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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9 22:05
[중국] 한나라의 '진평'에 대한 의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263  

진평은, 소하나 장량, 한신과 달라서, '초한전'의 영웅으로 잘 인정되지 않는다. 사기나 자치통감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량과 비교하여 별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허나 실제 초한전의 전개과정을 잘 살펴 보면, 진평은 여러차례에 걸쳐 유방을 '결정적 위기'에서 구출해 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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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 하면서 '후손'들이 잘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계책'을, 유방을 위해 여러차례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장량도 유방을 위해 글자 그대로, 원대한 전략적 계책을 발휘했는데, 그의 계책은 굉장히 선이 굵었다. 헌데, 진평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진평 스스로 그렇게 예측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한나라의 건국과 안정적 유지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실상, 장량보다 더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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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은 초한전 초반에 그 활약이 아주 두드러졌다. 조참, 소하와 같은 행정 참모와 역이기와 같은 전략 참모만으로 미흡하게 시작한 '초기'를 무사히 넘기고 패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장량이 가담한 것은 글자 그대로 결정적 순간이었던 것이다. 장량은 이후, 항우보다 뒤쳐진 유방의 군대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공을 헤웠다. 요컨대 유방이 '함양성'을 항우보다 먼저 '점령'하기까지는 전부 그의 공로였다. 가장 결정적인 공은, 함양성 입성 이후, 뒤따라온 항우가 유방을 죽이려고 했을 때였다. 항우의 전략참모 범증은 유방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죽일 생각이었다. 유방을 살려 두면 필히 항우의 적수가 되어 천하의 쟁패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함양성 입성의 시점에서, 유비의 군대는 '아직' 1개 군 규모인 수만명에 불과했다. 입성 이후, 군사력이 10만명 단위를 넘어섰다고는 하나, 이미 30만명으로 불어난 항우에 비교하면 정말 얼마 안되는 규모였던 것이다. 게다가 항우의 '파죽지세'는 정말 대단한 기세였고 만일 항우가, 유방의 군대를 토벌하고자 했다면 그의 꿈은 좌절했을 것이었다.

 

결국 유방의 목숨은 풍전 등화였다. 일촉즉발 '토벌당할' 위기 속에서 바로 장량의 전략과 기지가 발휘된 것이다. 그저 무릎꿇고 겸손하게, '당신이 진정한 통일중국의 실세요'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 부족했다. 범증의 '칼춤' 계책을, 항량을 동원해서 막아내고, 이것도 미흡하니, 번쾌를 호위무사로 불러들여서 분위기를 바꿔낸다. 범증의 계획이 항우의 '의사 번복'으로 실패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유방한 구차한 목숨을 살려서 자신의 진중으로 도망쳐나왔다.

 

그리고 나서, 항우의 명에 의해 장량은 유방의 곁에서 전략참모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종의 연금이었던 셈이다. 장량은 항우의 곁에 있도록 조치되었고 유방은 삼국지의 '유비'가 이후, 근거지로 삼게 되는, 촉땅으로 먼저 '유배조치'되었다. 삼국지에서 촉땅을 얻는 것은 일종의 '전략적 근거지 쟁취'를 의미했다. 천하 삼분지계는 촉의 지정학적 위치덕분이었다. 물론 이는, 유방이 촉을 근거지로 한나라 제국의 건립에 '성공'한 역사적 사례를 남겼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초한전 시점에서 200년이 경과한 삼국시대 시기에는, 이미, 촉땅으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났을 것이다. 그만큼 유방의 촉땅 유배는 글자 그대로 일종의 '영토가 있는 연금'과 비슷했던 것이다. 항우건 유방이건 '연금'으로 인식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항우가 안심한 만큼 유방은 사실 절망적인 상태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유방과 멀리 떨어진 장량은 활동을 계속했다. 한나라 왕족 출신이면서 뒤늦게 '반란'에 합류하여, 항우 밑에서 '창잡이'에 머물러 있던 한신을 '발견'하여, 촉땅의 유방에게 '추천서'를 써서 보냈다. 아마도 유방과 강제로 떨어져 있게 된 시점에서 장량의 가장 큰 공로는, '한신'을 발탁하여 그를 유방에게 보냈다는 점일 것이다. 


이후 장량은, 함양 시내에 일종의 '언론 플레이'성 노래를 유포하고 그 결과로 항우를 다시 팽성으로 되돌아 가게 했다. 팽성은 통일 중국을 다스리기에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중국 문명의 중심은 황하강 유역이었지 양자강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차례, 유방의 군사적 위기를, 항우의 심중을 조종하여 변경시키는 것으로 구원했다. 특히 촉 땅에서 나와 삼진을 멸하고, '한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러했다. 항우의 군사를 제나라로 유인했던 것이다. 

