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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3 12:00
[베트남] 베트남 역사 정리 5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890  

 일본의 베트남 점령

일본.jpg

1940년 9월 베트남 랑선에 진격한 일본군. 일본은 전쟁 말기까지 프랑스 비시정권의 식민통치기구와 공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그해 8월,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은 나치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정권으로부터 ‘인도차이나의 보전과 프랑스의 주권이 존중’되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상의 특수한 편의’를 제공받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로 및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시정권이 일본의 요구들을 수락했음에도 일본군은 9월 22일 베트남-중국 국경지역으로 진격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로 진출한 것은 이곳을 후방기지로 삼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고, 동남아시아를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일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지배 시스템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일본의 베트남 점령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일본의 점령기간 중 베트남인 2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베트남 사학자들로부터 “일본 역사가들을 비롯해 많은 일본인이 일본 점령기간 중 200만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아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일본인들은 오히려 무슨 근거로 그러느냐고 되묻는다고 했다.

대량 아사는 1944년 말부터 이듬해 7월까지 약 10여 개월 동안 ‘꽝찌’를 포함한 32개 성(省), 특히 북부 베트남에서 많이 발생했다. 이 중 인구가 가장 많은 ‘타이빈’성에서는 전체 인구의 25%인 28만명이 아사했다. 아사가 가장 극점에 도달했던 기간은 1945년 3~6월이었다.


“紅江에선 끊임없이 시체가 떠내려 오고…”



일본2.jpg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군이 굶주린 끝에 낟알을 줍는 베트남 소년을 총대로 때리고 있다.


아사자 200만명은 당시 북베트남 인구 1000만명의 1/5에 해당된다. 농촌은 물론 도시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병사였던 경제학자 고바야시 노보루는 《내 속의 베트남》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농민의 가족들이 문자 그대로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영양실조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아예 굶어 죽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숨을 거둔 남편의 시체 옆에서 통곡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즐비했다.

몇 시간 지나서 다시 돌아와 보면, 아내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홍강(紅江)에선 끊임없이 시체가 떠내려 오고, 강둑에는 들개들이 무리지어 다녔다.〉

베트남 북부에서 1945년 발생했던 아사사건의 요인은 복합적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 요인은 일본에 있다. 보호국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1940년 이후 일본군에게 협력한 프랑스 당국에도 책임은 있다.

1959년 일본은 남베트남과의 전쟁 보상 협상 과정에서

“전쟁 중 많은 물자를 징발하는 바람에 베트남인 30만명이 아사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남베트남과 일부 일본인 그리고 북베트남이 주장하는 100만명과 200만명은 과장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사 이전의 영양이 결핍된 사람들까지 감안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내용의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협상 결과 1960년 일본은 남베트남에 3900만 달러의 전쟁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런 식으로 1955~1977년 일본은 전쟁보상금(준배상금 포함)으로 미얀마 등 11개국에 총 15억 달러를 지불했다.

일본이 남베트남에 배상금을 지불한 것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일본 전후사 1945-2005》에서 “베트남 전쟁은 한국 전쟁만큼은 아니나 일본 경제의 또 다른 약진을 가능하게 했다.

(중략) 베트남 전쟁이 없었다면 이 정도의 규모와 속도로 제2의 고도성장이 진행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베트남의 대 프랑스항쟁


1858년 침략부터 1954년 철수하기까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베트남인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혔다. 장장 96년 동안의 대불(對佛)항쟁은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사대부 계층이 중심이 되어 왕조를 보존, 회복하자는 것이다.

둘째, 유교적 전통을 저변에 깔면서 서구 근대사상에 영향을 받은 애국지사들이 축이 되어 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추구하는 국가형태는 입헌군주국가와 민주국가였다.

셋째, 프랑스 식민지배하에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라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이 형태는 주체가, 자산가 계급과 무산자 계급으로 나뉜다. 전자(前者)가 조직, 연계성, 방법론 등의 결여로 실패한 반면, 후자(後者)는 철저한 조직과 훈련을 바탕으로 연계성, 방법론, 주변부 상황 등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여 독립은 물론 민족의 통일까지 이뤄냈다.

대불항쟁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인물과 조직이 있다. 바로 호찌민(胡志明)과 베트남공산당이다. 호찌민은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민족주의운동의 제일 선구자이다. 그는 독립운동기간에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성뿐만 아니라 이름도 수없이 바꾸었다. 한국에 알려진 그의 아명(兒名) ‘떳 타인’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어렸을 적 성명은 ‘응우옌 신꿍’이다. 떳 타인은 아명 이후에 지은 이름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성명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의 협력을 모색하기 위하여 1942년 8월 중국에 건너갈 때부터 사용했다.

