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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3 11:42
[베트남] 베트남 역사 정리 3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39  

 몽골의 침략을 물리친 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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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략을 물리친 쩐흥다오는 한국의 이순신과 비견할 수 있는 민족영웅이다. 과거 남베트남 지폐에 실린 쩐흥다오의 초상

리왕조를 몰아내고 들어선 쩐(陳)왕조(1226~1400)는 리왕조의 황족을 살해하는 한편, 전국에 영(令)을 내려 리씨 황족의 성을 응우옌(阮)씨로 고치도록 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 응우옌 씨가 가장 많게 된 데에는 이 조치도 한 원인이 됐다.

비슷한 시기의 고려왕조처럼 쩐왕조도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몽골의 베트남 침략은 1257년과 1285년 그리고 1287년 세 차례였다. 베트남은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나라 중에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유일한 나라이다.

당시 베트남의 쩐왕조는 오늘날 베트남 면적의 2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작은 나라였다. 쩐왕조 시절의 베트남이 몽골의 침략을 세 차례나 저지한 것은, 현대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중국을 물리친 것을 연상케 한다.

1279년 남송(南宋)을 쳐서 중국을 완전히 정복한 몽골의 쿠빌라이는 동남아시아 진출을 꾀했다. 몽골이 베트남을 침략한 것은 남방의 진귀한 물산(物産)을 획득하고 정치적으로 남방을 종속시키기 위해서였다. 몽골은 베트남을 점령해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자신들에게 없는 해군력을 손에 넣으려 했다.

이를 위해 몽골은 30년에 걸쳐 약 100만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남을 침략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세 차례에 걸친 몽골 침략을 모두 격퇴한 사람은 왕족인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이었다.

특히 세 번째로 침략했을 때 쩐흥다오는 348년 전 응오왕조가 남한군을 물리쳤을 때처럼 바익당강 바닥에 말뚝을 박아놓은 후 몽골의 군선(軍船)을 유인했다가 간조(干潮)로 적선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틈을 타서 기습,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는 쩐흥다오를 이순신 같은 민족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베트남의 승리는 베트남과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에서의 패배는 몽골이 일본 침략을 중단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明나라의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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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문묘 및 국자감. 베트남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문화권의 일원임을 보여준다


리왕조의 외척으로 왕권을 찬탈해 들어선 쩐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태상황(太上皇) 제도와 황족의 근친혼(近親婚)이 그것이다. 태상황 제도는 태자가 장성하면 제위(帝位)를 그에게 물려주고 부왕(父王)은 태상황으로 물러나는 제도였다.

제위는 물려주었지만, 실권(實權)은 태상황이 행사했다. 대신 아들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서 국정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군주의 사후(死後) 제위 다툼이 벌어져 왕족과 관리들이 분열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

태상황 제도는 호(胡)왕조(1400~1406)와 막(莫)왕조(1527~1592)도 시행했다. 근친혼 제도는 외척이 왕권을 찬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 쩐왕조는 베트남 역사상 황족 간 근친혼을 허용한 유일한 왕조였다. 그러나 쩐왕조 역시 외척 호뀌리에 의하여 왕권을 잃었다.

쩐왕조의 뒤를 이은 호왕조는 명(明)의 침략을 받아 건국한 지 불과 6년 만에 패망했다. 호왕조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단명한 왕조였다. 독립왕조시대에 들어선 후 외침(外侵)으로 망한 최초의 왕조이기도 했다.

호왕조를 연 호뀌리는 쩐왕조의 부마(駙馬)로 있던 시절부터 개혁을 추진했다. 바로 불교에 바탕을 둔 귀족-군주 제도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관료-군주 제도로의 변혁을 시도한 것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흥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숭불적(崇佛的) 귀족들의 나라였던 고려를 무너뜨린 것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호뀌리의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민심이반에 직면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1406년 “책봉에 역행했으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침공했다.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467년 만에 다시 독립을 잃은 것이다.


10년간의 투쟁 끝에 독립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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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와의 10년 투쟁 끝에 베트남의 독립을 회복한 레러이


베트남을 병합한 명은 다시는 베트남을 잃지 않으려 했다. 전에는 토착민들의 자치를 상당히 인정하는 느슨한 간접지배체제를 택했었다. 이번에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다. 베트남의 반란을 차단하기 위하여 중국의 진나라처럼 베트남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를 압수한 것은 물론, 무기의 소지와 제조도 금지했다.

명나라는 문화말살정책도 폈다. 베트남의 습속을 만속(蠻俗) 혹은 이속(夷俗)으로 폄하하며 자신들의 습속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남녀의 치아염색과 단발을 금지하고 여자의 긴 치마와 짧은 상의 착용을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역사를 지우기 위하여 수많은 서적을 탈취해 갔다. 리왕조의 《형서(刑書)》와 레반 흐우의 《대월사기(大越史記)》도 이때 빼앗겨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베트남 역사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왔던 타인 호아 출신인 레러이(黎利)가 2000명의 의병(義兵)을 일으켜 반명(反明)투쟁에 나섰다. 10년간의 투쟁 끝에 명군을 물리친 레러이는 후레(後黎)왕조(1428~1527, 1533~1788)를 세웠다.

