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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9 22:25
[베트남] 성직자 같은 혁명가 '호치민'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779  

호치민은 '호아저씨'로 잘 알려진 베트남의 국부와 같은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일부 '우익' 언론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만 후치민과 '급수'가 전혀 다르다. 북한에서 '국부'로 자의반 타의반 '존엄'의 지위를 획득한 김일성 이 사람하고도 후치민의 '급수'는 한참 다르다. 아마도 미국에 질기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이 세 사람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다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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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은 기쁨조 같은 것 없이 평생을 대승의 승려처럼 독신으로 살다 갔다. 

특히 북베트남에 아주 조그만 지역 근거지를 마련했을 무렵의 그는 한국의 '이현상'을 연상시키는 빨치산 지도자와 유사했다. 나무 오두막을 지어 놓고서 그의 병사들과 함께 기거했다는 것이다. 기쁨조는 물론 훤칠하게 잘 생긴 김일성 이 사람과 관련된다. 이런 것에 대하여는 아마도, 유방의 아내 '여치'의 항우에 대한 항변조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여색을 탐하는 것은 영웅적 자질의 일부에 불과하오"  항우의 날카로운 질문. "그럼 내가 당신을 탐해도 괜잖겠소?"  여치의 창끝이 매서운 대답으로 이 선문답은 끝이 났다. "당신과 나는 궁합이 안맞습니다"  아무튼 빌 클린턴 사례도 있지만 이것은 '아무도' 못말리는 약점이기는 하다. 후치민은 이런 약점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이현상도 그의 부하중 어떤 여성과 사랑을 나눴다고 하는데 호치민의 부대에는 여자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승만처럼, '뛰어난 생존력'과 불사조 같은 생명력을 지녀서  그것이 '외교적 기량'으로 구현되어, 미국의 '골칫거리'가 되는 이런 경향도 없었다. 그만큼 후치민은 탈세속적 정치지도자로서, 북베트남의 항전을, 죽는 그날까지 '승려'의 모습 그대로 지휘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휴식'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그의 후계들이 승리를 했다. 허나 그는 승리를 확인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성직자 본능의 정치'와 '군인 본능의 정치'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무엇일까? 목적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단기적 승패에 숼씬 덜 좌우된다는 측면이 '성직자 본능의 정치'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이렇게 일반화 하기에 후치민의 평생은, 단순히 '성직자 본능의 정치'로 포섭되기 어렵다. 어떻게 그는 그런 정치를 할 수 있었을까? 중국에서는 이런 유형에 가까운 정치인이 '모택동'이라고 여겨지는데 이 사람도 '여치'가 평한바 그대로, '유방'과 유사하게 여자에 대한 탐심에서는 약점을 지녔다. 그런데 후치민은 이런 것조차 벗어난 상태로 평생을 '민족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과제를 걸머지고 살아냈던 것이다. 이는 가령 '삼총사'에 나오는 '악당' 주교와도 대비된다. 세속의 권력까지 노리는 '성직자 정치인' 주교는 이미 '주교'라는 신분적 역할을 완전히 넘어선 사람이었다. 

인간이기에 그럴 밖에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인간'이기에 주교라는 신분이 필수적이었다고 '정정'해서 말한다면, '주교'가 주교답지 않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는 뻔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치인 같았던 주교가 아니라, 주교 같았던 정치인 후치민은 정말 믿기 어려운 풍모를 지녔던 것이다.