그는 중국국민당계의 군벌인 장파쿠이(張發奎)에게 체포되어 1943년 9월까지 중국 광시성의 13개 현에 산재한 18개 감옥을 옮겨다니며 옥고를 치렀다. 그의 유명한 《옥중일기》는 이 기간에 쓰였다.


호찌민, 조선독립운동에도 관심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응에 안’성에서 ‘응우옌 신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1901년 회시(會試)의 부방(副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한 바 있으나 1910년 파면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한약 조제업에 종사했다.

호찌민에게는 위로 두 명의 누나와 형이 있었는데, 모두 항불(抗佛)투쟁을 하다가 붙잡혀 옥사했다. 이들 외에도 호찌민은 어려서 죽은 남동생도 있었다. 부친의 지도하에 한학을 깊이 배운 그는 수도 트어 티엔-훼의 고등학교에서 근대교육도 접할 수 있었다.

호찌민은 견문을 넓힌 이후에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신념으로 1911년 프랑스 상선의 보조요리사가 되었다. 그해 6월부터 1913년 말까지 그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아메리카를 항해했고, 1914년 초부터는 영국에 머물렀다.

1917년 말 프랑스로 왔을 때, 그는 다국어 능력에 국제적 감각을 겸비한 독립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러시아에서는 10월혁명이 성공했고, 인도차이나에서는 항불투쟁이 가열되고 있었다.

호찌민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그곳의 노동자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1918년 말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정당이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 주던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했다. 호찌민은 3·1운동과 조선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19년 9월 4일자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1920년 1월 8일에는 조선인의 자결권에 대한 토론을 위한 프랑스지리회에 참석, 인도차이나 문제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같은 달에는 주불 조선공화통신사무실과 연락을 갖고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발행하고 있는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를 포함한 각종 저널과 통신 자료 등을 제공받기로 약속받았다. 중국에서의 활동기간에 호찌민은 상하이에서 김구(金九) 등과도 직접 교류를 가졌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호찌민


호치민.jpg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호찌민. 지금도 베트남의 국부로 존경받고 있다

호찌민은 1920년 여름 어느 날 프랑스의 《뤼마니떼》에 실린, 제2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했던 〈민족과 속지문제에 관한 강령〉을 접했다.

그의 전집에 의하면, “그는 이 강령을 수십 번 반복하여 읽은 후에 흥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방에 앉아 마치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 것처럼 큰소리로 ‘압박받는 동포여!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해방에 절대 필요한 이정표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인류 지혜의 정화(精華)와 정상(頂上)이자, 착취 계급을 분쇄하고 노동자·농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유일한 사상과 무기라고 신봉하게 되었다.

1921년 2월에 프랑스공산당이 창당되자 그는 당원이 되어 인도차이나인으로 첫 번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이로써 그의 애국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합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의 민족해방론은 이후 소련과 중국 등지에서의 이론 학습에 따라 더욱 체계화되었다.

호찌민은 1925년 6월 베트남공산당의 전신(前身)인 월남청년혁명동지회(약칭 ‘청년’이라 함)를 중국의 광주에서 세웠다. 청년은 활동목표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봉건제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하여 노동자·농민·병사의 정권을 세우는 것과 이어 세계의 공산화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과 무산계급과의 연합에 두었다.

1930년 2월 3일에 베트남공산당이 홍콩에서 설립됐다. 이 무렵 유산자(有産者) 계급의 대표 정당으로서 독립운동의 한 축을 주도하던 베트남국민당이 와해됐다. 베트남공산당은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됐다.

베트남공산당은 활동 과정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한 민중·민족 혁명세력을 결집하는 차원에서 일시 해체하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베트남공산당은 이러한 전략에서 해산하는 대신 전위(前衛)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월맹)을 건설했다.

냉전시대에 우리가 북베트남을 ‘월맹’이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1951년 2월 베트남공산당은 베트남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가 통일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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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롱콘 18-05-03 14:18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4월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
.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시기는 1940년 4월이 아니라 6월입니다.

독일군이 베네룩스 삼국과 프랑스를 쳐들어간 시점이 동년 5월 10일이고
6월 14일 파리함락, 6월 22일 프랑스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1940년 4월은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공략하던 시기입니다.
히스토리2 18-05-03 15:01
   
수정했습니다. ^^ 좋은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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