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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5 10:29
[기타]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244  

https://namu.wiki/w/평양성%20전투

제1차 평양성 전투

날짜

1592년 7월 21일(음력 6월 13일) ~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광해군
김명원
윤두수
이원익
고언백
김침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3,000~4,000여명

18,700명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함락


한양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 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선조는 원래 평양을 사수하기로 하였으나, 고니시의 진격 소식을 전해듣고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몽진하였고, 평양은 스스로 수비를 자원한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게 하였다. 다만 김명원의 경우는 그 간의 패배로 인하여 군중에서 인망이 실추되어 실제 전투 지휘는 윤두수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7월 20일(음력 6월 12일) 광해군은 평양성의 남자들을 동원해 성을 정비한후, 자신은 똑같이 행동하겠다고 백성들에게 선전했다.
이때, 평양성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올라갔다고 한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 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그러나 윤두수와 이원익, 김침 등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으나 오히려 패배했고, 강을 건널 당시에는 배를 탔으나, 퇴각하면서는 배를 찾을 여유가 없어 군사들이 왕성탄으로 걸어서 퇴각했다.

이것을 보고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본 일본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결국 평양성은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여기서 광해군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광해군은 당시 평양성이 함락된후, 바로 빠져나와 안주로 후퇴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날짜

1592년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명 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김명원
황원
조승훈
사유†
장국충†
마세륭†
대조변†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조선군 3,000명
명 원군 3,000명
총 병력 6,000명

18,700명

피해 규모

대부분 전멸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조명 연합군 최초 패배


의주로 몽진한 선조는 명나라에 이덕형을 사신으로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는 병부 상서 석성의 의견에 따라 원군을 파견하도록 하나, 당시 이여송 등의 요동 주력군이 보하이의 난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에, 우선 요동 부총병 조승훈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1차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조승훈의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의 보급을 지원하였고 조승훈은 곧 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함께 입성하였다가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 공략을 위해 성을 빠져나왔는데 이를 본 조선 측의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오인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조명 연합군 지휘부는 일본군 측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여겨 평양성 탈환의 기회로 여겼다. 결국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과 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패잔병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제2차 평양성 전투는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황원의 오인 보고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동안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군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소문이 돌아서 조선 조정은 사신을 파견해 이에 대해 해명해야 했다.

제3차 평양성 전투

날짜

1592년 9월 6일(음력 8월 1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이일
김응서
이원익
임중량
윤봉†
차은진
차은로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이일 5,000명
이원익 5,000명
김응서 10,000명
총 병력 20,000명

18,700명

피해 규모

불명

불명

결과

일본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실패


제2차 평양성 전투 이후 명군은 요동으로 철수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당시 편성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병력을 모아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성 탈환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는 그동안 패배하기는 했지만 2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의 병력 역시 소모되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총 병력 2만을 편성하여,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흩어져 버리고 조선군은 왜군의 맹공격에 밀렸다. 남은 병력은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결국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도중에 김응서 군영은 적정에 대한 연락을 받지 못하여, 이일 군과 이원익 군이 퇴각하는 와중에 단독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제4차 평양성 전투

날짜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 2월 9일(음력 1월 9일)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성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조선 왕국
명 제국

쇼쿠호 일본

지휘관

류성룡
김명원
김응서
정희현
이시언
정화
사명대사
서산대사
이여송
이여백
양원
장세작
오유충
이녕
조승훈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요시치로†
고니시 안토니오†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히비야 아고스트†
마츠우라 사다무†
히다카 코노무†

병력

조선군 8,000명
승병 2,200명
명 원군 43,000명
총 병력 53,200명

18,700명

피해 규모

불명

600명 ~ 1,200명 전사

결과

조명 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군이 패전하여 대군을 파견할 필요성을 느낀 명나라 조정에서는, 마침 보하이의 난이 진압되었기에 북방 주력군이었던 요동군을 파병하기로 하고 경략 송응창을 최고 사령관, 제독 이여송을 현장 총지휘관으로 삼아 4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의 보급을 담당하고 도원수 김명원과 평안우방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결국 독자 방어에 나서게 된 고니시 군은 성 방어를 위한 일본식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최대한 요새화하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과 김응서는 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의 좌군 부총병 양호, 중군 부총병 이여백, 우군 부총병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이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에게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이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로 평양성을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가 이끄는 8,000명이,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음에도 태연히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이 군사 3,000을 이끌고 추격에 나서 적군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7개월만인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 - 용천(서흥군) - 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선조는 평양성이 탈환되자 음력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결과

적장은 보아라! 우리가 한 번 거사하면 너희를 모두 섬멸키에 충분하나,
차마 인명을 모두 해할 수 없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니, 너는 여러 제장을 거느리고
속히 원문으로 나와 의 분부를 받들라!


