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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4 11:15
[한국사] 소소한 역사산책...헌법재판소, 황궁우, 그리고 운현궁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826  

화창한 봄날, 서울 북촌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북촌의 총리관저를 지나 헌법재판소를 한바퀴 도는 코스는 생각보다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그런데로 한달 마감 후 답답했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는 무척 아름다운 길이었다. 헌번재판소에는 백송이 있어서 특별했다. 소나무도 세분하면 여러 종류가 있다. 백송이란 말 그대로 껍질이 하얀 소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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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통과하며 용건을 말하자, 경비 아저씨는 인사 대신 “조용히 보고 오세요”라고 짧은 말을 건넨다. 건물을 돌아서자 작은 언덕 위에 우람한 모습의 백송이 서 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은 항상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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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100살만 넘어도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귀한 취급을 받는다. 헌법재판소의 백송(천연기념물)은 국내에 현존하는 같은 종류의 나무 중 가장 아름다운 개체다.

나무는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는 동안 파란만장한 장면도 많이 지켜봤을 것이다. 600년 동안 보았던 역사 속 인물을 늘어놓으라고 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앉은 자리에 살았던,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홍영식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의 둘째아들로,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영재였다. 너무 어렸던지라 급제 후 2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란 일종의 ‘공부 휴가’를 거친 후에 관직에 나섰다. 후에도 내내 초고속 출셋길을 달렸다.

홍영식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와 박규수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결국 홍영식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일본을 등에 업고 위로부터 시도된 급진적 개혁은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으로 3일 천하란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홍영식은 주위의 망명 권유도 뿌리친 채 왕의 곁에 남았다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광혜원이 된 홍영식의 집은 1987년 연세대학교 캠퍼스 안에 복원됐다.

이후 홍영식의 집은 광혜원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됐다. 광혜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수구파 민영익(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의 돈으로 세워졌다. 민영익은 서양 의학으로 자신을 살려낸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앨런에게 거금을 희사해 근대식 병원 설립에 힘을 보탰다. 광혜원이 설립된 때는 1885년 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지 불과 몇 달 후였다.


환구단에서 -  대한제국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

헌법재판소를 나와, 안국역에서 택시를 타고, 플라자 호텔에서 내리면, 조선호텔의 낮은 언덕의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건물들 사이에서 황궁우(皇穹宇)가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황궁우는 고종 황제가 천신과 지신, 인신(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안치한 3층 8각 건물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지만 황궁우 주변은 늘 인적 드문 산사(山寺)처럼 한적함이 흐른다. 황궁우는 대한제국이 제천의식을 위해 설치한 환구단의 일부다.

조선 말, 고종은 몰락해가는 나라의 왕에서 단숨에 황제가 됐다. 조선이란 국호를 접고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제국’으로 새 출발 하며 꺼져가는 국운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이 됨으로써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호시탐탐 침략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나 러시아란 태풍 앞에서는 그저 가녀린 바람앞의 촛불 신세였다.

황제 즉위식은 옛 남별궁 터, 즉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서 열렸다. 즉위식과 제천의식을 위해 조정은 1897년(고종 34년) 환구단(제천단·祭天壇)을 쌓았다. 그 뒤인 1899년 화강암 기단 위에 황궁우를 축조해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했다.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石鼓)를 황궁우 옆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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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중국 황제는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로 불렸다.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은 천자의 일이었으며 황제가 아닌 제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식은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던 조선 초기부터 억제되기 시작했다가 드디어 세조(1455∼1468년 재위) 때 폐지됐다. 제천의식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부활했다.

하지만 조선의 황제가 천명을 받는 이곳이 일제강점기에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일본은 1913년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지었다. 광복 후 철도호텔이 없어지면서 환구단이 복원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그 터는 이내 대기업에 불하됐다. 황궁우는 호텔의 부속품처럼 홀로 남았다. 호텔 후원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애처로운 형국이다.


운현궁 - 대원군이 추사를 흠모한 곳 

벌써 어둑해 진다. 사실, 헌법재판소에서 운현궁으로 먼저 왔어야 했는데, 길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 또 택시를 타고 일본문화관에서 내려서, 운현궁으로 걸어가 본다.

본래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운 대원군은 운현궁의 모든 편액을 추사체로 집자해 만들었다. 지금 운현궁 옆에는 양관이라는 근대식 건물이 서있다. 작년 도깨비의 집으로 유명해진 곳 이다. 원래 이 양관 부근은 본래 대원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이 있던 자리다. 일제는 가장 신성하다고 할 수 있는 곳에 양관을 지어 운현궁을 내려다보게 했다.

광화문이나 인사동에서 점심을 먹게 되면 종종 운현궁 쪽 으로 산책을 하곤 한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인사동의 소란스러움은 솟을대문을 지나면서 이내 고요해진다.

운현궁은 구한말 천하를 호령했던 대원군의 위세에 걸맞게 그 규모가 대단했다. 덕성여대부터, 교동초등학교, 일본문화원까지 모두 아우르는 옛 운현궁은 지금의 4배 이상 되는 거대한 저택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사랑채와 안채, 별당 정도만 남아 있다. 궁궐도 속절없이 없애버리던 일제 치하에서 궁집(宮家·왕의 가족들이 살던 집)의 규모를 줄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들의 관리주체가 제각각인지라 전부 돌아볼 수 없는 형편이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노안당(老安堂)’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 정치의 구심점이 되었던 건물이다. 원납전 발행 등 파격적인 국가시책부터 쇄국정책까지가 모두 이곳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판의 노안(老安)이란 말은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원군은 과연 건물의 이름처럼 왕의 아버지로서 편안한 노년을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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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1994년 운현궁을 해체보수하면서 상량문(집 공사의 내력을 적은 글)과 함께 은(銀) 덩어리가 하나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도 부족했던지 억년무강(億年無疆)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200g짜리 순은 덩어리는 ‘만일 운현궁을 다시 보수할 때 필요하면 팔아 보태 쓰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옛 사람들이 운현궁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옛집만큼 잠시 쉬었다 가기에 좋은 환경을 선사해 주는 곳도 드물다. 편히 앉을 수 있는 툇마루에서부터 그늘을 만들어 주는 처마까지 말이다. 담 너머 양관(洋館)이 보인다. 운현궁의 양관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저택으로 일본인이 설계, 시공했다. 1917년 이준용이 죽은 후 의왕(義王·순종의 아우)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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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지만, 양관 옆으로는 아재당(我在堂)이라는 별채가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란 뜻의 아재당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가장 즐겨 찾았다는 곳이다. 진정 위풍당당함이 느껴지는 멋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원대한 포부와 자신감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운현궁 담장 위에이름 모를 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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