후레왕조는 약 360년간 존재했지만 실제로 흥성기간은 처음 100년 정도뿐이다. 1527년에는 막당중(莫登庸)의 찬탈로 잠시 망하기도 했다. 이후 후레왕조는 회복, 통일됐지만 찡·응우옌 씨 양 집안의 권력싸움에 의하여 북(北)과 남(南)으로 나누어졌다.

베트남 역사는 후레왕조가 흥성했던 100년 기간과 회복·통일기간을 각각 레초와 레중흥시대라 한다. 막당중이 후레왕조를 멸하고 열었던 왕조와 얼마 후 회복된 후레왕조를 각각 북 왕조와 남 왕조 혹은 막왕조와 후레왕조라 한다.

이들 왕조가 공히 국호를 다이 비엣(大越)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때를 1국호 2왕조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북에 찡 씨, 남에 응우옌 씨가 대립하던 시기를 1왕조 2주(主)시대라고 한다.

현대에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북은 베트남민주공화국, 남은 베트남공화국이라고 칭했지만, 남북 모두 베트남(越南)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이다. 당시 우리는 북베트남을 월맹(越盟)이라고 불렀다.

월맹은 베트남공산당이 혁명운동시대에 모든 인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잠시 공산당을 해체하고 전위(前衛)조직으로 내세웠던 월남독립동맹(越南獨立同盟)의 약칭이다. 월맹은 국호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베트남을 호칭하려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베트남공화국, 혹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베트남’이라는 국호를 남긴 응우옌 왕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는 응우옌(阮)왕조(1802~1945)이다. 16~18세기 동안의 지난한 분쟁 과정을 거쳐 세워진 응우옌왕조는 지금의 영토 형태로 전국을 통합한 최초의 왕조였다. 중·근대 양대(兩代)에 걸쳐 존재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응우옌왕조는 쇄국(鎖國)정책을 추구하다가 프랑스 제국주의에 주권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대중으로부터 가장 비판을 많이 받는 왕조다.

응우옌왕조는 베트남 역사에서 드물게 중부에 수도를 둔 왕조였다. 정치적으로 탕롱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세력으로부터 이탈하고, 청(淸)나라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수도를 지리적으로 중앙이 되는 트어 티엔-후에에 정한 것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방대한 영토를 갖게 된 통일왕조가 균형 있게 국가 운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응우옌왕조는 국호를 남월(南越·남비엣)이라 했다. 안남(安南)과 월상(越裳·점성) 및 획득한 캄보디아의 영토를 통합한다는 의미였다. 안남이라는 명칭은 중국 당이 676년에 베트남에 안남도호부를 세운 데서 비롯했다. 1164년(1174년이란 주장도 있음) 송이 베트남왕을 책봉할 때에도 ‘안남’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청에 책봉과 국인(國印)과 국호를 요청했다. 청은 베트남이 제안한 국호 ‘남월’이 진나라 말에 찌에우다가 세운 나라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두세 차례 국서(國書)를 보내는 한편, 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책봉을 받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베트남의 마음을 잃을까 염려한 청은 베트남이 요구한 ‘남월’ 대신 글자의 앞뒤를 바꾸어서 ‘월남(越南·비엣남)’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과거 우리에게 익숙했던 월남, 지금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베트남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황제 칭호와 독자적 年號 사용

이러한 국호 결정 과정은 리왕조하에서 송이 일방적으로 국호를 정하고 베트남이 이를 조건 없이 수용했던 전례(前例)와 비교할 때 양국 간 관계가 상당히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즉 지금까지는 중국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국제질서를 감안하여 국호를 요청하는 형식을 빌렸다.

하지만 응우옌왕조에 들어와서는 한편으로는 서구의 진출로 국제질서에 변화가 감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넓은 국토를 차지한 통일왕조를 건설했다는 자존감도 생겼다.

스스로 국호를 결정한 후, 중국의 추인(追認)을 요청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물론 ‘월남(비엣남)’이라는 국호가 결국 청나라가 만들었다는 것은 베트남이 여전히 중국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밍망(밍 메잉·明命. 1820~1840) 황제는 1839년 국호를 다이남(大南)으로 바꾸었다. 청나라에 대하여 대등한 태도를 취했던 그는 이전 왕조로부터 지금까지 중국의 승인을 받아 사용했거나 사용하고 있는 국호에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대청(大淸)’처럼 ‘대남’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데서 청과 대등한 위상을 추구하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밍망 황제는 더 나아가 국호를 다이 비엣 남(大越南)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베트남이 중국 및 동남아 주변국들을 대했던 태도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중국의 책봉을 받아들였고, 중국이 정해준 국호와 왕호를 사용했다. 이 점은 조선과 흡사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황제 칭호와 함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국가의 자긍심을 고양하였다.

기원전 141년 한무제 이래 연호는 기년법(紀年法)의 기준이 되어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주변 국가들이 사용해 왔다. 베트남이 동아시아에서 공동연대(年代)의 기준이 되어 중국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중국의 연호를 무시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은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과 더불어 자신이 중국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천명한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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