 

헌데 바로 이 시점이, 역시 항우 밑에 있었던 진평이 유방 밑으로 '옮아'가는 때였다. 물론 한신이 옮겨 간 것과 같은 이유였다.  항우는 스스로 왕족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쳐, 그야말로 출신이 미천하기 짝이 없던 '떠돌이' 진평과 같은 인물을 중용하지 않았다. 사실 한신도 뒤늦게 항우군에 가담했지만, '집극랑'에서 더 이상 중용하지 않았다. 한신은 왕족이긴 했지만 너무 뒤늦게 진나라 타도의 흐름에 참여하게된 바람에, 어느 진영에서건 중용되기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항우에게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에 궂이 진평이나 한신을 중용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초한전 초반에는 이렇듯 항우가 가장 빠른 '새 황조 개창'을 향한 주자였고, 따라서 그에게는 인물도 풍부했다. 반면 유방은 소하와 조참 그리고 장량 이런 몇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평과 한신은 각기 다른 이유로 유방 진영으로 옮기는데, '대접'이 미흡했다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항우의 미래를 밝게 안보게 되었던 것이다. 가령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을 '학살'하는 등의 사태를 보고, 한신은 항우가 천하 제패를 할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진평은, 여러 이유로 한신, 장량과 엮이게 되면서 극히 자연스럽게 유방 진영으로 합류하는 모양으로 나온다. 범증이 한신을 견제 했고 유방에게 절대 가담하지 못하게 '봉쇄'를 하고 있었는데, 진평이 한신에게 '신분증명서'를 줘서 진나라 군영을 무사히 탈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신과 진평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유방의 진영에 가담하던 무렵, 천하의 패권은 항우의 손아귀에 떨어진 듯 했다. 하지만 먼저 가담한 한신이 '도원수'로 특진하여 서촉 탈출의 군사 전략적 공헌을 하던 시점에 즉 삼한을 무너뜨리고 관중으로 나왔던 바로 그 시점에, 한신은 도원수 직책을 박탈 당했고 유방은 다른 제후에게 도원수 자리를 주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 진평이 유방의 진영에 가담했고, 장량을 대신한 작전참모로서 여러차례의 위기를 넘기는데 뛰어난 지모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비극적이라면 비극적이다. 결국 소하, 진평과 같이 실병 지휘권을 갖지 않고 '보급' 혹은 '행정' 그리고 '작전'과 '지모'를 발휘하는 일종의 '직계' 참모들에 의해, 한신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한신은 너무도 늦게 봉기에 가담하는 바람에, 요컨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다. 위나라와 제나라 방면으로 한군의 주력을 동원하여 결국 산동반도 일대까지 '유방'의 세력권으로 만드는데 크게 공헌을 하지만, 유방의 견제가 다시 발동하여, 한신은 병력의 대부분을 다시금 유방에게 빼앗기게 된다. 물론 유방은 이렇게 한신에게서 회수한 병력을 다시 항우와의 접전 속에서 잃어버리는 일을 되풀이 한다. 진평이 작전참모의 역할을 맡기는 했지만, '한신'과 같은 전략적 안목을 갖춘 군사 지휘관이 유방 진영에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시점까지, 한신은 한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번번히 한신을 내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측면에서 천하 쟁패란 여러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한신은 이렇게 내침을 당하면서도 다시 유방의 진영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데 장량 때문이었다. 관중을 점령하고 한신의 병력을 회수한 유방이 항우에게 당하고 나서, '칩거' 상태로 돌입하여 다시 도원수를 맡지 않으려 했던 한신을, 장량이 설득한 것이다. 물론 소하와 함께였다. 이런 일은 나중에도 되풀이 되는데, '제나라' 왕으로 책봉된 후, 유방이 출병을 요구했을때 한신은 '거부'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신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신은 결국 '3제왕'을 제수 받고 나서야 비로소 출병을 하고, 항우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헌데 바로 이 시점에서도, 장량이 한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진평의 '활약'은 이 시점까지도 미미한 것 처럼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계책은 아마도, 장량의 승인을 얻어서 행한, '반간계'였을 것이다. 진평은 이 반간계의 구사로 범증을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이 때문에 후손들이 번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범증의 죽음은 비록, 항우가 속아넘아간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해도, 별로 '정정 당당'하지 못한 반간계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음모'가 통해서 죽음에 이르른 것인데, 진평의 입장에서는 항우 진영의 최고 책사 범증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에 대하여 어느만큼은 가책도 있지 않았나 한다. 항우가 반간계에 걸려들어 아부 승상 범증을 내친 것은 그가 '멸망'으로 줄달음질치는 결정적 계기였다. 소규모 전투에서 이긴다고는 해도, 큰 방향에서 항우의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신의 출병이 결정적인 역사적 결과를 낳게 된다. 괴철이 이런 이유로, '출병' 하지 말고 '독립'하라고 했지만 장량이 '한나라 부흥'이라는 명분과 '3제왕'이라는 떡밥으로 한신의 출병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확실히 장량의 '공'은 엄청난 것이다. 한신을 최대한 활용했기에 그러하다.

