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5-19 21:28
[한국사] 열정과 냉철의 시대를 살다간 서재필, 혹은 필립 제이슨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751  

서재필은 처음 국적은 '조선'이었고 과거에 합격해서 관료생활을 시잭했지만 일본 육사를 1년간 다니고 미국에서는 병리학을 공부하여 '과학자'이면서 의사였으니 생애 전체가 격변 자체였다. 



이런 와중에 일관된 것이 있었다면 평생 'Cool'했다는점 아닐까 한다. 귀국하여 부친 묘소에도 가지 않은 캐릭터. 
부친 장례식에 불참했다는 링컨을 생각나게 한다. 그냥 '쿨'은 아니었다는 것인가.


Young_Philip_Jaisohn.jpg



1864(고종 1)∼1951. 개화기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이런 서술이 한국식이다. '사실'을 너무도 폭좁게 제공하는 문제가 두드러진다. 차라리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라고 하면 낫지 않나 한다. 추가한다면 한국인 최초의 '민주시민 교육가'이런 것도 가능할 것이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조직자이면서 순한글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그 편집국에서 주시경 선생이 일했고 김규식과 같은 인물도 그와 함께 일했던 3년동안 성장하고 있으니 그는 '대한민국' 탄생의 '멘토'나 다름없어 보인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되었다가 '일본'에 합방되었고 여기서 '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했는데 이 과정만큼 서재필도 그렇게 격변하는 생애를 보냈다. 그런데 위의 '정의'는 너무 단순하다. 

그의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 미국 귀화명은 제이슨(Jaishon,P.)이고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서 광효(光孝)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미국 이름 피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해서 '필재서'로 한 다음 알파벳 P J S를 가져다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서재필이 아니라 피 제이슨으로 살았다. 
헌데 한국에서 그는 언제나 서재필로 이름이 오른다. 국사책에 고유인명처럼 나오는 이름이 된 것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images.jpg



서재필의 생애에는 '양자 입양'이라는 과정이 들어가 있다. 왜 그런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외가쪽이 '안동김씨'였다는 사정이 클 것이다. 말하자면 '군수'였던 부친은 자수성가이고 외가의 힘이 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김옥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문화주의'에서는 '운명적 만남' 어쩌고 하겠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경향'으로의 기울어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김옥균을 만난다고 꼭 개화파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유정체'가 생존하기 위해 각종 다기한 사유를 행함에 '개화파'라는 방향성이 김오균과 서광범 같은 인물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도 '배역'이 분명히 있어 보인다. 서재필의 배역은 무엇이었을까?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김옥균의 '기획'에 그에게는 '무력'이 배당된 것이다. 큰 키에 기골이 장대했다고 한다. 앞질러 이야기 한다면 그런 이유로 미국 여인과 결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인 중 서양 여성과 결혼한 사례를 보면 기골이 장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인류학적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배우자 선택의 결과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김옥균은 서재필에게 '무력'을 맡겼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조련국 사관장이라면 오늘날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쯤 될 것일까? 김옥균의 의도는 실현되는 듯 했다. 사관생도들을 키우고 영향을 미치면 당연히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테니까.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김옥균이 원하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한국에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재필은 '무력'을 지휘하는 행동대장으로 선택되었다. '피'를 봐야 하는 '악역'이었는데 민씨 척족 대신을 살해하고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갑신정변'은 병자호란 이후 답답하게 반도에 갇혀있던 한반도 인류가 행한 '현대사' 최초의 혁명 시도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헌데 '실패'했지만 이후 100년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그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결하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한반도식의 '사화'가 여기서 재현된 셈이다. 1884년 갑신정변 전까지 민씨 척족들은 차라리 개화파에 호의적이었다. 이유는 물론 대원군이 '쇄국'을 집권의 명분으로 고수하면서 10년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1910년까지 엎치락 뒤치락하는 '한반도 인류'의 정치 엘리트 역사에서 '한쪽'에 가담했다. 그래서 이제 '혁명'하려는 쪽과 '고수'하려는 쪽의 반세기 항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개화파의 형성이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70년 경 김옥균이 박규수와 오경석, 유대치 문하에 드나들면서 시작된 것을 고려하면 1870년에서 1910년까지 40여년이다. 한반도 인류에게는 치욕이지만 '섬'나라 해양인류에게는 '영광'의 오십년이었다. 문명 지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대륙으로 진출해 올라오는 힘을 과시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개화파가 평화공존하던 '민씨 척족'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갑신정변이었다. '사적인 원한'까지 맞물리면서 치열한 추적과 암살의 행진이 시작된다. 서재필 부친과 부인 등 일가가 몰살한 것도 포함된다. 이런 일을 겪고 어찌 쿨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반도 인류에게 이런 '정변'은 사실 드물지 않았다. 삼족을 '멸족'시켰으니까 말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

