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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2 11:00
[한국사] 삼국사기 후기기록 불신론, 장수왕 남진정책
 글쓴이 : 도배시러
조회 : 1,116  

근초고왕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백제의 한산(漢山), 한성(漢城)이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관련 지명은 패하(浿河 혹은 패수, 패강)입니다.


장수왕 63년(서기 475)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장수왕 남진정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수왕의 백제 한성 공격후 개로왕 시해사건' 입니다.
여기서 잘못된 부분은 이 사건이 고구려 남진정책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본문을 보시면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고구려로) 돌아왔다." 고 기록합니다.
남진정책을 하려면 어케해야 하죠 ?
고구려 사람들을 데려와서 백제 한성에 거주하게 하는것이 점령이요. 남진정책입니다.
그냥 되돌아가면... 남진정책이 아닙니다.  바뻐서 다음 문장을 마저 읽지 않은듯 합니다.

虜男女八千而歸 돌아왔다.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汶州)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毗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서기 475)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여 병사 1만을 얻었다. 
고구려 병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어서 문주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품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서기 475),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文周王[或作汶洲] 蓋鹵王之子也 初 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 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都於熊津

백제 개로왕 사망후 왕위를 이은 문주왕의 기록에서도 고구려 병사가 물러갔다고 합니다.
고구려 병사가 물러갔다면 기존의 백제 영토는 어찌 되었을까요 ?

무령왕 7년(서기 507)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와서 주둔하니 
임금이 군대를 내어 싸워서 그들을 물리쳤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문자왕 16년(서기 507) 겨울 10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금이 장수 고로(高老)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게 하였다. 
백제가 병사를 출동시켜 우리의 병사에게 대항하자 곧 물러났다.

十六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王遣將高老 與靺鞨謀 欲攻百濟漢城 進屯於橫岳下 百濟出師逆戰 乃退


백제 무령왕, 고구려 문자왕때에도 한성(漢城)은 여전히 백제의 영토입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횡악(橫岳) 입니다.
횡악은 백제 초기 기록에서 자주 나오며, 위치는 한수 이북지역 입니다.
백제왕의 사냥터이며, 흉년이 들었을때는 백제 아신왕이 기우제를 지낸 백제의 명산 횡악(橫岳) 입니다.

아신왕 11년(서기 402) 여름, 크게 가물어 벼가 타서 마르므로, 임금이 친히 횡악(橫岳) 에서 제사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이다.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돌아가시고 왕위를 잇자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서기 523), 고구려 병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임금이 좌장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聖王 諱明穠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원문과 번역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백제 성왕 때에도 한성 과 한수의 북쪽 지역, 그리고 패수(浿水) 아래의 영역에서 지역방어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장수왕 남진정책으로 백제 한성을 점령 당했다면, 그 북쪽의 횡악과 패수 지역을 백제가 방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삼국사기 기록에 분명히 나옵니다. 장수왕 이후에도 백제 한성의 북쪽 지역을 백제는 여전히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역사교과서에 상상으로 만들어진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교육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요 ?


이 문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이어 삼국사기 후기기록도 불신하는 역사학계의 풍토를 보여 줍니다.
즉, 삼국사기 기록 자체를 불신한다는 의미가 되는것이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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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5-12 11:15
   
왜냐 하면 고구려 평양은 곧 죽어도 현 서북한 평양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도배시러 18-05-12 20:20
   
조선은 고구려-백제 1천리를 유지하려고 평양~전주를 설정했는데...
그 후손들은 5백리를 단축시켜 평양~한강 으로 변경.

평양을 북쪽으로 옮기면 쉬운 문제 였습니다.
옛사람들처럼 대통령이 바뀐다고 중국에 책봉을 받으러 사학자들이 출발하는것도 아닌데.
뭔 생각들을 하는 것인지...
칼리S 18-05-12 11:17
   
모지리님아 산수도 못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역사 해석하는것도 모지리시군요.

왜 장수왕 시기를 남진정책이라고 하냐면요.

평양(현 평양)으로 천도한게 장수왕15년(427년)이고, 그 이후로 중국(북위)과는 대체로 좋은관계(형식상의 조공관계)를 유지하지만, 백제와 신라와는 교전합니다. 이후 다들 알다시피 장수왕63년(475년)에 개로왕을 죽입니다.
보시다시피, 장수왕 그 긴 재위기간 내내 중국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만 압박(공격)을 가합니다. 그래서 남진정책이라고 하는 것이죠.

무슨 삼국사기 기록을 불신한다느니 이런 헛소리는 자제하시길 바랍니다(무식한 거 티내지 마세요)
     
감방친구 18-05-12 11:25
   
님을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ㅡ "모지리님아"
ㅡ "헛소리는 자제하시길 바랍니다(무식한 거 티내지 마세요)"

매번 이런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본문 작성자인 도배시러님이 이 글에서 댁을 개인적으로 지목하여 모욕하는 발언을 했습니까?

