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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6 21:20
[중국] 만주국 건국의 비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302  

1931년의 9·18 사변, 즉 만주사변 소식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愛新覺羅) 부의(溥儀)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안에 있는 장원(張園)에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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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의 일본영사관 시절 


선조들의 고향이 관동군에 유린되고 있다는 소식을 일본조계지 안에서 들어야 했던 부의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부의는 제국에 암운이 짙게 드리던 1906년 청조(淸朝)의 11대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풍)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도광제(道光帝)였다.

그의 운명은 태어난 지 세 살이 채 안 된 1908년 서태후(西太后)가 임종을 앞둔 광서제의 후사(後嗣)로 지명함으로써 역사의 격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해 11월 14일 서른일곱의 광서제가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자 부의가 즉위해 선통제(宣統帝)가 되는데 서태후는 부의의 부친 순친왕을 섭정왕(攝政王)으로 삼아 어린 아들을 대신하게 했다.

2007년 광서제의 유발(遺髮:머리카락) 조사 결과 비소(砒素)가 검출되어 독살 의혹은 더욱 커졌는데 각각 서태후와 원세개(袁世凱)의 소행이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부의는 1960년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에서 원세개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자신의 황위를 빼앗은 원세개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여 아직도 광서제 사망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부의를 다시 황제로 추대한 장훈복벽사건

1911년 손문(孫文)이 주도하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순친왕은 원세개를 끌어들였지만 그는 혁명파와 손을 잡고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파견되기도 했던 원세개는 선통제 부의의 퇴위를 요구했고 협상 결과 청나라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 사이에 ‘청제퇴위우대조건(稱帝退位優待條件)’이 체결되었다.
 
골자는 부의는 퇴위 후에도 ‘대청황제(大淸皇帝)’란 존호를 그대로 유지하며 황궁(皇宮:자금성 및 이화원)에서 생활하는 한편 정부로부터 매년 400만 냥의 생활비를 지급받는다는 내용이었다. 

부의는 명목상의 황제로 환관·궁녀들과 자금성에서 살았다.그런데 황제 자리에 욕심이 난 원세개가 1915년 12월 제정(帝政) 부활을 선언하고 이듬해 원일(元日) 제위에 올랐다. 하남(河南)성 항성(項城)의 한미한 가문 출신 원세개의 즉위에 대해 북양(北洋)군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반대가 들끓자 원세개는 3월 퇴위했고 6월에는 사망했다.

이 무렵 부의는 두 번째 황제로 추대된다. 북양군벌의 장령이었던 장훈(張훈)이 1917년 7월 1일 청조 부활을 선언하면서 부의를 복위시키고 자신은 의정대신(議政大臣)과 직예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된 것이다. 

그러나 12일 만에 군벌 단기서(段祺瑞)에게 패해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주했는데 이를 장훈복벽사건(張훈復辟事件)이라고 부른다.

1919년 5월 부의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영국인 관료 존스턴(Reginald Fleming Johnston·1874~1938)을 가정교사로 삼아 서구식 문물교육을 받았다. 훗날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을 쓰는 존스턴은 부의에게 헨리(Henry)라는 서구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22년 결혼한 황후 완용(婉容)이 북경 태생의 미국인 가정교사 이사벨 잉그램에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받아 부부가 모두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의가 일본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 지진 소식을 접한 부의는 요시자와 겐기치(芳澤謙吉) 일본 공사에게 자금성 내에 있는 보석 등을 의연금으로 전달했고 일본 정부는 대표단을 보내 부의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여기에 1924년 10월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이끄는 봉천군과 조곤(曹琨)·오패부(吳佩孚)·풍옥상(馮玉祥) 등이 이끄는 직예파(直隷派) 군벌이 맞붙는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이 발생하면서 부의는 더욱 일제와 가까워지게 된다. 

봉직전쟁에서 승리해 북경을 차지한 풍옥상이 ‘청제퇴위우대조건’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는 부의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던 것이다.마지막 황제의 안식처를 빼앗은 이 조치는 부의를 일본과 결탁하게 만든다. 당초 부의의 측근 정효서는 존스턴에게 상해나 천진에 있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공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배려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내정간섭 우려가 일 것을 우려한 영국이 거부했다.
 
