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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7 15:58
[한국사]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시사in 기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236  

고구려의 평양, 대륙에 있었나

지난해 상반기 교육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딘가에 대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가 배워온 것과 전혀 다른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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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희 대기자 bulgot@sisain.co.kr


산 정상의 백암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해발 300~4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인데도, 막상 들어서자 발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등산로에는 얼음이 녹는 중이라 미끄러지기 십상이었고, 그 옆에는 눈이 수북했다. 등산로 왼편으로는 매끈하게 빠진 성곽이 정상까지 쭉 이어졌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백암산성(白巖山城)’이 사성(蛇城·뱀성)이라는 옛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밝혔는데, 아닌 게 아니라 길게 도열한 성곽 모습이 꼭 뱀의 몸뚱어리 같았다.

민간 답사팀의 강청을 못 이겨 동참하게 된 복기대 교수(인하대 융합고고학과)는 백암산성이라는 이름이 영 마뜩지 않은 눈치다. 고구려-당나라 전쟁 당시 백암산성 성주 손대흠이 항복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하는데, 이 성은 아무리 봐도 대규모 전투를 치를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직접 정상에 올라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답사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렇게 천혜의 지형 위에 축성을 했는데 군사적 용도를 배제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도 나왔다. 고구려 산성 특유의 방어용 시설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것 역시 반박의 근거가 되었다.

백암산성 정상부에 있는 정방형의 석축물. 강화도 참성단과 같은 원리다. 서울에서 조사한 자료의 내용은 이랬다. “백암산성: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서대요향에 있는 고구려 산성. 하얀 석회암으로 쌓아 백암산성이라 불렀다. 당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가 10년에 걸쳐 6m 높이의 거대한 산성을 쌓았다. 성 밑에 절벽이 있고 태자하(太子河)가 흘러 난공불락의 요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 둘러보니 과연 군대가 주둔했을 법한 공간이 없다. 그나마 정상 부위는 공간이 더욱 좁아져 탑을 연상케 한다. 방어용 요새라고 보기 어렵다는 복 교수의 판단에 수긍이 갔다.

그렇다면 백암산성은 도대체 어떤 건축물이란 말인가? 정상에는 정방형 석축물이 있다. 고구려인들이 당대에 쌓았다. 모습이 범상치 않다. 지난해 국립 고천문연구소 선임연구원들과 함께 조사 작업을 벌인 복 교수 팀은 천문 관측용 시설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각형인 석축물의 각 모서리는, 약간의 오차가 있기는 하나, 거의 정북·정남·정동·정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고대의 천문 관측에서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정북 방향을 기준으로 시설물을 배치하는데, 백암산성 석축물 역시 그런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이 낯설지 않다. 요서·요동(랴오시·랴오둥) 지역의 고대 유물 전문 사진작가로 백암산성만 20여 차례 방문했다는 전성영씨는 “석축물 위아래가 전형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모습을 띠고 있다.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과 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각형인 석축물 아래의 기초 시설이 원형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원지방’이란 하늘을 원으로, 땅은 네모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 관념이다. 지상에 이를 구현할 때는 반대로 원형 구조물(하늘) 위에 정방형 단(땅)을 얹는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이나 경주 첨성대가 전형이다. 모두 천문을 관측하는 유적들이다. 고대부터 요동(랴오둥) 지역의 중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요양(랴오양)의 고구려 산성에서 마니산의 참성단과 비슷한 유적을 보게 되다니…. 묘한 전율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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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20일 오전이었다. 대련(다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북쪽으로 달려 이미 캄캄해진 뒤에야 영구(잉커우) 대석붕(고인돌)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해성(하이청)의 석목성자(析木城子)산의 고인돌과 산 정상부 곰바위(복기대 박사 작명)에 새겨진 별자리 그림까지 봤다. 백암산성의 석축물과 석붕산·석목성자산의 고인돌 간에는 기묘한 일관성이 관찰된다. 모두 천문 관측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고인돌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이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관찰되는 남방식 고인돌은 주로 지석묘, 즉 매장 용도로 활용되었다. 이에 비해 북방식은 대다수가 기단 위에 탁자를 올린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제사나 천문 관측에 관련된 구조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북방식 고인돌은 하나같이 진남북 방향, 즉 하지나 동지, 특히 동지 때 해 뜨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북두칠성 방향이다. 특히 석목성자산 정상의 곰바위에는 BC 3000년대의 이곳에서 관찰된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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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청(해성)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천문 관측과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런 북방식 고인돌과 백암산성 석축물로 이루어진 조합은 또다시 강화도를 연상시킨다. 강화도에도 비슷한 북방식 고인돌이 있기 때문이다. 두 군데 문명이 마치 포개놓은 듯 닮았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복 교수에 따르면, 강화도뿐 아니라 황해도나 평양, 즉 한반도 서해안에도 비슷한 유적들이 등장한다. 현재로서는 고대 대륙 문명의 주인공이었던 고조선 유민들이 두 차례의 정치적 격변(위만의 기자조선 정권 찬탈,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설치)을 거치면서 한반도의 황해도나 평양 등에 진출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장이 나온다.


