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동단국은 발해 각지의 반란과 태조 야율아보기의 죽음(926 년, 동명성왕의 승천신화를 모방하여 황룡에 빗댐)으로 인한 황위 다툼 등으로 인하여 발해 멸망 불과 2년 뒤인 928 년에 현 서요하 남쪽, 현 요하 서쪽으로 교치, 축소됐고 현 요하와 동요하 바깥은 숙여진과 생여진 지역으로 편제하여 실질적으로 포기하였습니다
거란 성종은 동정 과정에서 동경 중심지를 현 요양 지역으로 옮겼으며 부여부, 즉 황룡부를 현 사평시에 해당하는 통주로, 현 사평시 북쪽에 있던 신주를 사평시, 즉 통주 근방으로, 발해 동경용원부의 연혁을 끌어와 현 안산~영구 지역에 개주를 설치하고 현 바위취안구에 있던 노주를 현 요양 동쪽 130리로 옮겨 오는 등 교치, 재편제, 신설 작업을 무수하게 하여 거란 동경도 지역 위치와 연혁 분석의 혼잡상을 야기하였습니다
발해 중경현덕부를 요사 지리지에서 현 북진시 일대로 거론하는 이유는 실제 이곳에 발해 건국 최초기의 중경현덕부가 위치했거나 그것이 아니라 동단국이 발해 동평부였던 요주로 옮겨오면서 발해 중심지의 연혁을 요주 중심으로 끌어와서 재배치하면서 천복성을 중심으로 북진시 일대가 중경현덕부로 비정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