반면 관동대지진 때 인연을 맺은 요시자와 일본 공사는 즉각 부의의 요청을 수락하고 1924년 11월 북경의 일본공사관으로 들어오게 했고, 1925년 2월에는 천진의 일본조계지 내 장원으로 옮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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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집정으로 취임하는 부의 
            
청조의 마지막 황제를 일본 영사관이 관리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부의는 선황들의 능(陵)이 도굴당하는 동릉사건(東陵事件)을 겪고 충격에 빠진다. 하북(河北)성 준화(遵化)시 창서산(昌瑞山)에 자리 잡은 동릉은 세조 순치제(順治帝)의 효릉(孝陵), 성조 강희제(康熙帝)의 경릉(景陵), 고종 건륭제(乾隆帝)의 유릉(裕陵), 문종 함풍제(咸풍帝)의 정릉(定陵), 목종 동치제(同治帝)의 혜릉(惠陵) 등 5명의 황제릉과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 등 여러 황후의 능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혁명군 제12군 군장(軍長) 손전영(孫殿英) 군대가 건륭제의 유릉(裕陵)과 서태후의 정동릉을 도굴했다. 부의는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손전영이 이미 국민당 간부에게 손을 써 놓았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부의는 동릉사건 때 자금성 추방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울분을 삭이고 있던 부의에게 드디어 9·18 사변 소식이 전해졌다. 부의는 중국 정국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지만 무대가 만주라면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만주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부의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당초 만주 침략을 기획했던 관동군 참모 이시하라 간지의 구상은 만주를 점령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주를 일본이 직접 지배하는 것은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체결된 9개국 조약에 직접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에다 일본과 중국까지 가입한 9개국 조약(Nine-Power Pact)은 각국 해군의 감축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권·독립·영토보전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동군은 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만몽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중국의 행정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만주사변 발발 나흘 뒤인 1931년 9월 22일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대좌, 이시하라 간지 중좌 등이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만몽문제 해결책안(解決策案)>을 만들었다. 동북4성(길림·흑룡강·요녕·열하) 및 몽고를 영유해서 선통제(부의)를 우두머리로 삼는 신정권(新政權)을 수립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부의로서는 일본의 제의를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부의는 나아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와 일종의 충성맹세 비슷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새로 수립될 만주국의 외교, 치안, 국방과 국방상 필요한 모든 시설(철도·항만·수로·항공로)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만주국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인사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원과 지도’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부의는 더한 사항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부의가 바란 것은 황제(皇帝)라는 칭호뿐이었는데 그나마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시기상조라면서 부의를 황제가 아닌 집정(執政)으로 결정했다. 

부의는 이런 과정을 거쳐 천진의 일본조계지에서 6년 만에 나와 1931년 11월 13일 여순(旅順)의 남만주철도회사가 운영하는 대화(大和:야마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동양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김벽휘)는 천진에 잔류하고 있던 황후 완용(婉容)을 수행해 여순으로 향했다. 관동군의 공작을 받은 장경혜(張景惠)는 동북(東北)행정위원회 명의로 1932년 2월 18일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일에는 만주국(滿洲國) 건국 선언을 했다.

동북4성의 광대한 영토와 340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만주국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홀연히 나타나 일본의 대공황을 일거에 해결하고 기근과 인구과잉에 시달리던 식민지 한국민에게도 ‘만주 붐’을 일으켰다가 군국 일제의 패망과 함께 갑자기 사라졌던 수수께끼 왕국이었다.

1932년 2월 16일 저녁 심양(沈陽)의 대화(大和:야마토)호텔에서 건국회의(建國會議)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4거두 회담이 열렸다. 장경혜(張景惠), 장식의(臧式毅), 희흡(熙洽), 마점산(馬占山) 회담이었다. 그런데 이 네 거두의 배경이 사뭇 달랐다.만주국 총리대신이 된 후 친가가 두부가게였다고 해서 세칭 ‘두부총리’로 불린 장경혜는 봉천군벌 중진이었다. 

1926년 봉천파가 장악한 북경정부에서 중화민국 육군총장을 역임했고 1928년 장작림 폭살 사건 때 함께 중상을 입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장작림의 뒤를 이은 장학량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합류하자 장경혜도 남경 국민정부의 군사참의원(軍事參議院)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자마자 만주로 돌아가 장작림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할 때의 커넥션을 되살려 흑룡강성 성장(省長)에 취임했다. 장식의도 장학량에 의해 1930년 요녕성(遼寧省) 정부 주석(主席)에 임명되었던 장학량의 측근이었다.
 