아무튼 스타워즈에 비유하자면, 서제필을 '제다이'라고 해 보자. 이제 '돌아갈' 준비를 위해 제다이 서재필은 고난을 견뎌 나가는 인생이 시작된다. '제다이' 루크가 친척의 손에서 자라나 스승을 만나게 되기까지 그러했듯. '돌아온 제다이'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그가 학교에 입학할 때, 미국 국적을 가지고 제이슨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당시 역적으로 몰려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희생되어 본국에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었으므로, 생활을 위해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서술이 '문화주의 역사관'을 잘 보여 준다고 여긴다. 인간에게는 넘어서는 안될 '금기'가 있는데 그래서 '금기'를 넘은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해명'을 더해서 그 인물의 위대함에 손상을 가하면 안된다! 이런 사유가 내포된 서술과도 같다. 서재필은 생애 말년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성공'이라고 해도 그의 부친을 포함하여 부인이 자결한 사실은 불변이다. 아들이 굶어죽은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니 무슨 수로 자신의 친인척을 만날 수 있었을까? 감정을 지니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링컨에게는 조울증으로 나타났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Columbia Medical College :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라파예트 대학이라니 기구하다. 라파예트는 프랑스와 미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 프랑스 혁명가였다. '조선'의 혁명가 서재필도 주류 양반 출신이니 주류 귀족 출신인 라파예트와 같은 지위였다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서양인들의 핵심 '차별' 요소를 갖췄다. 몽골인에게 당했던 것을 분풀이하듯, 황색 피부를 용납하지 않았다. 사실 서재필이 미국 유학하던 이 무렵은 1859년생인 존 듀이가 막 '실험학교'를 시작한 무렵이었고, 미국의 철학을 집대성하던 그 무렵 아니던가.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론'이라는 존 듀이의 '다문화 융합'적 사유체계는 막 발아하던 시점이었고 미국은 인종주의속에서 아주 벗어나지 못했다. 서재필은 피부색에 대한 차별을 실감하면서 공부했다. 그래도 돌아온 제다이가 되려면 열심히 해야 하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는 박은식보다 더 '혁명적'인 변화를 이룩했다. 20세에 혁명에 참여하여 실패한 후,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했던 과거를 내버리고 미국의 '하이 스쿨'에서 일반 교양을 공부한 다음, '병리학자' 즉 '과학자'가 된 것이다. 갑신정변보다 더 심한 '인생정변'이었다. 

서재필 부인 뮤리엘.jpg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G.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쯤 카쓰라 태프트 밀약을 지시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한역할 해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미국인이 지구에서 가장 진화한 '인류'라고 여겼던 테오도어 루스벨트의 시대였다. 1898년, 공부하고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미국식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정치를 대한제국에 소개하던 그무렵이었다. 물론 서재필이 공부하던 무렵도 그러했다.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을 갖춘 '아시아인'들로 된 나라라고 여겼던 것이다. 라파예트보다 더 급진적 변혁을 도모했던 서재필은 라파예트만큼 대접을 못 받았는데 피부색 때문이었다. 게다가 조선 반도는 일본의 아시아 확장을 위한 멀티 기지 정도로 여겨졌으니 서재필이 어려웠던 것은 당연했다. 

