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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0 14:40
[통일] 휴전보다 더 큰 걱정(한미상호 방위협정)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57  

1. 휴전보다 더 큰 걱정......한미상호 방위협정에 목을 맨 이승만 정부  


포로송환문제의 타결은 바로 이러한 불안한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우리는 이후의 문제에 대해 아직 어떠한 대책도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만일 휴전과 함께 북한에 주둔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면 철군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악몽과 같았다.

만일 그 상태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우리 스스로 전쟁을 치러낼 수 있을지 상당히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과론이지만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즉각적인 참전은 북한이나 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소련도 예상하지 못하였을 만큼 빨랐다. 비록 미국이 대한민국의 탄생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안전까지 보장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소련에게 밀릴 수 없다는 미국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대대적인 참전이 즉각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휴전 이후에도 그럴 것인지는 논외였다.

유엔군이 다시 참전한다는 보장이 휴전협정안 어디에도 없었다. 중국은 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고 또 하나의 배후인 소련도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휴전 후 유엔군이 한반도를 떠나면 다시 참전할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1949년 미군의 철군이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침략이라는 참담한 아픔을 맛 본 우리 정부의 트라우마는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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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이 가시화 되자 통일 없는 휴전은 무의미하다며 연일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휴전 이후에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대책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 정부 또한 휴전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대세임은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전쟁은 1950년 가을을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전으로 비화하였고 그들이 휴전을 결심한 이상 전쟁이 더 이상 확전될 가능성도 전무 하였다.


따라서 미국에게 휴전 이후의 안전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계속하던 상태였지만 반응이 미지근하자 차라리 전선에서 소규모 교전이 계속 벌어지는 형태로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휴전을 지속적으로 반대하였고 그러기 위한 하나의 명분으로 그 전 단계인 포로송환, 그것도 국군포로들의 송환이 담보되지도 않은 타결 내용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를 표한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배제된 상태로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모두에게 우리의 협조가 없다면 휴전이 순순히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1949년 인천항을 통해 철군하는 미 24군단. 1945년 해방 당시 38선 이남 일본군의 무장을 해체시키기 위해 주둔한 주한미군의 철수 후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졌기에 휴전 후 유엔군의 철군 가능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우려는 컸다.



2. 한미상호방위조약 - 이승만, 미군 따돌린 포로석방 작전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끌어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로송환 문제의 타결은 사실상 휴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휴전 이후의 안전에 관하여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 우리 정부와 국민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전국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만큼 당시 대한민국은 가진 것이 없었고 부족한 것만 많았던 약소국이었다. 결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안전한 미래를 지키기 위한 위험한 줄타기를 벌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협정이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6월 6일,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을 은밀히 불러 반공포로 석방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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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원용덕은 육군 헌병사령관 석주암 준장 등과 협의를 거쳐 포로수용소의 경비를 담당하던 육군헌병대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여 도주시킨 후 사전에 약속된 인근 민가에서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전국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명목상 전쟁을 계속하자는 것이지만 실제로 원한 것은 휴전 이후의 안전보장이었다.

그런데 반공포로들은 원한다면 북으로 송환을 거부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작전은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을 자극하여 철저하게 휴전을 방해하려는 이벤트에 가까웠다. 아니 휴전 방해가 목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담보 받기 위한 시위였다.


이승만은 설령 우리가 이런 무리수를 두더라도 휴전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강공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밀사가 파견되었고 6월 18일 00시를 기해서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었다. 명령에 따라 수용소를 경비하는 헌병대는 미군들을 따돌리고 2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데 성공하고 그날 06시에 중앙방송을 통해 ‘반공포로의 석방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불안한 휴전을 반대하던 국민들은 우리의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고 환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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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북한과 중국은 경악하였다. 원하는 대로 포로송환이 매듭지어질 것으로 예상하던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사태에 몹시 당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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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소한 10만 이상의 병력을 새롭게 보충하고 이를 전후 복구에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상태로 포로송환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돌발 사태를 구실로 휴전을 깰 수 있는 시점을 넘어섰다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예상치 못한 전광석화 같았던 반공포로 석방은 국내외에 많은 파장을 불러왔다. 사실 이 사건은 석방보다 이슈를 만들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


3. 벼랑 끝에서 얻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화가 났지만 파투(破鬪)내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그들도 몹시 지쳐 있었고 지금까지 뒤에서 전쟁을 주도한 스탈린이 죽고 정권이 바뀐 소련도 더 이상 전쟁지속을 원하지 않았다.

협상장에서 공산군 측 대표단은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서 엄청나게 항의를 하였지만 이를 빌미로 휴전 자체를 깨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공산군 측의 상황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한 공산군 측은 화천저수지 재점령을 목표로 제한적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들의 의지를 과시하려 하였다. 바로 1953년 7월 13일 실시된 6·25전쟁의 마지막 공세인 중공군 제7차 공세다.

단지 자존심 때문에 예정하지 않은 공세를 벌였을 만큼 휴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의지는 강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랐던 것은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국이었다.

지난 2년간 지루한 협상을 거듭하던 미국은 이제 사인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방공포로 석방은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들게 만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항의를 하였지만 이승만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하여 휴전 직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이승만 달래기에 나선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한 대가로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얻어 냈다.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노련함에 이끌려 한국 정부가 휴전을 막지 않으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속히 체결하여 주기로 약속하였다.

애초 아이젠하워, 덜레스 국무장관,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미국 전쟁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 대한 방위조약을 반대하였을 만큼 부정적인 견해가 컸었다. 하지만 반공포로 석방은 이를 일거에 뒤엎었고 이렇게 해서 체결 된 조약은 현재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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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석방은 즉흥적으로 나온 구상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하게 국제정세를 제단한 후 그 방법론을 찾아 이룬 이승만 정권 연장을 위한 나름의 거사였다. 

이를 이끈 이승만은 1951년 휴전협상 개시 이후 통일이 군사적으로 불가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이후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휴전 후 안전을 보장하는 구체적 발판을 마련하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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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18-05-11 19:45
   
저 시절에는 국력은 나약했어도 지도자는 강단있고 안목이 있었는데 참... 한스럽네요
히스토리2 18-05-11 19:52
   
그러게요 ^^ 아무튼 굴욕적인 부분도 있고 또 다해인 부분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억제력과 지지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주시는 댓글에 감사합니다
     
위구르 18-05-11 19:58
   
별 말씀을요. 저야말로 유익한 글로 인해 안목을 넓힐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6시내고환 18-05-13 19:27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도 저런 판단력있고 치밀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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