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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3 12:05
[베트남] 베트남 역사 정리 6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88  

영국군과 중국군의 분할 점령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패색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일본과 프랑스 식민당국 간의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프랑스는 연합군의 인도차이나 진격을 이용하여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1945년 3월에 무력으로 인도차이나 전역을 장악했다. 이로써 4년 이상 유지돼 오던 일본과 프랑스 식민정부와의 불편한 공존관계가 깨졌다.

아울러 80년 동안 계속되었던 프랑스의 식민통치체제도 종식됐다. 일본은 그해 8월 패망할 때까지 베트남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종전(終戰) 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를 반대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은 동의했다.

하지만 처칠 영국 총리는 인도차이나가 신탁통치를 받게 될 경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도 그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 후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도 영국의 압력, 프랑스의 복귀 주장, 미국 국무부 내 유럽 담당자들의 반대 주장, 중국 본토의 혼란, 소련의 부상 등의 이유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식민지의 신탁통치는 식민 본국의 동의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조항에 동의했다.

1945년 9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영국군을 따라 프랑스군도 베트남 재(再)식민지화를 위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영국은 1946년 3월 남베트남 관할권을 프랑스에 이관하고 철수해 버렸다. 중국은 이를 베트남을 다시 병합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한편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의 패퇴


프랑스 패배.jpg

디엔비엔푸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신생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 중국 간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국공내전 때문에 베트남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장제스는 1946년 4월에 중국 내 프랑스의 조계와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의 1개 특구 양보, 인도차이나 주재 화교의 지위 향상 등을 담은 중불(中佛)협상을 체결하고 북베트남을 프랑스에 인도하였다.

프랑스와 베트남민주공화국 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랑스연방 내 독립 베트남’과 ‘완전독립’이라는 양자의 주장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1946년 6월에 베트남자치공화국을 수립한 후, 1946년 12월 군대를 북베트남으로 북상시켰다.

베트남민주공화국 국가 주석 호찌민은 전민(全民)항전을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 푸’에서 최정예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길고 긴 프랑스 지배는 끝났다.

제네바회담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에는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이, 남에는 베트남공화국(월남)이 들어섰다.

원래 프랑스는 베트남자치공화국의 원수(元首)로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를 앉혔었다. 하지만 베트남 우파지도자인 응오 딘 디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19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제네바회담으로 인도차이나반도에는 ‘잠시’ 평화가 왔다. 가톨릭교도인 디엠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펴면서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저항했다.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은 남베트남 내 저항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를 공산주의의 세력 확대로 간주한 미국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베트남에서는 이 전쟁을 ‘대미항전’ 혹은 ‘구국대미항전’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은 대략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60년 1월의 ‘벤째’ 무장봉기에서 1965년 2월 미국이 본격적으로 북폭(北爆)을 전개하게 되는 시기이다.

제2기는 1965년 3월 미(美)지상군의 다낭 상륙을 시작으로 1969년 1월 베트남민주공화국,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미국, 베트남공화국의 4자가 함께 참여한 파리확대회담의 시작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제3기는 1969년 1월 파리확대회담 개시 이후부터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되기 직전까지의 시기이다.

제4기는 1973년 파리평화협정의 조인 이후부터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베트남 전쟁

패망.jpg

1975년 4월 29일, 남베트남 패망을 하루 앞두고 미국 대사관원들이 헬기를 타고 다급하게 철수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었지만, 미국·한국 등 6개국이 참전함으로써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북베트남에 막대한 전비와 무기를 지원했다. 북한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공군 등 군 병력을 파견했다.

미국이 참전한 논리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 전역이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근거했다. 남베트남의 상황이 게릴라전에서 국지전으로 확대되고 남베트남이 흔들리는 상황에 빠지자 미국의 참전은 가시화되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전여론의 설득과 의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먼저 국제적 지지가 절실히 우선되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함정을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전선이 없는 전장에서의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이 투하한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했던 총 화력의 4배에 달하는 800만 톤이었다.

총 54만명의 미군 주둔, 2400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 지출, 8000명의 공군을 포함한 5만7000명의 미군 전사, 5700대의 비행기 손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을 잃었다. 전쟁의 특수를 노려 한국군도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했다. 이 중 5099명이 사망하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도 많은 대가를 치렀다. 300만명이 죽고 500만명이 부상을 입었다. 피아 식별이 쉽지 않은 베트남전쟁 상황에서 남베트남인, 북베트남인, 미군, 한국군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였다.