한편,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경장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2014년 뉴스의 한자락은 15년동안 14번 바뀐 교육과정에 대해서이다. 헌데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의 변화는 2014년의 '만신창이 교육과정'보다 심하게 변화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1894년까지 10년간은 조선의 친청 개화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개혁을 진행했던 시기였다. 이유는 이 시기가 청나라의 양무운동 기간과 일치하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을 향해 나아가던 청나라의 '양무운동 10년'기간은 민씨 척족이 청나라에 의지한 개화 즉 '양무운동의 한반도판'이 작동했다. 양무운동처럼 총포도 들여오고 근대적 군대도 조직하는 등 대원군 10년 집권기보다 이때가 나았다. 육영공원 같은 것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가령 상투 같은 것을 여전히 유지한 개혁이었다.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무엇일까? 자본이 국가와 공진화하는 조건의 형성을 의미한다. 국가는 이 경우 자본을 위한 '인프라 관리인'과 유사한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동도서기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던 논리였다. 간단히, '토지 귀족'의 우두머리 황제가 여전히 '금융업자'를 포함한 '상공업자'를 관리, 통제한다는 이념이었다. 따라서 그 '행로의 끝'은 예정되어 있었다. 양무운동 10년이 '청일전쟁' 한판으로 종식된다. 청일전쟁의 개전 직전, 일본은 1개 대대병력으로 경복궁을 포위한 후, '갑오개혁'을 조선에 강제한다. 정확하게는, 일본의 '멀티기지'를 위한 조건의 강제적 마련이었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4년에서 1904년까지 10년은 이제, 2014년 시점의 교육과정이 겪은 것보다 더 심한 변침속의 10년이었다. 정부 편제가 1년에 서너번 바뀌는 변혁의 시기였다. 이유는 물론 '열강'의 한반도 침탈 때문인데, 사실 싱겁기도 하다. 마치 일본의 확장이 '예정'된 상황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반도 인류는 '마리 퀴리'의 폴란드나 혹은 '핀란드' 같은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쪽 끝에서 러시아는 폴란드와 핀란드를 100년이상 식민지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어 책이 아닌 '한글' 책을 몰래 공부하던 교실에 '러시아 시학관'이 들이 닥치자 책을 재빨리 거두어 갔는데 마리 퀴리가 아니라 '유관순'이었다는 것이다!

 1894년에서 대한제국이 수립되는 1897년까지는 '돌아온 제다이'처럼 된 갑신정변의 급진 개화파들이 다시금 정부 요직에 기용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양무파' 관료의 힘은 여전했다. 제1차 김홍집 내각이 '군국기무처'라는 이름의 기구를 설치하고, 양무파 관료가 함께한 이유가 이때문이다. 일본군 1개 대대가 경복궁을 둘러싸고 갑오개혁을 강제했으며 1차 김홍집 내각이 그 일을 맡았지만 민씨 척족의 힘은 여전했다. 그래서 결국 민씨 척족을 물리치는 2차 내각으로 나아가는데 이때쯤 서재필이 중책을 맡을만했다. 그런데 민씨 척족은 박영효를 '역적모의'로 몰아서 내쫓으면서 역습을 감행한다. 불과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비가 시해당하는 것이다.

 1894년에서 1년 남짓 경과한 1895년이었다. 김옥균의 사후 '거열형'과 '효수'를 목격한 유길준과 같은 사람의 심정은 당연하게도 민비에 대한 증오였다. 대원군쪽과 더불어 결국 민비 시해에 가담하게 되며, 이는 사실 조선의 국체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의미했다. 결국 의병운동의 촉발까지 마치 예정된 순서와도 같다. 고종으로서는 러시아나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일까. 왕비가 시해되고 폐서인이 강요되는 상황이니 그럴만도 했다.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돌아온 제다이는 광선검을 벌이고 '토론 교과서'를 집어 들었다. 한글 신문을 발간하면서 그 일을 매개로 여러 사람을 키워냈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탄생에 서재필은 거의 '태조'와도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관파천에서 고종이 돌아온 시점이었던 1897년은 청일전쟁에서 '조선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청나라를 대신하여, '만주'와 '랴오뚱'의 '여순'에 진출한 러시아가 영향력을 강화했다. 다시 10년의 불안정한 평화의 시기였다. 이 '힘의 균형'상황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변경하고 열강에게 이권을 '나눠' 주면서 재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무파에서 '친러파'로 변신한 대한제국의 '주류'에 대하여 이번에는 '시민운동'식의 대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협회의 '독립'에서 청나라가 대상이었다. 헌데 그게 러시아로 바뀐 것이다. 일본은 어떤 포지션이었을까? 러시아에 감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한국 양반 관료 지배계급의 일반적인 상황인식이었을까? 그러하다면 당연하게도 독립협회의 시민운동적 대응이란 러시아에 반대하는 것이 된다. 겨우 3년간의 독립협회 활동에서 그나마 서재필의 주도성이 관철된 초기에는 매우 폭넓은 공화주의 정치로의 변혁을 염두에둔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1898년 무렵에는 '반러시아'쪽으로 방향이 좁혀졌다. 이완용이 왜 독립협회에 있었을까. 반러시아로 방향을 좁히기 위해서였을까.