호치민은 단기적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지극히 유연하게 베트남에 차례로 들락거리는 '외세'와 마주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미국과의 제네바 회담이었을 것이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전쟁을 마무리 짓는데 웬 시간이 그리 필요했을까? 베트남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프랑스가 영국과의 식민지 확보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인도에서 밀려났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내주고 물러났으며, 나폴레옹3세는 멕시코에서도 밀려났다. 프랑스는 사실 세계 곳곳에서 앵글로 색슨에게 밀려났던 것이다. 허나 영국은 프랑스를 옆에 붙여 놓고 여러 모로 '제국의 경영'에 동반자처럼 활용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런던에서 키워진 인물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1860년대의 나폴레옹3세 집권시기에, 영국은 프랑스를 동반하여 '제2차 아편전쟁'에서 보듯, 청나라를 공동으로 침략했고 승리를 거뒀다. 사실 영국은 새로운 강자 독일 때문에 프랑스와 '전면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꿩대신 닭이라고, 인도를 독점한 영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에 내준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베트남은 인도와 비슷하게 거의 200여년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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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왜 베트남 전쟁이 그토록 질질 끌며 오래 지속되었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은,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배경적 소비처였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정치 외교'의 연장으로서의 전쟁이 아니라, '경제'의 연장으로서 전쟁이면서 동시에 당대의 세계체제를 유지시키는 전쟁이었다는 해석이었다. 베트남 인민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울부짖게 할 이런 해석은 다행이도, 베트남만은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가령 이현상의 그런 노력이 한갖 '이슬'처럼 부질없어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글에서 이미 썼지만, 이현상에게 그토록 군복이나 총기류 등의 물자가 풍부했던 것을 잠시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한다. 

호치민은 이런 와중에서 정말, 여러 '제국주의'를 다 겪은 지도자였다.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더불어, 아니 그보다 약 20분 정도 앞선 시간에, 일본군의 말레이 반도에 대한 침공이 있었는데, 홍콩 폭격도 그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말레이 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승승 장구하며 영국군을 물리치고 싱가포르 를 함락시켰다. 이어 서쪽 버마와 동쪽 캄보디아,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이어진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의 '점령' 과정속에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일본'의 잠시간 점령지역으로 또 넘어갔다. 프랑스에서 일본 제국주의로 식민지 종주국이 바뀌었다. 

그래서 호치민의 인도차이나 노동당의 항전 대상은 약 4년간 일본제국주의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고 베트남 북부지역을 해방시키고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군이 물러간 빈 틈에 다시 '영국군'이 진주해 들어왔다. 남베트남 지역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물론 그 영국군은 싱가포르에서 항복했다가 임팔 코히마 전투에서 다시금 승리를 거두면서 인도에서 버마를 거쳐서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탈환하고 베트남까지 진출했던 셈이다. 그 영국군은 잠시 머물렀다 프랑스군에게 바톤을 넘겼다. 프랑스군이 다시, 베트남을 '영유'한다고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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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은 그의 휘하에 탁월한 참모를 여럿 두엇는데 아마도 팜반동이라는 '외교의 달인'과 더불어, 그의 '한신'에 해당하는, 역사학자 출신의 보응엔 지압 장군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보응엔 지압장군의 탁월한 지휘하에 글자 그대로 '결정적 전투'가 치뤄졌는데, 디엔 비엔푸에서의 일이었다.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는, 사실 그것으로 '베트남의 식민체제'가 완벽하게 종식되는 것이 옳았다. 프랑스의 공정대는 베트남의 전인민적 항전속에서 패배했고 항복했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전투의 '장면'은 정말 대단했는데, 프랑스 공정대 병사의 어깨 높이밖에 못미치는 베트남군이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는 이런 장면이었다. 이 전투로 베트남은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 맞았다. 허나, '브레튼-우즈'의 사상이념적 적대성에 근거한 체제는 여기서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도록 가로막았다.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이유로, '도미노 이론'에 근거한 새로운 군사적 개입이 결정되었는데 바로, '미국'이었다.

 

