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의 2차 침입 - 처인성 전투
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몽전쟁. 몽골의 2차 침입(1232) 당시에 살리타이의 대대적인 남하를 막은 1등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처인 부곡은 단순한 토성으로 군량이 있다는 것 외에는 전술적 의미가 거의 없었지만, 그의 화살이 살리타이의 머리를 꿰뚫으며 결국 몽골군이 퇴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윤후가 아니라 이름 없는 병사나 부곡민이 사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사 김윤후 열전에 보면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라며 '활과 화살이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 그 근거인데, 이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지, 예의를 차리는 표현인지는 각자 판단하기 나름이다.
학계의 논문에는 대체로 말 그대로의 의미, 즉 궁수가 아닌 지휘관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래 열전의 기사와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보면 자진하여 병사로 지원하여 참전한 것이 아니라 난을 피하다 불가피하게 싸운 와중에 세운 공이었다는 의미일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선 그에게 포상과 함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지만
저는 전시를 당해서도 무기를 잡고 일어서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후한 상을 받겠습니까?
- 고려사 권103, 김윤후 열전 라고 거절을 했다. 결국 조정에선 섭랑장(攝郞將)에 임명하게 되었다.
2. 몽골의 5차 침입 - 충주성 전투
21년 뒤 1253년 충주성 방호별감으로 재직 중 몽골의 5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남진을 하던 몽골군이 충주성에 도달하였고 70일간의 혈투가 진행되었지만 몽골군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 라고 격려하며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이끌어 냈다.
결국 몽골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모두 벼슬을 제수받았다. 물론 김윤후의 공도 인정받아 감문위 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임명되었다.
이 처인성 전투와 충주 전투의 항쟁이 정말 대단한 이유는, 노비, 승려, 백성들의 항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32년 몽골군이 처음 충주에 쳐들어왔을 때 고을 수령과 군 지휘부들은 다 도망을 가고 성을 지킨 것은 노비와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물러가자 돌아온 충주군 지휘관들은 몽골군이 약탈해 간 고을의 기물과 물자를 노비들이 훔쳐갔다고 뒤집어 씌운다.[4] 분노한 노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진압되고 만다. 이러니 1258년 충주에 있던 노비와 백성들이 고려 조정과 최씨 정권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지,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었던 셈. 김윤후는 이런 사람들을 이끌고 끝내 성을 지켜낸 것이다. 몽골과의 항쟁 중에 양민은 물론이고 노비들이나 천민까지 몽고군에 맞서 싸웠던 건 처인성만이 아니다. 어느 부분에선 정규군보다 더 잘 싸웠다.(...)
다만 여기서 좀 씁쓸한 이야기를 하자면 승전 후 김윤후가 임명된 감문위는 2군 6위 중 전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부대였다. 개성의 성문을 지키는 부대로 부대 편제도 1령(약 1,000명)에 불과하고 전투에 나서기 힘든 늙은 병사들이 주로 배속받았다. 즉 실권과는 거리가 먼 한직. 전장에서는 가장 치열한 곳으로 보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내몰아버린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 내쫓겼거나 본인이 몸을 피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3. 이후
1259년에 동북면(함경도) 병마사가 되기도 했으나 이때 동북면은 몽골 땅(쌍성총관부)이라 의미가 없었다. 원종 때인 1262년엔 추밀원 부사를, 이듬해인 1263년엔 수사공우복야까지 올랐고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