 ≪독립신문≫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 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 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배재학당은 독립협회의 영향속에 대한민국 탄생의 산실처럼 되었다. 서재필과 이승만이 바로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비친일이면서 친미였던 새 정치세력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이나 이승만의 '길'은 윤치호나 이완용의 길과 전혀 달랐다. 유길준에 비교하면 급진적이었던 셈이다. 급진적 공화주의의 산실이 바로 배재학당이었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미국인이 된 서재필을 죽일 수 없었다. 결국 추방하게 된다.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독립협회가 결국은 '반러' '친일' 포지션처럼 되버렸으니 고종으로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 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서재필의 방법은 곧바로 이승만에게 복사된 것 같다. 이승만의 경우 '관점'의 폭넓음에서 뛰어나다고 인정된다. 원본이 서재필이었던 셈이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 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 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 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일제치하의 한국에 서재필은 10년 주기로 방문했는데 주로 장례식 참석이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그리고 친구였던 윤치호 장례식에 참석했다. 일제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어쩌지 못하는' 지위를 미국에서 확보했던 것이다. 혁명가 서재필은 이렇게 해서 미국 '주류'의 시민사회에 편입되었다. '인민'을 위해 이십대의 나이에 혁명을 위해 떨쳐 일어났지만 그 '인민'들이 혁명을 거부하고 청나라의 속국으로 사는 길을 택하는 듯 보였으니 당연히 그는 '한반도'의 정치체제가 무엇이건 '남의 나라'로 여긴 것이다. 오늘 어떤 한국인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G.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1977년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생애는 20대의 '뜨거움'이 너무도 이르게 '쿨'로 바뀌었다는데서 핵심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정열은 이승만에게 물림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권을 잡고 운용하는데서 이승만은 그야말로 '달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건국 전야에서 서재필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권력에 대한 감각이 정말 남달랐다. 그래서 서재필은 내내 '쿨'한 한국인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초대 대통령 자리를 사양했으니까. 

두살짜리 아들이 굶어 죽었으니 그 비통함을 꺼내 놓은 순간 '분사'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캐릭터 서재필은 이런 점에서 연구해볼만 하다. 성리학을 버리고 신삭학문을 공부한 박은식보다 더 앞서서,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한 '양반' 캐릭터에서, 서양 학문의 핵심인 자연과학을 깊게 공부한 과학자로 변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생태와 경제 블로그 발췌 및 편집>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7,94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959 [한국사] 숙신 (1) history2 02-16 757
958 [한국사] 유물유적 관해서 질문 드립니다. (6) 남북통일 03-01 757
957 [한국사] 평양이 요양에 있었다? 반박 (13) 고이왕 06-13 756
956 [한국사] 역사와 한의 땅! 강화도 히스토리2 06-04 756
955 [일본] 천황의 나라 일본 2부 사쿠라로 지다 BTSv 02-12 756
954 [한국사] 역사학을 전공해야 할까? (1) 감방친구 04-24 756
953 [한국사] 숲의 옛말과 신라 백제의 길사 호랭이해 04-18 756
952 [한국사]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다 조지아나 05-04 756
951 [한국사] 중국의 통일 3개국의 침입을 막아 방파제 역활 확실… (4) 고구려거련 06-03 756
950 [세계사] 나폴레옹 전쟁 (1) 레스토랑스 07-15 755
949 [한국사] 한사군 대방군 (16) 고이왕 08-29 755
948 [기타] 낙랑 (3) 관심병자 09-23 755
947 [한국사] 인하대 복기대팀의 고려국경에 대한 신문기사 (아 기… (1) history2 04-15 755
946 [한국사] (영조의 스승) 박문수는 왜 암행어사의 전설이 됐나 (1) 고구려거련 12-31 755
945 [한국사] 고구려 음악 (6) 호랭이해 04-22 754
944 [한국사] 한국의 문루(서울, 수원, 개성, 평양, 의주,안주,영변 (2) 히스토리2 05-12 754
943 [일본] 황현필 강사...이 분.... (3) 북창 04-25 754
942 [한국사] 조선의 혼, 다시 살아나다 엄빠주의 10-31 753
941 [세계사] 선과 악의 원인.추구해야할 방향, 그리고 미래에 대… (2) 이해한다 01-26 753
940 [기타] 한(韓) 명칭 잡생각 관심병자 03-12 753
939 [중국] 거란의 이중통치 체제에 대한 간략한 소고 (2) 히스토리2 04-29 753
938 [중국] 지나의 역사를 보면 참 신기한게... (5) Hiryu 03-05 752
937 [한국사] 삼국시대 지진 기록문헌 (6) 도배시러 02-09 752
936 [한국사] 열정과 냉철의 시대를 살다간 서재필, 혹은 필립 제… 히스토리2 05-19 752
935 [한국사] 한국의 정원과 정자 2 (7) 히스토리2 05-09 751
934 [기타] 기자조선과 동북공정 두부국 07-07 751
933 [한국사]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정설이 아닌 적… (21) 타이치맨 12-23 751
 <  621  622  623  624  625  626  627  628  629  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