그래서 만주사변 직후 관동군에 의해서 구금되었다. 당초 관동군은 원금개(袁金鎧), 감조새(감朝璽) 등에게 봉천(奉天)지방자치유지회를 조직하게 했지만 곧 역량 부족이 드러나자 장식의를 석방시켜 1931년 12월 봉천성장(奉天省長)에 임명했다.

희흡(1883~1950)은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친동생 무르하치(穆爾哈齊:Murhaci)의 후예로서 만주국 종성(宗姓)인 애신각라(愛新覺羅)씨였다. 희흡은 일본의 동경진무학교(東京振武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 후 동북육군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 교육장을 맡았던 군사통이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희흡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제국의 부활을 꿈꾸면서 4자회담에 참석했다.

4자회담 참가자 중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은 빈농 출신의 마적 두목 마점산이었다. 그는 1911년 장작림의 측근이었던 오준승(<5449>俊陞)에게 발탁되어 1925년에는 여단장까지 올랐다. 만주사변 발발 직후 장학량에 의해 흑룡강성 주석대리에 임명된 그는 북만주 치치하얼을 기반으로 관동군과 정면 충돌하면서 구동북군(舊東北軍) 계열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31년 12월 관동군의 이타가키(板垣征四)가 마점산의 본거지를 압박하면서 사개석(謝介石)을 통해 흑룡강성 성장의 지위를 주겠다고 회유했다. 여기에 하얼빈까지 함락당하자 마점산도 2월 16일 4자회담에 참석한 것이다.다음날 장경혜는 동북행정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2월 18일 국민정부로부터 동북(東北:만주) 지방의 이탈을 선언했고, 3월 1일 만주국을 건국했다. 

만주국 수립 직후 마점산은 흑룡강성 성장 겸 만주국 군정부장을 겸임했지만 4월 1일 흑하(黑河)를 몰래 탈출해 라디오로 항일을 호소하면서 동북구국항일연군(東北救國抗日聯軍)을 조직했다. 그러나 관동군에 패해 1933년에는 소련으로 탈출했다가 유럽을 통해 중국 본토로 다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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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의 이른바 건국회의 때 장경혜와 장식의는 입헌공화제를 주창하고 희흡은 제정(帝政)을 주장하는데, 관동군의 조정에 따라 부의를 집정(執政)으로 삼는 만주국이 건국된 것이다. 

만주국은 청나라의 후신일까? 아니면 일본의 식민지일까? 

둘 다 틀렸다. 만주국은 ‘관동군의 나라’였다. 일본 정부는 만주사변이 시작될 때부터 이를 반대해 왔지만 이미 일본의 군부는 민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직이었다. 

일본 군부에게 만주는 러일 전쟁 당시 20만 명의 일본 장병이 피를 흘려 얻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본 군부는 만주는 일본의 생명선과 같은 곳이라며, ‘만주생명선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생명선이 위협받고 있었다. ‘워싱턴 체제’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확보했던 21개조 요구를 위협받았고, 급속한 공업화로 소련이 옛 러시아의 위세를 회복하는 듯 보였다. 여기에 더해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조만간 중국과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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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째서 관동군은 만주를 점령해 직접 통치하지 않고 번거롭게 ‘만주국’을 만들었던 것일까? ‘워싱턴 체제’ 때문이었다. ‘9개국 조약’이 걸려 있던 것이다. 9개국 조약은 1922년 워싱턴에 회의에 참가했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일본, 중화민국이 맺은 조약으로, 중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된 주권의 확인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에 하나 더 걸린 것이 1928년 8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부전조약(不戰條約)’이다. 한마디로 ‘전쟁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물론 자위권 발동 차원의 전쟁은 인정하지만 국제 분쟁의 해결을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내용을 담은 조약이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을 포함한 15개국이 우선 조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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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은 이 조약을 피해가기 위해 ‘만주국’이라는 유령회사와 푸이라는 바지사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되면 관동군은 명목상 중국을 침략한 게 아니라 중국과 별개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한 일본 군부의 판단은 어땠을까?

1932년 1월, 육군, 해군, 외무성은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만주국은 만주에 거주하는 만주인들의 자발적 분리 독립이다.”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만주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의 개입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미국과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갈라섰고,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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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포로가 된 부의(선통제)






만주국 1회 ~ 8 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외 여러문헌 참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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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5-06 23:12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만주국에 대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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