'위아 솔저'는 미군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향한 초기의 '얼리 어댑터'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 원형적 전투가 여기서 시현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다시금 보 응엔 지압 장군이 출전하는데, 그의 전술 계획은 대병력을 휘몰아 새벽의 기습으로 대대병력의 미군을 격멸한다는 것이었지만 미군 대대장 무어 중령이 오히려 기습하여 승리했다.  사실 이 승리에는 헬리콥터에서 속사하는 발칸 기관포라는 엄청난 화력지원이 바탕이 되었기에 테크놀로지의 승리였을 뿐이지만, 이후 확전된 베트남 전쟁은 '위아 솔저'에 나온 그 모든 전투를 원형으로 확장했던 것 뿐이라고 여겨진다. 요컨대 이 전쟁은 '승패'와 무관한 전쟁이었고 '소모'를 위해 기획된 전쟁이었다. 후치민은 이런 전쟁을 15년 이상 지휘했으니 정말 대단했단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의 왼팔 격인 팜반동은 제네바 회담을 거치면서 전쟁의 종식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부'했다. 호치민과 같은 지도자가 아니면 나오기 어려웠을 결정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 아무런 결과도 없이 결국, 북베트남에 의한 통일로 마무리되 버린 것은, 바로 '아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전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모든 추상적 언명들은 전부 이데올로기 효과만을 노린 담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늘날 명백해 지는 사실은, 당시까지만 해도 글로벌 자본의 중심이 유럽에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한국군만 '용병'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이런 것은 가히 500년된 외교적 책략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역사는 반드시 실질적 물리력을 가진 국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증된 사례이기도 했다.

 

호치민은 이런 베트남의 추악한 전쟁 한복판에 있었다. 그에 대한 전기적 자료가 더 나오면 평가가 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읽은 그의 전기에 바탕하여, 호치민이야 말로 '성직자 본능의 정치인' 표본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베트남이 '전쟁'상황을 정말 오랫동안 견뎌야 했기에 그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오랜 전쟁은, 그야말로 오랜 자연재난의 상황 만큼이나, '숙명론'적 체념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직자 본능'의 정치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일단 이념을 넘어서서 해석해 보면 그러하다. 오늘날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기는 하지만 북한과 달리 중국식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매우 활기찬 경제성장의 도상에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이 농성체제가 아닌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호치민과 같은 지도자와 김일성과 같은 지도자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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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1348년의 그 혹독한 페스트의 상황속에서 숙명론적 성직자 본능의 정치가 필요했던 것 처럼. 베트남 사람들의 '숙명'은, 지정학적 책략에 의해 글자 그대로, 한국의 38도선 만큼이나, '책상위의 지도'상에서 이루어진 결정으로 생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고통을 안겨줬다.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강점된 45년은 따라서 매우 '짧게' 여겨질 지경인 것이다. 물론 한반도인에게는 강조, 김윤후,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과 같은 '의거'의 전통이 있어서 그 '내발적 힘'의 강한 작용으로 짧게 된 것일 수 있다. 고려말에도 이런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모두 길게 가지는 않았다. 반면 베트남의 200여년 식민지 체제란 정말 가혹한 것이었고 독립을 향한 항전은 숙명론을 낳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숙명론적 상황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떠오르는 정치인이 후치민 유형일 것임을 짐작한다. 

오늘날 베트남은 이런 숙명론을 벗어나서 중국과 거의 혈맹 수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또한 미국과도 경제적으로 밀접히 엮였는데 바로 한국을 매개로 그렇게 되어 있다. '평화'가 베트남에 깃들고 있고 미래의 번영을 '예약'한 나라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허나, 오늘날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은 여전히 숙명론에 묶여있다. 아마도, 쿠르드족이 가장 '비극적 숙명론'에 얽혀서, 호치민 유형의 성직자 정치인이 탄생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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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면서 나를 나이먹게 하고 나를 저승으로 이끄네"

 

아마도 1960년대 중반에는 베트남의 '베트콩'들이 불렀음 직한 노래를 지금, 쿠르드족의 전사들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사'가 되는 것이 '전망'이 되는 지역이 지구상에 '아직' 존재한다.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이 삼촌이나 형제나 '아저씨'처럼 무슨 전사가 되어 뭔가 하고자 할때 그 전망에는 '죽음'이 내재된다. 쿠르드족의 사람들에게 이런 숙명적 인식은 더 심각하다. 이런 이유로 '쿠르드족' 전사들에게는 후치민과 같은 성직자 유형의 지도자가 필수적일 것이다. 정말 지구인은 평화속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후치민의 평생이 위의 싯구와 다른 점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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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홀로 18-05-2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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