구려잔당군 1만으로 요동을 공략할만한 원정군의 숫자가 아니라, 현 평양의 배후를 끊는 기습군으로 봐야죠.

그리고 문무왕 11년(671년) 설인귀가 보낸 글에 대한 답서로 신라는 백제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정벌에 식량수송을 비롯한 지원에 대한 답으로 평양 이남의 백제고토에 대한 지배권을 약속받았으나 이게 이행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결국 이게 나당전쟁의 원인이죠)

그리고, 나당전쟁 이전에 평양에는 당군이 많이 주둔하지 않았습니다. 평양을 함락하고 당은 평양의 왕족이나 귀족들 그리고 많은 백성을 당으로 끌고 갔죠. 그래서 신라군이 먼저 공략하자 이후 요동에 있던 당군들이 평양으로 이동하고, 그 이후 주로 현 평양 이남의 지역에서 신라군과 당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결국 당이 패배하고 물러가죠.

신라와 당의 경계선이 대동강 원산만이라는 것도, 평양이남을 당이 신라에 약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신라의 9주를 고려해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촐라롱콘 18-05-23 13:28
   
고연무의 병력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설오유의 신라군도 주력은 고구려인들이었군요~~~
도배시러 18-05-23 16:15
   
현대의 압록강~평양 170km, 대령강~평양 60km 
사서기록 압록수~평양 450리, 살수~평양 30리... 압록수-살수-평양

40km = 100리
     
칼리S 18-05-23 17:11
   
삼국사기에 보면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를 도망갔다고 나옵니다(즉 압록강과 살수의 거리가 450리 정도라는 것이고, 이는 현재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거리가 얼추 맞습니다) 그리고 살수와 평양이 30리가 아니라 살수를 넘어서 평양인근 30리에 이르러 진을 친 겁니다.

가서 삼국사기 다시 꼼꼼이 읽어보세요.

그리고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생각하는 고구려의 평양은 현 평양(고려의 서경)이고, 압록강은 현 압록강입니다.
          
도배시러 18-05-23 19:02
   
>삼국사기/무경총요
隋煬帝征高麗,將軍宇文述與九軍過鴨綠水,又東濟薩水,去高麗平壤城三十裏,因山爲營。
살수-평양의 거리가 완벽한 평행선이라고 ?
살수의 상류나 하류에서 측정해도 평양까지의 거리가 같을까 ?

마찬가지로 압록강 상/중/하류 에서 평양 까지의 거리는 동일하게 450리일까 ?
히스토리2 18-05-23 17:59
   
현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일수 있습니다.. 특히 평원왕 이 후, 현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구절도 상당히 많더군요(삼국사기 또 읽었습니다. ㅠㅠ 다들 너무 삼국사기만 많이 읽으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장수왕 시기부터 가장 오랜기간 수도였던 평양 즉 양평은 요동이나 그 인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저도 결정적인 단서는 없습니다...다만 압록강이 두개 였음을 보여주는 지도와 나름의 추론 뿐 ...정확한 증거도 없는 주제에 글을 쓰게되어 솔직히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추론은 또 인문과학의 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적어보았습니다.
또한 신라가 만주까지 나가고자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도 의외로 많기에 적었습니다.

한국은 신라, 고려,조선 그리고 북한까지 모두 간도와 요동을 자국영토화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 점은 우리에게 간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게 하지요
만주가 아니라 간도입니다.....간도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칼리S 18-05-23 18:43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를 읽을때 그 지은이가 가진 기본 생각이 중요합니다.

일단 김부식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고려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이라고 생각하고 삼국사기를 썼습니다. 당연히 압록강은 현 압록강이고요. 단지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초기 수도를 알지 못한다고 했죠.

삼국사기만 읽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님이 언급한 기사의 내용이 삼국사기 아닙니까?
도배시러 18-05-23 19:06
   
삼국사기의 틀에서 고구려를 생각하면 김부식에게 말려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키포인트는 고구려 하천 요수 입니다.
중국사서가 수차례 고구려 중심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자신들의 하천인 요수를 어케 관리했는지... 이게 관건입니다.

그리고 주류사학이 요수를 고구려 하천이 아닌것처럼 개무시하는 이유도 논의가 되어야 하지요.

玄菟郡, 武帝 元封四年開 BC 107. 縣三.
髙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
현도군 고구려현(髙句驪縣),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며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새(塞) 밖을 지난다.