온갖 상념을 간직한 채 백암산성 절벽 아래 태자하를 찾았다. 복기대 교수는 2010년 발표한 논문 <고구려 도읍지 천도에 대한 재검토>(고구려 도읍지 역사 새롭게 쓰일까 참조)에서, ‘요양이 고구려 전성기의 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주장의 핵심적 키워드가 바로 태자하다. 복 교수는 한국 상고사의 해묵은 논쟁 주제인 패수(浿水)가 태자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패수는 상고시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었던 강이다. 패수의 위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 일부 조선시대 유학자나 일제시대 일본 관변 사학자, 현대의 주류 사학자들은 패수를 압록강이나 청천강으로 본다. 이에 반해 일제하에서 민족사학을 개척했던 신채호, <고조선 연구>를 쓴 북한 사학자 이지린,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인 단국대 윤내현 교수 등은 요서(랴오시) 지역의 대릉하(다링허)나 난하(롼허)를 패수라고 주장했다.

랴오양 박물관 안의 전시실 입구. 평양의 앞뒤를 바꿔 양평이라 불렀음을 보여준다(오른쪽). 랴오양 박물관에 걸려 있는 <요사> 지리지(왼쪽). 오른쪽 둘째 줄에 이곳이 옛 평양성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패수 논쟁’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후한 말엽인 3세기에 나온 지리서 <수경>에는 ‘패수가 동남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200여 년 뒤인 남북조 시대 북위의 지리학자인 역도원은 이에 의문을 품고 고구려 사신에게 직접 패수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역도원의 지리서 <수경주>에 따르면, 고구려 사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즉 수도인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을 지난다.” ‘패수 논쟁’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에는 패수로 불리는 강이 다수 등장한다. <수경주>를 단서로 패수의 위치를 추정하려면, 저자인 역도원이 언제 고구려 사신을 만났는지 분석해야 한다. 복 교수는 그 시기를 고구려 문자명왕 때로 본다. 장수왕 바로 다음 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다. 이 평양이 지금 북한의 수도인 그 도시라면, <수경주>의 패수는 평양 남쪽 즉 대동강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복 교수는, 당시 고구려의 평양이 바로 이곳 랴오닝성 랴오양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중국의 여러 사서들이다. 특히 중국 역대 왕조들이 공식 편찬한 관찬 사서인 <25사> 중 <요사>와 <원사>에 당시 동경요양부로 불렸던 랴오양의 내력이 언급됐다는 것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조의 다음 구절을 보자.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 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내 그들이 거처하는 평양성에 이르게 했으니….”

위 태무제 때 고구려왕은 장수왕이다. 따라서 위 내용을 풀면 위의 태무제 때 동경요양부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고 장수왕이 그곳에 거처했다는 것이 된다. 원나라 때 역사를 밝힌 <원사> 지리지에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원래의 옛 평양이 아니라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패수’를 태자하라고 추정하는 이유


“진나라 의희(義熙) 이후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 평양성에 살았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쳐서 평양을 점령하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의 동남으로 천여 리다. 예전의 평양이 아니다.”

위 내용 중 고련은 바로 장수왕의 이름이다. 거련(巨連 또는 璉)이라고도 한다. 의희는 동진(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북방민족의 발호 때문에 강남으로 달아나 세운 왕조)의 연호 중 하나로 405~418년에 사용되었다. ‘의희 이후’라면 418년 이후인데,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가 427년이다. 즉, 고구려 문자명왕 시대의 평양(장수왕이 이곳으로 천도)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사> 지리지에서 밝힌 동경요양부(지금의 랴오양)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혼돈이 벌어졌을까. 고구려 도읍지를 가리키는 평양이나 환도 등의 용어는 어느 특정 지역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평평하고 너른 땅’, 즉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명사에 가깝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평양으로 불려도 시기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진다. 고국원왕 때 거의 패망 수준으로 랴오둥의 구석인 집안(지안)현까지 쫓겨 갔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을 거치면서 장수왕 때 최전성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동진정책을 통해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랴오둥의 북부로 영토를 확대했다면, 장수왕은 적극적인 서진정책으로 베이징 근처 난하(롼허) 유역까지 진출했다. 이런 나라의 수도로 지안현은 너무 외지고 협소했다. 따라서 요동벌의 중심이자 문물의 집산지인 랴오둥으로 천도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그때 평양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참조).

그렇다면 <수경주>에 등장한 패수는 어디인가. <요사> 지리지의 또 다른 부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 패수는 요양(랴오양) 근처에 있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 사신의 증언까지 종합하면, ‘랴오양 부근을 거쳐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 패수다. 랴오양 근처의 강으로는 혼하와 태자하가 있다. 그런데 혼하는 랴오양의 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복 교수는, 랴오양을 통과하는 바로 저 발 밑의 태자하가 패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후 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22일 오전, 별 기대 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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