아니 역사를 탐문, 고찰하는 자리에서
왜 이런 식의 욕설, 모욕, 조롱의 언사를 매번 합니까?
          
칼리S 18-05-12 11:49
   
왜 그러냐고요? 도배시러란 사람도 제 글에 관련도 없는 종교(강단사학) 운운하면서 비꼬니깐요(머 이런 유사역사환빠한테 이런 소리 들으면 영광이죠. ㅋㅋㅋ) 그리고, 모지리한테 모지리라고 하는게 머 이상한가요?

도배시러 18-04-30 16:53                                                              답변 
 
종교를 고찰하는것은 신앙에 위배된다는 주장.
대개 종교적 교리의 기원을 이해못하는 평교도들의 자세

함부로 종교교리의 기원을 언급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유사종교, 이단 소리를 들을까 걱정하는 평신도들의 처세술이죠
               
감방친구 18-05-12 11:54
   
그러면 차라리 돌려서 비꼬는 표현을 쓰시지 대놓고 하는 언사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댓글 논쟁 중에 서로 감정이 격해져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님과 댓글 논쟁 중에 서로 비하, 조롱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그때 그러고 마는 식으로 그런 경우는 토론 게시판에서 비일비재한 일입니다만

그래도 견해와 처지가 맞서는 상대를 존중하는 최하한선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도배시러 18-05-12 17:05
   
장수왕 남하정책을 인정하는 삼국사기 문헌이 없는것은 사실 아니냐 ?

학생들 교과서에서 사서를 편취해서 가르치지 말고
장수왕의 남하를 확신하게된 고고학적 사실을 알려주고
쑥스럽지만 삼국사기는 고고학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줘라.
     
남북통일 18-05-12 17:56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삼국사기
번역-2년(서기 49)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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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의 남진정책은 글쎄요................
그렇게 따지자면 모본왕의 서진정책도 말이 되네요.
특히 태조대왕 때는 요서 10성도 쌓는 등 후한과 상당히 경계적인 입장을 보였으니.........
남자는힘 18-05-12 11:31
   
고구려 수도를 그냥 국내성으로 했으면 남하라는단어를 쓸 필요가없제
 왜 멀고도 먼 평양으로 천도를 했는지 잘생각해보더라고
시간이 남아돌아서 천도를 했겠남.
     
도배시러 18-05-12 16:40
   
장수왕 15년(서기 427) ,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十五年 移都平壤
     
도배시러 18-05-12 16:53
   
魏書  卷一百 列傳第八十八
百濟國,其先出自夫餘。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
북위서 : 고구려~백제 천여리
=> 조선시대 사학 : 천리에 맞춰서 고구려 대동강 평양 ~ 백제 전라도 전주
=> 후손들 : 천여리를 5백여리로 조정.. 대동강 평양 ~ 한강 서울
     
도배시러 18-05-12 16:57
   
북위시대 : 평양 ~ 한성 1천리
당나라시기 한원서 高麗記曰 不耐城今名國內城在國東北六百七十里 本漢不而縣也
국내성~평양 670리
          
남자는힘 18-05-12 21:03
   
그러니까  왜 평양으로 천도했는지 잘생각해보더라고 할일없어서 천도한건 아니지않겠남?
무슨이유가 있을거 아닌감.
               
도배시러 18-05-12 21:33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같다면 ?
장수왕이 외세의 공격을 당했고 그 대비책으로 평양천도했다면 ?

둘다 점령지 확보등의 결과가 없으니 뇌피셜 가능해보임
도배시러 18-05-12 16:38
   
장수왕의 남하정책을 인정한다면 ? 신라-백제와 어떤 관계를 만들었나 ?
태조대왕의 서진정책도 인정해야 할듯... 위치는 낙양 북쪽의 태원, 황하가 북=>남으로 흐르는 지역
*** 아무말 잔치 퍼레이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마한을 압박하기 위한 문주왕의 남진정책이고 ?
     
남자는힘 18-05-12 21:09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건 한성(서울)이 고구려한테 함락 당한걸 경험한 문주왕이 고구려가 두려워서 웅진으로 천도한거제 한성이랑 평양이랑 넘가까우니
또다시 함락 당하지 말란법 없으니 두려워서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거겠제

한나라의 수도를 옮길땐 다이유가있는겨
시간이 남아돌아 할일없어서 옮기진않겠제
          
도배시러 18-05-12 21:37
   
그런 이유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단, 근거가 있느냐 ?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공격한 이유는 근거가 충분하지.

개로 15년(서기 469)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장수왕이 475년 백제한성을 공격한 이유는 백제의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전쟁이 맞는거지.
남진정책이 나올 상황은 아니지. 뇌피셜이 아니라면 근거 문헌을 제시해야지 ?
도배시러 18-05-12 17:00
   
장수왕이 427년 남하정책을 했다면, 북위의 백제 침략이 가능했을까 ?
북위가 고구려 남하정책을 방해한것은 아니고 ?

장수왕 76년(서기 488) 봄 2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 8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六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秋閏八月 遣使入魏朝貢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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