유리왕 서기 14년이후부터 고구려현은 고구려 소유 였습니다.
요수가 고구려 하천이었던 기간은 아주아주 길어요. 650년이 넘어가네요 668 - 14 =
히스토리2 18-05-23 19:09
   
이 부분은 개인적인 신념만으로는 안되는 문제이니, 다시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각종 신문기사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받아드려 지지가 않는군요.
사실 전 평양의 위치가 요동에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요양을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했지만 미시적으로도 요양으로 한정하기엔 그 역시 문제가 있고,  거시적으로는 요동자체가 받아드려지지 않는 상황에 봉착하다 나름 지도까지 제시했는데 여전히 증거 불충분이라는 의견을 주시는 군요.... 그럼에도 이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많아 배우게 됩니다. 다양한 생각 그러나 다들 깊이있는 의견들...도전이 되네요 ^^
히스토리2 18-05-23 19:20
   
가서 삼국사기 다시 꼼꼼이 읽어보세요.  ---- 나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을때 마다, 평양이 한반도에 없었던것 같은데 (제 경우는요..) 님은 어느부분 , 구절 에서 현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제가 2018년 2월에 유입된 후 칼리님과 촐라롱콘님이 상당한 학식이 있으신 분이라 생각은 했습니다(진심) 그런데 어떤 구절이 딱 와 닿으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는 신념에 꼿혀서 진실을 못보는 건지, 고려를 봐도, 신라를 봐도, 조선을 봐도 통설을 받아드리는데 힘이 드네요( 그간의 상황에서 보셨듯이  제가 어느쪽에서도 환영받는 입장은 아니니) 제가 올리는 이 글이 님들의 뜻을 곡해(소위 깐다고 하나요) 하려는 의도로 받지는 부디 마시고요
     
남북통일 18-05-23 20:22
   
按漢書 樂浪郡屬縣 有不而 又總章二年 英國公李勣奉勅 以高句麗諸城 置都督府及州縣 目錄云 鴨淥以北已降城十一 其一國內城 從平壤至此十七驛 則此城亦在北朝境內 但不知其何所耳
都國內 歷四百二十五年 長壽王十五年 移都平壤 歷一百五十六年 平原王二十八年 移都長安城 歷八十三年 寶臧王二十七年而滅[古人記錄 自始祖朱蒙至寶臧王 歷年丁寧纖悉若此而或云 故國原王十三年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不可知其然否]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何以知之 唐書云 平壤城 漢樂浪郡也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 又志云 登州東北海行 南傍海壖過浿江口椒島 得新羅西北 又隋煬帝東征詔曰 滄海道軍 舟艫千里 高帆電逝 巨艦雲飛 橫絶浿江 遙造平壤 以此言之 今大同江爲浿水 明矣 則西京之爲平壤 亦可知矣 唐書云 平壤城亦謂長安 而古記云 自平壤移長安 則二城同異遠近 則不可知矣 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 昔高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則可謂地勝而兵强 至于季末 君臣昏虐失道 大唐再出師 新羅援助 討平之 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得其南境 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 以備九州焉-삼국사기
번역-『한서(漢書)』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속한 현으로 불이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총장(總章) 2년(서기 669)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 칙명에 의하여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목록에는 “압록(鴨淥)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 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平壤)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도읍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長壽王) 15년(서기 427)에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平原王) 28년(서기 586)에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寶臧王) 27년(서기 668)에 멸망하였다.[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시조 주몽으로부터 보장왕에 이르기까지의 연대가 이와 같이 분명하고 상세하다. 그러나 혹자는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서기 343)에 평양 동쪽 황성(黃城)으로 옮겼는데 그 성은 지금 서경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었다.”고 말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를 알 수 없다.] 평양성은 지금의 서경(西京)인 듯하고 패수(浿水)는 바로 대동강(大同江)이다. 어떻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한나라의 낙랑군으로서 산굽이를 따라 성을 둘러쌓았고 남으로 패수가 놓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한지』에는 “등주(登州)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수 양제(煬帝)의 동방정벌조서에는 “창해 방면 군사는 선박이 천 리에 뻗쳤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달리고 커다란 전함들은 구름같이 날아서 패강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에 다다랐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렇게 보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인 것이 명백하며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당서』에는 “평양성도 장안이라고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古記)에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으니 두 성이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점점 동방의 패수 옆으로 이동하였다. 발해(渤海) 사람 무예(武藝)는 “옛날 고구려의 전성시대에는 군사 30만으로 당과 대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고구려의 지세가 유리하고 군사가 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가 우매하고 포악하여 각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자, 당이 다시 군사를 출동시키고 신라가 이를 도와 그들을 쳐서 평정했던 것이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와 말갈로 편입되고 신라에서도 그 남쪽 지방을 차지하여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의 3주와 군현을 두어 아홉 주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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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이런 기록들이 있습니다.
按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古記云 朱蒙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本 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高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京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 高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自朱蒙立都紇升骨城 歷四十年 孺留王二十二年 移都國內城[或云尉那巖城 或云不而城]
번역-『통전(通典)』에는 “주몽(朱蒙)이 한(漢)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방으로 나와서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고(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과의 거리가 3천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써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孺留王) 22년(서기 3)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혹은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하고 혹은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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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서는 의무려산이 요동군에 속해 있으며, 졸본이 요나라 동경의 서쪽이라 서술하고
있는데, 우리 주류사학계는?
화난늑대 18-05-23 22:30
   
잘봤습니다
식민사학의 개소리들을 하루빨리 치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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