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板門店)은 한국 전쟁의 정전 협상이 진행된 곳으로,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상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판문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였다. 현재의 판문점은 정전협정 이후 한국전쟁 포로 교환업무를 맡게된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교환장소로 사용되었던 건물로써, 정전협상이 이뤄진 실제 정전협정 조인장소는 현재의 판문점보다 북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다.
정전협정 이후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의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쌍방의 행정관할권이 미치지 않는다.
1953년부터 1976년까지는 경계선 없이 양측 경비병과 출입자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으나, 1976년 8월 18일에 발생한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이후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관할 구역이 분할되었다.
6·25전쟁 때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문헌에 의하면 판문점일대는 고려시대 송림현(松林縣)지역이었던 곳으로 조선 태종대에 장단군(長66-00}})에 편입되었으며, 송림현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송남면(松南面)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일제시대에 개성군의 일부 지역과 합쳐 장단군 진서면(津西面)으로 되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역이 개성부(開城府)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부근에 널문다리〔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널판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널판지 다리를 판문교(板門橋)라고 불렀는데 ≪개성군면지≫에 의하면 판문교는 개성쪽에서 널문리를 지난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직전 널문리는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仙跡里)와 개풍군(開豊郡) 봉동면(鳳東面) 침송리(針松里)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부터 갑자기 국제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6·25전쟁 휴전협상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당초 휴전회담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내봉장(來鳳莊)에서 개최되었다.
1951. 9. 개성, 초기의 정전 회담장이었던 한 한옥 ‘내봉장(來鳳莊)’
1961년 7월 10일 백기를 달고, 회담장인 개성 선교장에 들어서는 유엔군측 대표백기를 다는 것은 협의사항임에도 공산측은 유엔군측의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1951년 10월 25일 이후 휴전회담장이 된 초기의 판문점의 모습
1951년 11월 30일 판문점에서 기념촬영한 휴전회담 대표단 모습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 및 공동경비구역이 설치되었다.
판문점 휴전회담지역 출입증, 종이로 만든 직사각형의 신분증,
가로 12cm 세로 6.9cm,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현장애서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89년 8월 15일, 임수경, 문규현 신부 불법 방북 후 귀환
1994년 6월 15일~6월 18일까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판문점을 경유 방북 귀환하였다
1998년 6월 16일~1998년 10월 27일 까지 정주영 전 형대회장이 판문점을 경유 소 1001마리을 인솔 방북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