 

진평은 반간계 이후, 한나라의 건국 초기에 고위직을 맡아서 일했다. 한 고조 유방이 '잔혹'하게 그와 더불어 진나라를 무너뜨린 '공신'들을 남김없이 죽인 것처럼 고우영 작가는 주장했지만,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참, 진평, 왕릉, 관영, 하후영 등 초기의 참모와 장군들은 한제국의 고위직을 맡았다. 특히 '떠돌이'에 불과했던 진평은 승승 장구를 거듭하여, '좌승상'의 지위까지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볼 사항은, 왜, 유방이 한신은 불신하고 진평은 신임했을까이다. 보건데, 한신은 왕족 출신이면서 실병력을 거느리고 한 지역에서 왕을 하면서, 언제든지 자신의 대권에 도전할만한 사람으로 유방에게 인지되었던 반면, 신분이 미천한 진평은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진평이 가장 유방과 닮은 측면의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아닐까 한다. 특히 금전문제에서 진평은, 유방과 닮았다. 돈을 펑펑 써서 '공작'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했고, 돈에 대한 욕심이 유방과 비슷했다는 점도 그러했다. 처음 진평이 유방에게 가담했을때 몇달치 봉급을 가불할 정도로 궁했던 진평은 일종의 인사 청탁금을 받아 챙길 정도로 돈욕심이 남달랐던 모양이라 유방의 여러 신하들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방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주 흔쾌히 '그럴 법한' 일로 치부되었고 오히려 진평에 대한 신뢰는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 고조 유방의 탁월함이 빛난다.

 

이런 진평은 범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만큼, 장량이 '은퇴'한 한 제국의 초기에, 여러 공을 또 세웠다.  유방의 '북방' 유목민의 반란 진압을 위한 출병에서였다. 적의 작전에 속아서 포위당한 채 일촉즉발위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또 거금을 들여 '활로'를 찾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점에서는 장량이 아니라, 진평이 유방의 목숨을 구출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평은, 한신을 '포박'하여 잡아 들이는데도 역시 계책을 세워서 실행했다. 진평과 한신이 서로 원수인적은 없었지만, 한신의 뜨뜨미지근하면서 미숙한 정치적 태도 때문에 불가피했던 조치였다.  한신을 반란죄로 잡아 들이고 왕에서 제후 신분으로 격하시켰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신은 결국 반란에 가담하는 처지로 몰리고, 마지막 차례는 소하의 몫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상국' 소하는 중국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록 반란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한나라 건국의 으뜸 공신 한신을 잡아다 죽이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소하는 한신이 도원수가 되도록 했지만 잡아다 죽음에 이르도록 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기구한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왕족 한신은 이렇게 죽으면서 '토사구팽'이라는 숙어를 남겼지만 떠돌이 진평은 승승장구했다. 마치 미천한 신분의 유방이 황제로 등극하듯 그도, 바닥에서 꼭대기로 신분상승을 이룩한 것이다.

 

고조 유방과 상국 소하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한제국을 이끌어가는 핵심 관료진을 맡은 사람들이 조참과 왕릉과 진평이었다. 조참이 소하 상국의 뒤를 이어서, 천하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2대 황제 혜제의 시점이었다. 조참은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산업과 경제가 살아날 여유를 준다는 일종의 '방치'의 정치를 소하에게 물려 받에서 행했다. '황로의 술'이라는 이런 정책기조는 전란에 지친 백성들에게 가장 훌륭한 방책이었는데 사실, 인구가 격감한 상태라서, 농업 생산력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기도 했다. 조참이 승상을 물러나고, 진평은 좌승상으로 왕릉과 함께 '투톱' 체제를 구축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여태후'가 혜제의 죽음 이후 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런 여태후의 폭정을 진평은 묵묵히 견뎌냈다.  

 

여태후의 8년 폭정을 견뎌낸 진평은, 주발 왕릉과 더불어 '친위 쿠테타'를 일으키고 유방의 4째 아들이었던 유항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주발과 더불어 역시 투톱 승상 체제를 구축해서 '문경치지'의 초기 조건을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20대의 젊은 유항이, 문경치지의 '치세'를 열어낸 황제로 평가되는데는 진평의 공적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쿠테타에서 군사력을 동원했던 '사령관' 주발이 진평보다 상위의 우승상이 되었지만, 국정을 지휘하는 능력은 진평이 뛰어났다. 결국 주발이 물러나고 진평은, 한 문제의 초기 1년을 '단독 승상'으로 일하면서 '문경치지'의 토대를 닦아 놓은 것이다. 유방의 참모진 중에서, 진평처럼, 여태후의 폭정을 묵묵히 견뎌내고 다시금 한나라의 황조가 제자리 잡고, 나라가 안정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진평의 공은 장량에 못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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