연광정 토굴로 피신하여 저항하는 고니시에게 이여송이 유시한 말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전투를 통하여 동생인 고니시 요시치로와, 사촌인 고니시 안토니오, 일문인 히비야 아고스트 등을 잃었다.

조선 왕조 실록 1593년 1월 11일에 평양성 수복 전투가 실려있는데, 이 부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여송이 조선 측과 상의없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몰래 짜고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중화 방면의 이일 부대에게 철군을 명한다. 일본군은 야밤에 그야말로 36계 줄행랑을 쳤고 명군은 더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한편 전투 이후 명군이 1만명에 가까운 평양 백성들을 학살해 수급을 베고 남은 시신은 대동강에 버려졌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이 역시 1593년 1월 11일 기사에 실려있다. 다음과 같다.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韓)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雀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

https://namu.wiki/w/평양성%20전투


의심가는 부분
고니시군은 탄금대 전투이후 진격 속도가 느려졌다.
왜군의 기록보다 더 피해가 컸을 가능성이 있다.
고니시를 무슨 평화주의자로 묘사하는데, 왜군 선봉이 평화주의자라 조선왕의 추격을 늦춘다?
가토와 전공을 경쟁하는 상황에서 왜 진격을 멈췄을까.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질않고,
그런 사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지면 목이 달아날 일이다.
히데요시는 부하들을 장악하지 못한 무능한 눈뜬 장님이었고, 고니시의 부하들은 히데요시에게는 충성하지 않았다는게 되는것인가.
결론적으로 평양성에 입성한 왜군은 더 적었을수도 있다.
2차 평양성 전투당시 명군은 더 많았을수도 있다.
중원의 고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붓이다.
지금말로 하면 펜이라는것.
과장과 자신들에 유리하게 기록을 왜곡한다.
2차 평양성 전투의 명군이 정말 3천명밖에 되지 않았을까?
병법에 성을 함락하려면 수비군의 몇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적의 절반도 되지않는 병력으로 성으로 돌격할만큼 명나라 장수는 병법에 어둡고 무능했다는것인가.
왜군이 조선 북부까지 진출하며 제대로된 조선군의 기병들과 상대하게 된다.
이는 이때부터가 조선군의 제대로된 정규군의 전투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의 주력은 기병이었고,
임진왜란은 조선의 후방을 침략당하며 시작된 전쟁으로,
전쟁초반의 관군은 급하게 징집해 훈련되지않은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는것.
조선군이 조총소리에 놀랐다는 기록이 전쟁초반 관군들의 질을 짐작할수있다.
조선은 고려때부터 화약무기들을 도입해서 전쟁에서 사용했고,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총을 보유하지 않았다 뿐이지, 화약무기를 사용하며, 화포 같은 경우는 오히려 조선이 더 뛰어났었다.
남부지역에는 치안병력 정도만 주둔했을거라고 생각하는게 맞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민방위 수준.
왜란 최초로 정규군이 투입된 탄금대 전투의 경우,
신립은 기병으로 배수의진을 치고 싸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신립의 화려한 경력과 신뢰를 봤을때, 그가 병법에 어두웠다고 볼수는 없고,
그렇게 라도 해야 싸울수 있을만큼 상당수의 병력이 사기, 기강이 잡히지 않았을수도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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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5-15 10:59
   
고니시군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 제1군 병력규모가 처음 부산에 상륙할 당시에 18,700명인데....

어떻게 그 다음해 초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의 4차 평양성 전투 직전까지도 그대로 변함없이
18,700명인가요....???

고니시군은 부산에 상륙한 이후 부산진전투, 서평포-다대포전투, 동래성전투, 밀양전투, 상주 북천 전투,
충주 탄금대 전투, 임진강전투, 평양성전투까지 치르면서....사실상 조선군 주력군을 홀로 상대하다시피해서
평양에 이르렀고... 평양점령 이후에도 조승훈의 명나라군, 이원익의 조선군과도 큰 전투만 2번을 치렀는데...

그리고 그 당시 시대는 전쟁에서 일반적으로 전투에 의한 직접적인 전사자보다도
부상에 의한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투전사자보다 더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여송의 4차 평양성전투 직전기준으로 고니시의 1군 병력규모는 1만 남짓에 불과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6시내고환 18-05-16 17:43
   
음.. 어디서 고니시군 점호한 기록을 본적이 있는거 같은데 평양성에 도착했을때 규모가 꽤 줄어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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