통일

전쟁 중에도 남베트남의 정정(政情)은 계속 불안했다. 초대 대통령 디엠은 1963년 미국이 묵인한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후 살해되었다. 이후 군사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쿠데타가 잇따랐다. 1965년 응우옌 반 티우가 정권을 잡았으나,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국내외 반전여론에 직면한 미국은 출구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미국 간에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것으로 전쟁은 일단락됐다.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해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의 철문을 부수며 진입했다. 이것으로 오랜 전쟁은 끝났다.

베트남공산당은 통일 이듬해인 1976년 4월 25일에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는 1946년 1월 6일 실시되었던 첫 번째 전국적 총선거에 이어 베트남 역사에서 두 번째로 실시된 전국적 총선거였다. 그 결과 제6대 국회가 탄생되었다.

제6대 국회는 그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첫 번째 회의를 소집하여 새로운 단계에서 베트남 혁명의 주임무를 “통일국가 설립과 사회주의 건설에 있다”고 표명했다.

회의에서는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기를 ‘금성홍기’로, 국가를 ‘진군가’로, 수도를 ‘하노이’로, 사이공시를 ‘호찌민시’로 결정했다.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베트남 전쟁 참전국들과의 대외관계에서 “과거는 접어두고 장래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베트남은 96년 기간의 항전에서 입은 손실에 대하여 프랑스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월간조선 기사 발췌 및 내용보충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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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5-03 14:15
   
[[1964년 8월 북베트남 해군이 미 해군함정을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
.
.
통킹만 사건은 오늘날 시각으로는 미군의 조작 또는 최소한 미국에 의한 북베트남 도발유도설에
무게가 압도적으로 실리고 있는 추세로 알고 있습니다.
히스토리2 18-05-03 15:01
   
*** 프랑스 점령 부분은 수정 했습니다...그리고 통킹만 사건도 님의 견해가 옳습니다.....월간 조선 기사를 정리하고 거기에 생각을 담다보니 일부 오류가 있네요 ...올바른 지적 감사합니다.
꼬마러브 18-05-03 16:38
   
베트남전쟁은 사악하고 끔찍한 미국의 범죄 행위
비좀와라 18-05-03 20:15
   
베트남 역사를 잘 정리해 주셨는데 청불 전쟁시에 청나라는 갑신정변을 꺾고 일본을 견제 하려고 원래 베트남에 가기로 한 군대 상당수를 조선으로 돌린 내용은 빠졌네요. 사실 이 내용이 근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 입니다.

원래 베트남과 한국은 약간의 운명 공동체라 할 까? 뭐 그런것이 있죠. 중국에겐 한국이 베트남 보다 훨씬 중요하기에 중국이 조선의 정변에 정신 없을 때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 한 것 입니다.

이 후에 벌어지는 일도 같은 형상으로 진행됩니다.
     
촐라롱콘 18-05-03 22:56
   
[[베트남 역사를 잘 정리해 주셨는데 청불 전쟁시에 청나라는 갑신정변을 꺾고
일본을 견제 하려고 원래 베트남에 가기로 한 군대 상당수를 조선으로 돌린 내용은 빠졌네요.]]
.
.
.
내용을 완전히 정 반대로 알고 계시네요....!!!

임오군란 이후 일본을 제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한양에 주둔시킨 병력이 3,000~4,000명 규모를 유지하다가....
청불전쟁이 발발함으로 인해 조선주둔군 가운데 절반인 1,500~2,000명이
차출됨으로 인해... 잔류한 청나라군이 1,500~2,000명으로 줄어든 상황이
개화파와 일본공사가 정변을 일으킬 용기를 얻은 하나의 큰 배경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청불전쟁은 이미 한창 진행중인 상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청나라가 청불전쟁에 발이 묶여있는 틈을 타서 개화파와 일본공사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력적인 측면에서 개화파 영향력하의 병력 400명 + 일본군수비대 150~200명을
더해도 1,500~2,000명 규모의 청나라군에 비해 1/3 규모에 불과했고...
청나라군은 수구파 영향력하의 조선군 병력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으니.....
청나라군이 반격을 개시한지 불과 몇 시간 안에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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